[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어디까지 긍정적일 수 있나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손 보고 마음 읽어내는 엄마도
긍정적 친구도 내 마음 위로돼
외로운 이 돌아보는 새해 되길
이소연 시인
긍정적 친구도 내 마음 위로돼
외로운 이 돌아보는 새해 되길
이소연 시인
엄마는 사람의 마음이 손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운명이 점쳐진다고 했다. “아빠 손은 못생겼는데?” 엄마는 아빠랑 결혼하게 된 것도 투박하고 거친 손 때문이라고 했다. 상처 많은 그 손을 보고 있으면 험한 길도 잘 헤쳐 나갈 마음이 읽혔다고 했다. 삶을, 사람을 읽어내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남편 이병일 시인이 결혼 승낙을 받으러 왔을 때도 엄마가 손 얘길 꺼냈다. “손이 참 곱네.” 투박한 손이 좋다고 했었는데 손이 고운 남자라고 트집을 잡으려나? 생각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 손이 고우면 얼마나 고운 글을 쓰겠어” 하는 것 아닌가. 투박하고 거친 손에서 읽어낸 마음도 좋고 고운 손에서 읽어낸 마음도 좋다. 엄마가 손에서 읽어내는 의미란 웬만한 유럽 철학자들을 능가했다. 결국엔 좋은 것만 남기는 엄마의 마음 읽기를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하루가 멀다고 통화하는 김은지 시인에게 하소연했다. “어제부터 성적 입력 기간인데 내가 배점 비율을 잘못 설정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전산실까지 연락해서 겨우겨우 수정했지, 뭐야.” 이렇게 말하면 김은지는 쯧쯧 혀를 차겠지. 그런 예상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칭찬을 해줬다. “해결하면 된다는 믿음 하나로 전산실까지 연락한 너의 대처 능력이 대단한걸?” 수정할 수 없을 때 이런 실수를 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아찔하면서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수정 가능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김은지 시인과 울산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업무를 마치고 식사하러 가는 길, 그만 숙소 키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은지는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 어디서 잃어버린 줄 알아. 우리 카메라에 증거들이 담겨 있을 거야.” 한 시간여 울산 시장을 훑어본 끝에 키를 찾았다. 내가 처음 말한 곳에 있었다. 친구는 “셜록 홈스 같아. 너의 추리력은 대단해”라고 칭찬했다. 나 같으면 화부터 냈을 것만 같은데. 긍정적인 친구를 곁에 둔다는 것은 축복이다.
2024년은 힘차고 역동적인 용의 해다. 새해를 맞아 서로가 복을 빌고 긍정적인 말을 주고받는 시기다. 한편으론 춥고 외로운 사람들도 돌아보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다고 말했다. 외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이란 모든 사유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나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시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외로움에 약간의 고독이 깃들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도 너무 무리한 긍정일까.
내가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책방, 카페, 침대, 작업실 ‘해변’, 2024년에는 더 많은 고독을 느끼고 친구들의 고독도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발표된다. 아시다시피 ‘등용문’이란 말도 저 푸른 용에서 나왔다. 저 용의 기운을 받고서 활활 날아오르는 작품이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 기운은 번진다. 번지고 번져 복을 준다고 믿는다. 당선 여부를 떠나 모든 응모자가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긍정이란 것은 어떤 몸을 가졌을까. 아니 어떻게 생겼을까. 포항 호미곶을 휘몰아치게 하는 노을을 닮았을까. 포항의 오어사 못을 지분거리며 다니는 자라를 닮았을까. 북한산 꼭대기의 흰빛처럼 차고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오늘 나도 시집에 사인을 하면서 엄마처럼 내 손을 들여다보고 싶다. 손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남편 이병일 시인이 결혼 승낙을 받으러 왔을 때도 엄마가 손 얘길 꺼냈다. “손이 참 곱네.” 투박한 손이 좋다고 했었는데 손이 고운 남자라고 트집을 잡으려나? 생각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 손이 고우면 얼마나 고운 글을 쓰겠어” 하는 것 아닌가. 투박하고 거친 손에서 읽어낸 마음도 좋고 고운 손에서 읽어낸 마음도 좋다. 엄마가 손에서 읽어내는 의미란 웬만한 유럽 철학자들을 능가했다. 결국엔 좋은 것만 남기는 엄마의 마음 읽기를 자주 생각하는 요즘이다.
하루가 멀다고 통화하는 김은지 시인에게 하소연했다. “어제부터 성적 입력 기간인데 내가 배점 비율을 잘못 설정해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어. 전산실까지 연락해서 겨우겨우 수정했지, 뭐야.” 이렇게 말하면 김은지는 쯧쯧 혀를 차겠지. 그런 예상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칭찬을 해줬다. “해결하면 된다는 믿음 하나로 전산실까지 연락한 너의 대처 능력이 대단한걸?” 수정할 수 없을 때 이런 실수를 했으면 어떡할 뻔했나 아찔하면서도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수정 가능하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김은지 시인과 울산으로 출장 갔을 때의 일이다. 업무를 마치고 식사하러 가는 길, 그만 숙소 키를 잃어버렸다. 그런데 은지는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 어디서 잃어버린 줄 알아. 우리 카메라에 증거들이 담겨 있을 거야.” 한 시간여 울산 시장을 훑어본 끝에 키를 찾았다. 내가 처음 말한 곳에 있었다. 친구는 “셜록 홈스 같아. 너의 추리력은 대단해”라고 칭찬했다. 나 같으면 화부터 냈을 것만 같은데. 긍정적인 친구를 곁에 둔다는 것은 축복이다.
2024년은 힘차고 역동적인 용의 해다. 새해를 맞아 서로가 복을 빌고 긍정적인 말을 주고받는 시기다. 한편으론 춥고 외로운 사람들도 돌아보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고독과 외로움이 다르다고 말했다. 외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버림받고 실제로 혼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이란 모든 사유가 이루어지는 시간이며 나 자신과 대화가 가능한 시간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외로움에 약간의 고독이 깃들 수 있다면 좋겠다. 이것도 너무 무리한 긍정일까.
내가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책방, 카페, 침대, 작업실 ‘해변’, 2024년에는 더 많은 고독을 느끼고 친구들의 고독도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
각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들이 발표된다. 아시다시피 ‘등용문’이란 말도 저 푸른 용에서 나왔다. 저 용의 기운을 받고서 활활 날아오르는 작품이 많았으면 좋겠다. 좋은 기운은 번진다. 번지고 번져 복을 준다고 믿는다. 당선 여부를 떠나 모든 응모자가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기쁨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도대체 긍정이란 것은 어떤 몸을 가졌을까. 아니 어떻게 생겼을까. 포항 호미곶을 휘몰아치게 하는 노을을 닮았을까. 포항의 오어사 못을 지분거리며 다니는 자라를 닮았을까. 북한산 꼭대기의 흰빛처럼 차고 아름다운 것이었을까. 오늘 나도 시집에 사인을 하면서 엄마처럼 내 손을 들여다보고 싶다. 손엔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