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 밖으로 몰려간 군인들 [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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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31. 경기감영 터- 임오군란의 현장
31. 경기감영 터- 임오군란의 현장
충정로를 이야기하며 서대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서대문의 본명은 돈의문(敦義門)이다.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최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5상(五常)을 사대문에 한 글자씩 넣어 이름을 지었다. 오상에는 이미 방위 개념이 포함돼 있다. 동쪽을 상징하는 어질 인(仁)은 당연히 동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이름이 되었고, 남쪽 방위 개념인 예(禮)는 숭례문(崇禮門)이 되었다. 서쪽을 나타내는 의(義)를 넣은 이름이 돈의문(敦義門)이다. 지혜 지(智)자는 북향을 말하나, 조금의 변화를 꾀하기 위해 의미가 비슷한 꾀 정(靖)자로 교체해서 숙정문(肅靖門)이 됐다. 인의예지신 중에서 인의예지는 사대문에 쓰였고 중앙을 의미하는 신(信)은 서울의 중앙, 종로 한복판 보신각에 쓰였다. 종각에 있는 ‘보신각(普信閣)’의 ‘신’자가 믿을 신(信)이다. 우리 문화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었을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가 서대문으로 부르는 문은 돈의문이다. 서대문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됐다.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고 서대문구에 서대문이 없다. 숭례문만 중구에 속하고 서대문, 동대문, 숙정문이 모두 종로구에 속한다. 서울 공동화로 거주 인구가 줄자 종로구를 확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돈의문은 조선 초 한양도성을 쌓을 때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서대문이 있는 자리가 경복궁의 팔과 다리에 해당한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팔과 다리에 해당하는 곳에 서대문이 뻥 뚫려 풍수상 좋지 않으니 문의 위치를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선 초의 권신인 이숙번 집 앞에 문을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집 앞에 문이 있으면 소음으로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문의 위치를 경덕궁(경희궁) 쪽으로 옮기고 이름도 돈의문에서 서전문(西箭門)으로 바꿨다. 동대문에서 쭉 이어져 종로를 거쳐 마포로 가는 서대문로(새문안길)는 이숙번의 집을 피해 일직선이 되지 못하고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휘어진 것이다. 이후 1422년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앞으로 한 번 더 옮겨지면서 이름도 본래대로 돈의문이 되었다. 새로 지은 문이라 새문, 신문(新門)이라 하고 이 근방을 신문, 새문이라 불렀다. 주변에 신문사가 많아 신문로가 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다. 신문(新門), 한글로 새문이다. 서대문 안쪽에 있는 새문안교회는 이 새로 생긴 돈의문, 즉 새문 안쪽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참 잘 지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한양도성의 안쪽이다. 한양도성은 남산에서 내려와 숭례문 구간을 통과해 정동 이화여고를 가로질러 돈의문으로 이어진다. 이곳 한양도성이 통과하는 서대문, 성문 밖에 경기감영이 있었다. 지금의 경기도청은 수원에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밖에 경기감영이 있었다. 수도 한양과 경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경기감영이 사대문 밖, 궁궐 지근거리에 있어야 왕의 하명을 받기도 쉽고, 보고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서울 적십자병원이 경기감영이 있던 자리다. 경기 관찰사가 근무하던 경기 감영은 1896년에 수원으로 내려갔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크게 조명을 받을 때가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때다.
국사 수업 시간에 조선 후기의 역사적 사건을 연도별로 외웠던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기억할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지원으로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생겼다. 이들에게 모든 지원이 몰리자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은 형편없는 대접을 받는다. 목숨과 녹봉을 바꾸어 먹고사는 게 군인들인데, 13개월 치나 월급이 밀려 이제나 저제나 창고에 쌀이 들어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 수입상가 자리에는 대동미를 보관해 두는 미곡 창고 선혜청이 있었다. 이곳의 당상관을 맡고 있던 민겸호, 전임 당상관이자 현 경기도 관찰사인 김보현이 봉급 연체를 초래한 원흉으로 지목된다. 드디어 전라도에서 세곡선이 도착했다. 선혜청에서는 세곡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밀린 봉급 중 우선 1개월 치를 지급했다. 그런데 담당 고지기(관아의 창고 관리자)가 쌀에 겨와 모래를 섞고 나머지를 빼돌렸다. 격분한 군인들은 고지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 역사에서 반복됐다. 6.25 때 ‘국민 방위군 사건’이라 하여 군인들의 식량과 보급품을 빼돌려 수만 명의 군인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이때 국방부 장관 이기붕이 이를 잘 해결해 국민들에게 큰 신임을 얻은 바도 있다. 이 일은 나중에 살펴볼 일이고,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는 김춘영 등 항의하는 주동자를 포도청에 넘겼다. 이에 가담자들은 조계사 뒤편의 민겸호의 집(현 대한재보험)으로 달려가 집과 가재도구를 때려 부수었다. 나중에 민겸호가 죽자 이 집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외국 공무원, 묄렌도르프에게 하사됐다. (이 집은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이 자상을 입자 선교사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준 현장이고 나중에 독일 공사관이 된다) 민겸호의 아들이 충정로의 주인공 민영환이다. 민영환의 별서(별장)가 지금의 프랑스대사관 자리였다고 하니, 아마도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가 경기 관찰사 시절 경기감영 지척인 충정로 별서에 자주 갔을 것이다.
