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친 수양대군도 곧바로 궁궐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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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한이수의 성문 밖 첫 동네
- 김종서의 집터와 '서울의 봄'
"농업박물관 앞의 김종서 집터에 서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 김종서의 집터와 '서울의 봄'
"농업박물관 앞의 김종서 집터에 서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서울 서대문 사거리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농협’ 간판이 많이 보인다. 1970년대 만해도 대다수 국민들이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농촌에도 아파트 거주자들이 많고, 농업만을 통해 가계를 꾸려가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농사도 박물관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시대가 됐다. 농협중앙회 옆에는 농업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에 들어서면 볼거리들이 많다. 고향이 농촌인 사람들은 어릴 적 향수도 느껴보고 재미있는 체험도 해보길 권한다.
농업박물관 앞에는 ‘김종서의 집’이라는 표석이 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계유정난 때 단종 편에 서서 죽임을 당했다' 정도였는데 그가 쌓아 놓은 공을 찬찬히 살펴보니 만만치가 않다.
먼저 그는 6진을 개척한 인물이다. 지금 한반도의 북쪽 경계, 두만강 유역이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는 여진과의 전투에서 가슴과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여진족을 몰아냈고, 우리 주민들을 이주시켜 나라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16세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고 세종의 명으로 고려사를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세종시 장군면인데 ‘장군’이라는 지역명은 김종서 장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실력자다. 그의 집이 이 돈의문 밖에 있었다.
1417년생인 수양대군(세조, 이름 이유·李瑈, 1417~1468)과 대비되는 사람이 1383년생 김종서다. 수양이 아무리 왕의 적자인 ‘대군’이라 하지만 좌의정 김종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선대 왕 세종, 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문무에 능하고 나이도 지긋한 국가의 원로였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 신숙주(1417년)와 동갑이다. 또래는 성삼문(1418년), 박팽년(1417년) 등이 있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김종서와는 급이 달랐다. 거사를 하려면 김종서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1453년 계유년 11월 10일, 계유정난은 이 서대문 밖 김종서의 집에서 시작됐다. 수양대군을 태운 말이 돈의문을 나와 비탈길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인적은 드물었고 횃불을 든 종이 일행을 김종서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문밖에서 김종서를 불렀다. 수양대군을 먼저 알아본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에게 대군이 온 것을 고하자 김종서가 나와 두 번, 세 번 문 앞에 있지 말고 집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수양은 사양하며 사모의 뿔(관모 옆 좌우에 붙이는 액세서리)이 떨어져 나갔으니 빌려 달라고 말한다. 김종서는 자기 사모의 뿔을 빼 수양에게 주었고 수양대군은 비밀스러운 청이 있다며 서찰 하나를 김종서에게 주었다.
서찰을 달빛에 비추어 읽으려는 순간, 수양대군의 부하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놀라 아버지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양정이 김승규를 칼로 벤다. 그들은 김종서가 죽었겠거니 하고 서둘러 빠져나온다. 김종서는 일을 당하기 몇 시간 전 수양대군의 측근인 권람 등과 술을 마셨다. 수양대군 일행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권람은 숭례문과 서소문을 장악했다. 거사의 시작이다. 돈의문 문지기에게는 수양대군이 문밖에 나갔으니 인경(저녁에 도성 문을 닫기 위해 28번 타종) 종소리가 나도 문을 닫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은 곧장 입궐해 단종에게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보고했다. 역모는 자신이 해놓고 뒤짚어 씌웠다. 역모 잔당을 제거해야 하니 지금 모두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왕의 재가를 받는다. 한밤중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입궐하는 영의정 황보인, 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차례로 철퇴로 내리쳐 죽인다. 그러나 7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 김종서는 이번에도 일어섰다. 여장을 하고 몰래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피려 했다. 이미 사대문을 장악한 반란 세력들에게 저지당하자 둘째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겨우 몸을 숨겼다.
