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오픈런의 원조…'고약'한 종기 물리친 이명래 고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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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 첫 동네
지금은 사라진 충정로역 뒤편 '추억의 약방'
기름진 음식 못먹어 피부병 많았던 韓
서양 신부, 이명래에 고약 제조법 전수
충남 아산서 한의원 열다 서울 올라와
매일 300~400명이 새벽부터 '장사진'
종기 잦아들자…2002년 '역사 속으로'
지금은 사라진 충정로역 뒤편 '추억의 약방'
기름진 음식 못먹어 피부병 많았던 韓
서양 신부, 이명래에 고약 제조법 전수
충남 아산서 한의원 열다 서울 올라와
매일 300~400명이 새벽부터 '장사진'
종기 잦아들자…2002년 '역사 속으로'
충청남도에 내포(內浦)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지금은 ‘내포신도시’로 유명하지만, 가야산이 마치 엄마의 품처럼 동네를 가로지르고 있는 곳이다. 서쪽에는 큰 바다가, 북쪽에는 아산만이, 동쪽엔 너른 들판이 있다. 자연으로 둘러싸인 참으로 좋은 동네다. 이 동네 초입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다. 공세리성당이다.
‘공세리’라는 곳은 충청 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서해바다와 인접해 신부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라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왔다. 그는 폐허가 된 조세창고와 제당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년,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만든 고딕 양식 형태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돌을 주워다가 성당의 기초를 다졌다. 성곽돌로 사용된 돌들이 성당을 두르고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성당을 둘러싸고 있어 고풍스럽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혔을까?
이 성당과 많이 닮은 성당이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의 북쪽 고딕 형태의 모습은 공세리성당을 옮겨놓은 듯 많이도 닮았다. 공세리성당과 약현성당의 닮은 점은 단지 겉모습만이 아니다.
신부의 곁엔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던 성실한 한 소년이 있었다. 드비즈 신부는 피부병을 낫게 한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그 소년에게 가르쳐줬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이명래’다. 이명래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0년생인 이명래는 명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신앙을 따라 집안이 공세리로 이사했고, 거기서 은인을 만났다. 신부에게 고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그는 1906년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고약은 기름이 칠해진 종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까만 약을 싼 형태다. 어릴 적 종기가 나면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약국에 가서 ‘이명래 고약 좀 사오라’고 했다. 약국에 가서 ‘고약 달라’고 하면 ‘이명래 고약’을 줬다.
고약을 사 오면 어머니는 큰 팔각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고약을 녹인 다음 상처 부위에 고약이 녹은 기름종이를 붙였다. 불을 붙이는 것도 무서웠고 그것을 상처에 발라 검은 기름종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창피해 도망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명래는 어린 나이에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해 돈을 벌다가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로 올라왔다. 충정로가 그가 한의원을 개업한 현장이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날마다 진풍경이 연출됐다.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고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아궁이에 불 때는 사람,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사업이 날마다 번창하던 그때, 전쟁이 났다.
그게 화근이었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 딸과 2남 2녀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하며 이명래한의원에 불을 질렀다. 이때 사진은 물론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됐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데리고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1월 7일, 전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피, 피’ 외마디 소리와 함께 뇌출혈로 사망한다. 1952년 서울로 돌아온 이광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명래한의원이란 간판을 달고 장인의 사업을 재건한다.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이광진은 장인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3대 계승자인 임재형은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이광진의 뒤를 이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구조였다. 이명래한의원은 고약 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돈이 되는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수익 구조를 맞추기 어려워 결국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이명래의 딸 이용재(1922~2009)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 이명래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관철동에 설립한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 약을 198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명래제약도 문을 닫는다.
이명래고약은 지금도 판다. 약국에 가서 달라고 하면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명래제약이 문을 닫으며 소유권을 다른 제약사에 넘겼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이명래고약은 국민을 종기와 부스럼에서 해방시켜줬다. 이명래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남아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공간은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맛집 동네로 변한 충정로역 뒷골목을 간다면, 예전을 추억하며 명래한의원의 흔적을 찾아보시기를….
한이수 도시문화해설사·NF컨소시엄에이엠 대표
‘공세리’라는 곳은 충청 지역 40개 고을의 조세미를 쌓아두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곡을 실어 나르기 위한 조운선(물건을 실어 나르는 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동네 사람들은 무사항해를 기원하는 제당을 아산만이 훤히 내다보이는 공세창 언덕에 만들었다. 서해바다와 인접해 신부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라 일찍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5년 5월, 이 마을에 에밀 드비즈 신부가 본당 주임으로 왔다. 그는 폐허가 된 조세창고와 제당자리에 성당을 지었다.
지금의 성당은 1922년, 적갈색의 연와조 벽돌을 구워 만든 고딕 양식 형태다. 허물어진 공세창의 성벽돌을 주워다가 성당의 기초를 다졌다. 성곽돌로 사용된 돌들이 성당을 두르고 수백 년 된 팽나무와 느티나무가 성당을 둘러싸고 있어 고풍스럽다. 얼마나 아름다우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뽑혔을까?
이 성당과 많이 닮은 성당이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이다. 약현성당의 북쪽 고딕 형태의 모습은 공세리성당을 옮겨놓은 듯 많이도 닮았다. 공세리성당과 약현성당의 닮은 점은 단지 겉모습만이 아니다.
