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의 뿌리는 ‘정치인 양성소’로 전락한 1980년대 옥스퍼드 [책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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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초엘리트
사이먼 쿠퍼 지음
김양욱·최형우 옮김/글항아리
288쪽|1만8000원
사이먼 쿠퍼 지음
김양욱·최형우 옮김/글항아리
288쪽|1만8000원
“저에겐 귀족, 상류층, 노동계급 등 모든 계층에서 온 친구들이 있습니다. 아 잠깐만요, 노동계급 친구는 없는 것 같네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2001년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산층: 계급의 등장과 확대’에서 한 옥스퍼드대 학생이 한 말이다. 그의 이름은 리시 수낵, 현재 영국 총리다. 수낵 이전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도 모두 옥스퍼드대 출신이다. 1940년 이후 영국 총리는 17명인데, 이 중 13명이 옥스퍼드대를 나왔다. 케임브리지대는 한 명도 없다.
옥스퍼드가 훌륭한 대학이기 때문일까. <옥스퍼드 초엘리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옥스퍼드 출신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쿠퍼는 이 책에서 그야말로 ‘정치인 양성소’처럼 작동했던 1980~90년대 옥스퍼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옥스퍼드는 학생 선발 때부터 대놓고 중상층과 상류층 사립학교 출신 백인 남성을 선호했다. ‘통치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공부는 뒷전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높은 성적 받는 건 낮은 계급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끼리끼리 어울리며 인맥을 쌓았고, 영국 하원을 본뜬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정치 놀음을 했다.
책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영국 보수당 리더십의 혼란 등의 뿌리도 1980년대 옥스퍼드에서 찾는다.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과 그 동년배들이 이때 옥스퍼드를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안을 깊이 알 필요 없이 토론에 이기기 위해 말만 잘하면 된다고 믿었다. 영국은 자기네가 다스리는 곳으로 유럽연합(EU)의 간섭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대다수 옥스퍼드 출신은 EU 잔류를 선호했지만, 브렉시트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주도한 것도 옥스퍼드 출신이었다.
옥스퍼드대에서 가장 유명한 코스는 철학·정치·경제(PPE) 전공이다.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란 지적을 받지만, 최소한 현실 감각은 익힐 수 있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PPE를 전공한 의원의 95%가 유럽 잔류에 투표했다. 반면 탈퇴에 투표한 의원들은 대부분 고지식한 과목을 전공했다. 고전문학, 역사학 등이다.
특히 옥스퍼드에서 가르친 역사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영국 역사가 아닌 잉글랜드 역사에 치중했다. 그것도 단순한 잉글랜드 역사가 아닌 지배 계급의 역사였고, 상류층 입장에선 가문의 역사였다. 자기 선조들의 업적, 화려했던 대영제국의 역사에 빠져든 상류층 자제들은 완전히 뒤바뀐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영국을 통치하고,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국가의 미래를 놓고 깊이 있게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한 건 오로지 ‘정치’였다. 옥스퍼드의 유서 깊은 토론 모임인 옥스퍼드 유니언이 그 무대였다. 회장, 사무총장, 총무, 도서관장을 8주에 한 번씩 선출한다. 그때마다 선거전이 벌어지고, 동맹과 배신이 일어난다. 서운한 감정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다음번 선거에선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손을 잡기도 한다.
하원처럼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앉고 서로를 ‘존경하는 의원님’이라고 부른다. 의회를 본떳지만, 실제 옥스퍼드 학생회는 따로 있기에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진지한 정책 논의보다는 수사(修辭)에 집중했다. EU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앤서니 가드너는 옥스퍼드 유학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유니언은 사실에 대한 정확성보다 번득이는 재치에 더 가치를 두었어요. 많은 미국 학생이 토론 시간에 지루하게 통계 자료를 읽으면 가엾게도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던 게 기억납니다.”
2000년대 들어 옥스퍼드도 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1980년대의 옥스퍼드와 다를 게 없었다. 왜 유독 1980~90년대 졸업생이 문제일까. 저자는 이전 옥스퍼드 졸업생도 철부지였던 것 같지만 1·2차 세계대전 등 격랑을 겪으며 성숙해졌다고 설명한다. 전장에서 상류층은 현실을 마주했고, 여러 계층 사람과 만났다. 장교로서 책임감을 갖고 이들을 이끌어야 했다. 1970년까지만 해도 영국 고위 정치인 대부분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가졌다. 하지만 1980년대가 되자 비극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1980년대 졸업생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국의 현실을 마주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외면했다. 학연과 지연으로 직장에 들어가 끼리끼리 모였다. 정치에 뛰어든 뒤에도 당선이 안정적인 지역구를 맡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 깊게 교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리더를 길러내고 있는가’. 책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의적절하다.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이가 필요하지만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히게 해선 안 된다. 개인의 영달만 바라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영국의 현실을 말하는 책이지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2001년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 ‘중산층: 계급의 등장과 확대’에서 한 옥스퍼드대 학생이 한 말이다. 그의 이름은 리시 수낵, 현재 영국 총리다. 수낵 이전 데이비드 캐머런,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도 모두 옥스퍼드대 출신이다. 1940년 이후 영국 총리는 17명인데, 이 중 13명이 옥스퍼드대를 나왔다. 케임브리지대는 한 명도 없다.
