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반 고흐(1853~1890)는 네덜란드 남부에 있는 쥔더르트에서 태어났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고흐의 미술관이 있는 곳도 네덜란드 수도 암스테르담이다. 그런데도 고흐의 대표작 대부분은 파리와 아를, 생 레미 같은 프랑스 남부 지방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37세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그의 묘지가 자리한 곳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오베르)다. 프랑스의 벨 에포크는 고흐의 걸작들을 탄생시킨 동인이 됐지만 그가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한 것도 바로 아름다운 시절의 일이다. 고흐는 벨 에포크의 빛과 그림자를 누구보다 극명하게 보여준 화가다.

고흐는 16세에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구필 화랑에서 화상으로 일하며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잠시 전도사로 전업했다가 27세가 되던 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이 시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자연에서 발견한 여러 색조를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금빛을 띠는 녹색 이끼, 붉거나 푸르거나 노란빛을 띠는 짙은 라일락 그레이의 땅, 자그마한 밀밭의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녹색, 느슨하게 매달린 채 황금색 비에 소용돌이치듯 휘날리는 가을 잎, 그 속에 우뚝 서서 검은색으로 젖어 있는 포플러 나무, 자작나무, 라임오렌지나무, 사과나무…. 그 색채는 얼마나 인상적이던지….”

벨 에포크가 탄생시킨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1889).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1889).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그의 서정적이고 투명한 정서와 달리 네덜란드 시기 작품은 가난한 농부 가족의 식사 장면을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처럼 어두운 색조가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그의 작품에서 밝은 색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파리에 온 이후의 일이다.

고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여러 도시를 전전한 끝에 33세가 되던 해인 1887년 드디어 파리 몽마르트르에 정착한다. 프랑스에 도착한 직후에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 영향으로 파리와 근교 풍경을 원색의 밝은 색채로 그리기 시작했다. 2년여간 체류한 파리에서 고흐는 200점에 가까운 작품을 그렸고, 툴루즈 로트레크 같은 동료 작가들과 함께 공동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당대 미술 중심지인 파리에서 새로운 미술 경향을 익히며 화가로 첫발을 내딛긴 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벨 에포크 시기에 전 세계 예술가들은 파리 진출을 열망했고, 고흐도 파리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미술가를 이르는 에콜 드 파리 중 한 사람이었다.

파리에서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화가로서 명성을 얻는 것은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에콜 드 파리와의 경쟁을 거친 후에 가능한 일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흐는 화상으로 일하는 동생 테오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동료 화가들과의 갈등도 잦아져 결국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지방 아를로 거처를 옮긴다.

아를에 체류하는 동안 고흐는 자신이 머물던 거처를 노란색의 눈부신 색조로 그린 ‘노란 집’과 ‘아를의 침실’을 비롯해 ‘밤의 카페 테라스’와 같은 그의 대표작을 남겼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흐는 이 도시를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란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적었다. 남부 지방의 따뜻한 기후 때문에 아를의 마을과 자연에는 원색이 만들어낸 보색 대비가 넘쳐났고, 이런 풍경은 고흐의 창작열을 자극하는 요인이 됐다.

에콜 드 파리로서의 삶

아를에 머무는 동안 동생 테오는 고흐가 좋아하던 화가 폴 고갱을 초대해 함께 작업할 수 있도록 해줬다. 화상인 테오는 고갱의 작품을 구입해준 것을 인연으로 그를 아를로 초대했다. 고갱을 환대하는 의미로 고흐는 해바라기 연작을 12점이나 그려 그의 방을 장식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것으로 훈훈하게 공동생활을 시작했지만 점차 의견 대립이 고조됐다. 결국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일을 벌이면서 둘의 관계도 마침표를 찍었다.

고흐의 이상 행동은 아를의 지역 신문에 상세하게 보도될 정도였다. 그는 정신 병원에서 치료받고 생 레미의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곳에 머문 짧은 기간에도 고흐는 붓을 놓지 않았다. 갓 태어난 자신의 조카를 위해 그린 ‘꽃 피는 아몬드 나무’에는 고흐가 그의 가족에게 보내는 따스한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생 레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고흐는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리기도 했다.

1890년에는 자신의 보호자 테오가 머무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로 이사했다. 이곳에 머무른 기간은 고작 두 달에 불과하지만 정신과 의사인 가셰 박사와의 만남으로 정신적 안정을 되찾고 ‘오베르의 교회’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같은 작품들을 그리면서 작업에 몰두하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고흐는 끝내 오베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흐는 유전적으로 정신 질환을 앓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앙토냉 아르토는 그의 죽음을 사회적인 것으로 정의했다. 사회성이 부족한 그의 성격과 예민한 예술가적 기질은 당대 사회가 규정한 정상의 범주에 포함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이를 사회와 의학이 광기로 단정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구를 정신병적 증상으로 간주한 벨 에포크 시절의 잔혹사는 최근 여러 연구와 저술을 통해서도 소개되고 있다. 아르토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에콜 드 파리는 미술의 수도 파리에서 고흐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경쟁에 뒤따르는 압박감과 좌절을 맛봤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고흐의 죽음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당대의 사회적인 상황들과 연계된 것이기도 하다.

지금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는 고흐가 생을 마감하기 전 오베르에서 체류한 두 달 동안 그린 회화 77점과 데생 33점을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베르 시기 작업을 중심으로 구성된 첫 번째 전시이기도 하다.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들을 통해 그의 예술과 삶을 다시금 반추해보는 것도 고흐를 새롭게 만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