다음날 철퇴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깨어나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숨어있는 곳에 신하 양정을 보낸다. 김종서가 양정에게 "정승이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가마)을 내오너라"라고 말하자 양정은 가차 없이 김종서의 목을 벤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수양이 정권을 장악하자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켜 죽인다. 친동생 안평대군에게는 약사발을 내렸다. 모진 고문 끝에 사육신을 죽였다. 피바람 속에서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등극했다. 계유년에 발생한 일이라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 사건은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치밀하게 추진된 왕위 찬탈 사건이다. 조선에서 재위한 26명의 왕 중에 장자가 왕이 된 것은 8명에 불과하다. 조선 초기부터 장자 왕위 계승은 물거품이 되었다. 룰은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서대문 밖에서 55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요즘 천만 관객을 훌쩍 넘은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79년 12.12 사건이 일어났다. ROTC 출신 역사 선생님은 지난밤에 총소리를 못 들었냐고 물으며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후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10.26, 12.12 등 우리나라의 역사가 원칙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절이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갖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김종서였다. 그를 두고서 역모를 실행할 수 없었다. 김종서가 눈치채고 공격하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했다. 신군부도 마찬가지다.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 정승화를 제거해야 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정승화는 전두환과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야심을 눈치챘다.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을 동해에 있는 경계부대에 보내려고 했다. 전두환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이 사령관인 합동수사본부도 계엄사령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10.26 당시 궁정동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무력으로 제압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안전 가옥)의 ‘나’동에 있었고 사건은 ‘가’동에서 일어났는데도 10.26에 연루된 것으로 몰아갔다. 별 2개 소장이 별 4개 대장에 대한 하극상이다. 그리고 청와대로 향했다. 550년 전,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친 뒤 수양도 곧바로 궁궐에 들어갔다. 김종서가 역모를 꾀한다고, 그리고 역모를 꾀하는 잔당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단종을 겁박했다. 자신들의 불법을 최고 책임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이다. 전두환은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에게 정승화 체포 동의안을 받아냈다. 어르고 달래며 새벽 5시가 넘어서였다. 두 사건은 궁궐이냐 청와대냐, 왕이냐 대통령이냐,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모든 절차가 매우 유사하다.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왕으로 등극했고 전두환도 대한민국의 제11대,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세조는 세법을 개정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호패법 등을 시행해 북방을 개척했다. 전두환도 올림픽을 유치했고 경제도 제법 일구었다. 문제는 치적이 불법성을 합법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이 깊어진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본 어떤 이는 분해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마음이 먹먹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유는 자명하다. 어릴 적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교과서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배웠다.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니 우리 역사에서는 권력을 불의에 내준 경우가 많았다.
농업박물관 앞의 김종서 집터에 서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농업박물관 앞에는 ‘김종서의 집’이라는 표석이 있다. 김종서(金宗瑞, 1383~1453), 학창 시절 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계유정난 때 단종 편에 서서 죽임을 당했다' 정도였는데 그가 쌓아 놓은 공을 찬찬히 살펴보니 만만치가 않다.
먼저 그는 6진을 개척한 인물이다. 지금 한반도의 북쪽 경계, 두만강 유역이 여진족의 땅이었다. 그는 여진과의 전투에서 가슴과 허벅지에 화살을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여진족을 몰아냈고, 우리 주민들을 이주시켜 나라의 국경선을 확정했다. 16세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문신이고 세종의 명으로 고려사를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그가 태어난 곳은 세종시 장군면인데 ‘장군’이라는 지역명은 김종서 장군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참으로 훌륭한 실력자다. 그의 집이 이 돈의문 밖에 있었다.
1417년생인 수양대군(세조, 이름 이유·李瑈, 1417~1468)과 대비되는 사람이 1383년생 김종서다. 수양이 아무리 왕의 적자인 ‘대군’이라 하지만 좌의정 김종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선대 왕 세종, 문종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문무에 능하고 나이도 지긋한 국가의 원로였다. 수양대군은 집현전 학자 신숙주(1417년)와 동갑이다. 또래는 성삼문(1418년), 박팽년(1417년) 등이 있었다. 집현전 학자들은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김종서와는 급이 달랐다. 거사를 하려면 김종서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1453년 계유년 11월 10일, 계유정난은 이 서대문 밖 김종서의 집에서 시작됐다. 수양대군을 태운 말이 돈의문을 나와 비탈길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인적은 드물었고 횃불을 든 종이 일행을 김종서의 집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문밖에서 김종서를 불렀다. 수양대군을 먼저 알아본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아버지에게 대군이 온 것을 고하자 김종서가 나와 두 번, 세 번 문 앞에 있지 말고 집에 들어오기를 청했다. 수양은 사양하며 사모의 뿔(관모 옆 좌우에 붙이는 액세서리)이 떨어져 나갔으니 빌려 달라고 말한다. 김종서는 자기 사모의 뿔을 빼 수양에게 주었고 수양대군은 비밀스러운 청이 있다며 서찰 하나를 김종서에게 주었다.