옥스퍼드가 훌륭한 대학이기 때문일까. <옥스퍼드 초엘리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옥스퍼드 출신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쿠퍼는 이 책에서 그야말로 ‘정치인 양성소’처럼 작동했던 1980~90년대 옥스퍼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옥스퍼드는 학생 선발 때부터 대놓고 중상층과 상류층 사립학교 출신 백인 남성을 선호했다. ‘통치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공부는 뒷전이었다. 열심히 공부하고 높은 성적 받는 건 낮은 계급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끼리끼리 어울리며 인맥을 쌓았고, 영국 하원을 본뜬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정치 놀음을 했다.
책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영국 보수당 리더십의 혼란 등의 뿌리도 1980년대 옥스퍼드에서 찾는다.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과 그 동년배들이 이때 옥스퍼드를 다녔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안을 깊이 알 필요 없이 토론에 이기기 위해 말만 잘하면 된다고 믿었다. 영국은 자기네가 다스리는 곳으로 유럽연합(EU)의 간섭은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록 대다수 옥스퍼드 출신은 EU 잔류를 선호했지만, 브렉시트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주도한 것도 옥스퍼드 출신이었다.
옥스퍼드대에서 가장 유명한 코스는 철학·정치·경제(PPE) 전공이다. 국가 운영에 꼭 필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란 지적을 받지만, 최소한 현실 감각은 익힐 수 있었다. 2016년 국민투표에서 PPE를 전공한 의원의 95%가 유럽 잔류에 투표했다. 반면 탈퇴에 투표한 의원들은 대부분 고지식한 과목을 전공했다. 고전문학, 역사학 등이다.
특히 옥스퍼드에서 가르친 역사는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영국 역사가 아닌 잉글랜드 역사에 치중했다. 그것도 단순한 잉글랜드 역사가 아닌 지배 계급의 역사였고, 상류층 입장에선 가문의 역사였다. 자기 선조들의 업적, 화려했던 대영제국의 역사에 빠져든 상류층 자제들은 완전히 뒤바뀐 현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영국을 통치하고,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국가의 미래를 놓고 깊이 있게 고민한 것도 아니었다. 열심히 한 건 오로지 ‘정치’였다. 옥스퍼드의 유서 깊은 토론 모임인 옥스퍼드 유니언이 그 무대였다. 회장, 사무총장, 총무, 도서관장을 8주에 한 번씩 선출한다. 그때마다 선거전이 벌어지고, 동맹과 배신이 일어난다. 서운한 감정이 오래가지도 않는다. 다음번 선거에선 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시 손을 잡기도 한다.
하원처럼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앉고 서로를 ‘존경하는 의원님’이라고 부른다. 의회를 본떳지만, 실제 옥스퍼드 학생회는 따로 있기에 권한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진지한 정책 논의보다는 수사(修辭)에 집중했다. EU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앤서니 가드너는 옥스퍼드 유학 시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유니언은 사실에 대한 정확성보다 번득이는 재치에 더 가치를 두었어요. 많은 미국 학생이 토론 시간에 지루하게 통계 자료를 읽으면 가엾게도 혹독한 비판이 쏟아졌던 게 기억납니다.”
2000년대 들어 옥스퍼드도 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1980년대의 옥스퍼드와 다를 게 없었다. 왜 유독 1980~90년대 졸업생이 문제일까. 저자는 이전 옥스퍼드 졸업생도 철부지였던 것 같지만 1·2차 세계대전 등 격랑을 겪으며 성숙해졌다고 설명한다. 전장에서 상류층은 현실을 마주했고, 여러 계층 사람과 만났다. 장교로서 책임감을 갖고 이들을 이끌어야 했다. 1970년까지만 해도 영국 고위 정치인 대부분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가졌다. 하지만 1980년대가 되자 비극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1980년대 졸업생들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영국의 현실을 마주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외면했다. 학연과 지연으로 직장에 들어가 끼리끼리 모였다. 정치에 뛰어든 뒤에도 당선이 안정적인 지역구를 맡았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 깊게 교류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리더를 길러내고 있는가’. 책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에게도 시의적절하다.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젊은이가 필요하지만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히게 해선 안 된다. 개인의 영달만 바라는 사회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영국의 현실을 말하는 책이지만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