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탄소중립 현실론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
탄소중립 논쟁의 핵심은 실현 가능성에 있다. 온실가스 감축에 실패하면 미증유의 기후변화 대재앙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탄소중립은 타협 불가 목표라는 이상론과 현재의 기술 수준, 경제 여건 등을 고려하면 단기간에 실현 불가능하므로 기후변화 적응력을 높이며 달성 시한을 늦춰야 한다는 현실론이 부딪히고 있다.

탄소중립 이상론은 ‘지구를 살리자’ ‘하나뿐인 지구, 돈으로 살 수 없다’ 등과 같은 지극히 감성적 구호를 앞세워 환경 윤리 명분을 선점한다. 또 탄소중립 현실론을 돈 때문에 지구를 죽음의 길로 이끄는 비윤리적 주장쯤으로 매도한다.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은 마치 천사인 체하는 일종의 ‘악마 프레임’이다. 일단 천사의 마스크를 쓰면 모든 행동은 손쉽게 선한 의도로 해석된다. 탄소중립 이상론이 옹호하는 재생에너지 만능주의는 이런 식으로 선한 이념이 돼 논쟁의 대상에서 점차 벗어나 재생에너지 확대의 논리적 기반이 된다.

하지만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의도와 달리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한때 아프리카 물 부족 국가에 ‘뺑뺑이’로 알려진 빙글빙글 돌아가는 놀이기구와 수동펌프를 결합한 일명 플레이펌프가 널리 보급된 적이 있다. 아이들이 ‘뺑뺑이’를 돌리며 노는 동안 펌프가 작동하는 원리로, 아이들은 놀이기구가 생겨서 좋고 어른들은 수고를 덜 수 있는 일석이조의 착한 프로젝트로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무용지물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놀이기구 아래 펌프를 추가한 플레이펌프는 돌리기 힘들었고, 속도도 느렸다. 아이들은 곧 흥미를 잃었고, 시골 아낙들이 대신 플레이펌프를 돌려야 했다. 더 큰 문제는 일반 수동펌프의 5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플레이펌프의 물 공급 능력에 있었다. 오죽하면 가디언지는 한 마을에 필요한 물을 플레이펌프로 끌어올리려면 하루 27시간(?)을 돌려야 한다는 웃지 못할 기사를 쓸 정도였다.

플레이펌프 아이디어는 물 부족 국가를 도우려는 선한 의도로 시작됐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수천 개의 플레이펌프가 방치되거나 철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플레이펌프 프로젝트는 마음만 앞선 나머지 실질적인 효과를 냉철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이타주의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기록됐다.

재생에너지도 ‘지구를 살리자’는 선한 동기에서 확대되고 있지만, 현실적 제약과 과학적 분석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추진하면 플레이펌프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현재의 기술 수준 아래에서 재생에너지의 효율성은 여전히 전통에너지에 비해 한참 못 미칠 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의 태생적 약점인 간헐성 문제를 극복하면서 동시에 안정적이고 충분한 에너지를 공급할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머지않은 장래에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재생에너지 기술이 개발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현재 보급되고 있는 태양광과 풍력 설비는 여기저기 흉물로 방치되고 철거되는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의 저자 윌리엄 맥어스킬은 이타적 행위에 데이터와 이성을 적용할 때 비로소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급하다고 결과가 뻔한 길로 무작정 들어서는 것은 능사가 아니다. 현실을 냉정히 평가하고 인내심을 갖고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한 걸음 천천히 간다고 해서 그리 늦은 것은 아니다. 탄소중립 현실론을 마냥 비난할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