동서양 의술 결합으로 만들어진 ‘고약’
성당의 본당 신부로 부임한 드비즈 신부는 의학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다. 사랑을 전하는 방편으로 의술을 익혔다. 한국에 와보니 마을 사람들이 기름진 음식을 잘 먹지 못해 부스럼이나 종기가 많이 나는 것을 알았다. 드비즈 신부는 생약 처방에 관한 서양 원서와 한방 의서를 놓고 치료 약을 만들어 시험했다. 의학에 관심이 많은 데다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사람이기에 서양의학과 한방을 곁들인 동서양 의술의 결합이었다. 결과물은 부스럼을 치료하는 고약(膏藥)이었다. 이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까만 약제를 기름종이에 싸서 종기 난 부위에 붙이니 며칠 만에 감쪽같이 나았다고 전해진다.신부의 곁엔 자신의 심부름을 잘해주던 성실한 한 소년이 있었다. 드비즈 신부는 피부병을 낫게 한 고약 조제법과 의학 기술을 (형편이 어려워 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그 소년에게 가르쳐줬다. 이 소년이 그 유명한 ‘이명래’다. 이명래의 집안은 선대로부터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890년생인 이명래는 명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자 신앙을 따라 집안이 공세리로 이사했고, 거기서 은인을 만났다. 신부에게 고약 제조법을 전수받은 그는 1906년 스스로 약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겠지만 고약은 기름이 칠해진 종이에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까만 약을 싼 형태다. 어릴 적 종기가 나면 어머니는 두말할 것도 없이 약국에 가서 ‘이명래 고약 좀 사오라’고 했다. 약국에 가서 ‘고약 달라’고 하면 ‘이명래 고약’을 줬다.
고약을 사 오면 어머니는 큰 팔각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고약을 녹인 다음 상처 부위에 고약이 녹은 기름종이를 붙였다. 불을 붙이는 것도 무서웠고 그것을 상처에 발라 검은 기름종이를 붙이고 다니는 것도 창피해 도망 다니던 기억이 난다. 이명래는 어린 나이에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해 돈을 벌다가 자신감을 얻어 1920년 서울로 올라왔다. 충정로가 그가 한의원을 개업한 현장이다. 지금 그 모습 그대로 외관을 유지하고 있다.
“번호표 뽑고 기다리는 사람 매일 수백 명”
한의원 시절의 풍경을 이명래의 막내딸 이용재는 회고한다. “매일 300~400명의 환자가 새벽부터 이곳에 몰려왔다. 번호표를 나눠주고 대기하게 한 다음에 진찰하고 고약을 팔았다.”앞마당에는 날마다 진풍경이 연출됐다. 진찰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약재를 큰 가마에 넣고 고아서 고약을 제조하는 사람, 만들어진 고약 덩어리를 으깨서 기름종이에 늘어뜨리는 사람, 아궁이에 불 때는 사람, 재료를 조달하러 이리저리 뛰는 사람…. 사업이 날마다 번창하던 그때, 전쟁이 났다.
그게 화근이었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렀는데 9·28 수복 때 아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둘째 사위 이광진의 집으로 떨어져 이광진을 제외한 둘째 딸과 2남 2녀 외손자, 외손녀를 모두 잃었다. 한술 더 떠 인민군들은 후퇴하며 이명래한의원에 불을 질렀다. 이때 사진은 물론 제약에 필요한 자료들이 몽땅 소실됐다.
이명래는 사위 이광진과 남은 가족을 데리고 평택 서정리로 피난을 갔다. 1952년 1월 7일, 전날 술을 마시고 돌아와 잠을 자다가 ‘피, 피’ 외마디 소리와 함께 뇌출혈로 사망한다. 1952년 서울로 돌아온 이광진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명래한의원이란 간판을 달고 장인의 사업을 재건한다.
보성전문학교 출신인 이광진은 장인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은 비법을 토대로 충정로역 뒤편에서 고약을 계속 만들었다. 3대 계승자인 임재형은 경희대 한의대를 졸업하고 이광진의 뒤를 이었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구조였다. 이명래한의원은 고약 집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돈이 되는 보약 손님은 거의 없었다. 수익 구조를 맞추기 어려워 결국 2011년 영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지금도 외형은 이명래한의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한편 이명래의 딸 이용재(1922~2009)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 이명래고약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관철동에 설립한다. 고약의 성분을 일부 변경해 대량생산에 나섰다. 이 약을 1980년대까지 많은 사람이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형편이 나아지며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어지고 고약 대신 바르는 연고제가 선을 보이며 2002년 명래제약도 문을 닫는다.
이명래고약은 지금도 판다. 약국에 가서 달라고 하면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니다. 아마도 명래제약이 문을 닫으며 소유권을 다른 제약사에 넘겼기 때문일 것이다. 가난한 시절의 이명래고약은 국민을 종기와 부스럼에서 해방시켜줬다. 이명래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이 성문 밖 첫 동네에 남아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공간은 기억을 소환한다. 지금은 맛집 동네로 변한 충정로역 뒷골목을 간다면, 예전을 추억하며 명래한의원의 흔적을 찾아보시기를….
한이수 도시문화해설사·NF컨소시엄에이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