서찰을 달빛에 비추어 읽으려는 순간, 수양대군의 부하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의 머리를 내리쳤다.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가 놀라 아버지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양정이 김승규를 칼로 벤다. 그들은 김종서가 죽었겠거니 하고 서둘러 빠져나온다. 김종서는 일을 당하기 몇 시간 전 수양대군의 측근인 권람 등과 술을 마셨다. 수양대군 일행이 자신을 죽이러 온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권람은 숭례문과 서소문을 장악했다. 거사의 시작이다. 돈의문 문지기에게는 수양대군이 문밖에 나갔으니 인경(저녁에 도성 문을 닫기 위해 28번 타종) 종소리가 나도 문을 닫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은 곧장 입궐해 단종에게 김종서, 황보인 등이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보고했다. 역모는 자신이 해놓고 뒤짚어 씌웠다. 역모 잔당을 제거해야 하니 지금 모두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왕의 재가를 받는다. 한밤중에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입궐하는 영의정 황보인, 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차례로 철퇴로 내리쳐 죽인다. 그러나 70세를 바라보는 백전노장 김종서는 이번에도 일어섰다. 여장을 하고 몰래 사대문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살피려 했다. 이미 사대문을 장악한 반란 세력들에게 저지당하자 둘째 아들 김승벽의 처가에 겨우 몸을 숨겼다.
다음날 철퇴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깨어나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숨어있는 곳에 신하 양정을 보낸다. 김종서가 양정에게 "정승이 어찌 걸어가느냐? 초헌(가마)을 내오너라"라고 말하자 양정은 가차 없이 김종서의 목을 벤다.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수양이 정권을 장악하자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시켜 죽인다. 친동생 안평대군에게는 약사발을 내렸다. 모진 고문 끝에 사육신을 죽였다. 피바람 속에서 조선의 7대 왕, 세조가 등극했다. 계유년에 발생한 일이라 계유정난이라 한다. 이 사건은 문종이 죽고 단종이 즉위한 직후부터 치밀하게 추진된 왕위 찬탈 사건이다. 조선에서 재위한 26명의 왕 중에 장자가 왕이 된 것은 8명에 불과하다. 조선 초기부터 장자 왕위 계승은 물거품이 되었다. 룰은 있었으나 잘 지켜지지 않았다. 서대문 밖에서 55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요즘 천만 관객을 훌쩍 넘은 영화 '서울의 봄'이 화제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79년 12.12 사건이 일어났다. ROTC 출신 역사 선생님은 지난밤에 총소리를 못 들었냐고 물으며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후 정승화 참모총장의 체포 소식을 들었다. 10.26, 12.12 등 우리나라의 역사가 원칙 없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시절이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갖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 김종서였다. 그를 두고서 역모를 실행할 수 없었다. 김종서가 눈치채고 공격하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했다. 신군부도 마찬가지다.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 정승화를 제거해야 거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정승화는 전두환과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의 야심을 눈치챘다. 하나회의 우두머리인 전두환을 동해에 있는 경계부대에 보내려고 했다. 전두환은 마음이 급해졌다. 자신이 사령관인 합동수사본부도 계엄사령관의 통제 아래 있었다.
전두환은 정승화가 10.26 당시 궁정동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무력으로 제압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질 당시, 정승화는 궁정동 안가(안전 가옥)의 ‘나’동에 있었고 사건은 ‘가’동에서 일어났는데도 10.26에 연루된 것으로 몰아갔다. 별 2개 소장이 별 4개 대장에 대한 하극상이다. 그리고 청와대로 향했다. 550년 전, 김종서를 철퇴로 내리친 뒤 수양도 곧바로 궁궐에 들어갔다. 김종서가 역모를 꾀한다고, 그리고 역모를 꾀하는 잔당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단종을 겁박했다. 자신들의 불법을 최고 책임자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위이다. 전두환은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에게 정승화 체포 동의안을 받아냈다. 어르고 달래며 새벽 5시가 넘어서였다. 두 사건은 궁궐이냐 청와대냐, 왕이냐 대통령이냐, 배경과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모든 절차가 매우 유사하다.
수양대군은 조선의 제7대 왕으로 등극했고 전두환도 대한민국의 제11대, 12대 대통령이 되었다. 세조는 세법을 개정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했다. 호패법 등을 시행해 북방을 개척했다. 전두환도 올림픽을 유치했고 경제도 제법 일구었다. 문제는 치적이 불법성을 합법화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고민이 깊어진다. 영화 '서울의 봄'을 본 어떤 이는 분해서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마음이 먹먹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이유는 자명하다. 어릴 적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교과서에서 권선징악(勸善懲惡), 사필귀정(事必歸正)을 배웠다. 반드시 정의가 승리하기 때문에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니 우리 역사에서는 권력을 불의에 내준 경우가 많았다.
농업박물관 앞의 김종서 집터에 서면 수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