성난 군인들은 왕좌에서 밀려 10년 가까이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찾아간다.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며 녹봉의 완전 지급을 약속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봉기를 부추겼다. 뒷배를 얻은 군인들은 훈련도감 동별영(동대문 경찰서 부근)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포도청에 잡혀 있는 동료들을 구출했다. 또 전직 선혜청 당상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는 이곳 서대문 밖, 경기감영에 쳐들어간다. 그러나 김보현은 피신한 뒤였다. 그들 중 일부는 감영의 무기고를 약탈해 민씨 일가 척신들의 집을 습격한다. 나머지 군인들은 서대문 밖 청수관 터에 있던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갔다. “왜놈을 때려죽이자”는 고함과 함께 습격했다. 사대문 밖 서지 연못가에 세워진 청수관은 경기 중군영 건물인데,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입주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들은 사대문에 거주할 수 없었다. 서대문 밖, 지금의 영천시장 뒤 금화초등학교 자리가 일본 공사관 터이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 공사관 전원은 제물포항으로 피했고 공사관은 전소됐다.
이튿날인 7월 24일 성난 구식 군인들은 동대문 동별영에 집결한 뒤 왕십리 일대의 주민들과 합세해 민비를 잡으러 창덕궁으로 향했다. 민비는 상궁 복장으로 가장하고 장호원으로 피신해 죽음을 면했다. 화가 난 군인들은 숨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을 찾아 구타 끝에 창덕궁 중희당 아래서 살해했다. 시체의 입을 찢어 엽전을 개머리판으로 쑤셔 넣었다고 한다. 시체는 개천에 버려졌고 물에 불어 흐물거렸다.
다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민씨 척족을 파직했다. 척화파를 그 자리에 앉히고 군인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한다. 청군은 대원군을 억류시켜 텐진으로 보내며 임오군란은 끝이 난다. 이곳 새문 밖, 경기감영과 일본 공사관은 임오군란이 긴박하게 전개된 현장이었다. 구식 군인들이 경기감영으로 몰려온 1882년의 430년 전, 1453년에는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던 김종서의 집으로 왕권 찬탈을 획책한 수양대군 일행이 서대문 밖, 이 비탈길을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의 초기와 말기, 굵직한 두 개의 사건이 이곳 서대문 밖에서 일어났다. 계유정난은 부당하게 권력을 잡기 위해 능력 있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권력이 항상 정의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는 오점을 남겼다. 임오군란은 또 어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군인들의 생존권 반란이다. 13개월의 녹봉미를 받지 못한 군인들은 굶어서 죽나 반란을 일으켜 죽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존권이냐?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반란이냐? 똑같은 무력이라도 성격은 많이 다른 사건이다.
임오군란 발생 78년 후인 1960년, 다시 이곳으로 물밀듯이 밀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6.25전쟁 중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이기붕의 집이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 전쟁 중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 착복해 국민방위군 중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5만명이 넘어가자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기붕은 국방부 장관으로 이 사건을 잘 처리해서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이후 이기붕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60년 4월 25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그래서 우리가 서대문으로 부르는 문은 돈의문이다. 서대문은 1975년에 서대문구에서 종로구로 편입됐다. 동대문구에 동대문이 없고 서대문구에 서대문이 없다. 숭례문만 중구에 속하고 서대문, 동대문, 숙정문이 모두 종로구에 속한다. 서울 공동화로 거주 인구가 줄자 종로구를 확장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돈의문은 조선 초 한양도성을 쌓을 때 지금의 사직터널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4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서대문이 있는 자리가 경복궁의 팔과 다리에 해당한다고 임금께 아뢰었다. 팔과 다리에 해당하는 곳에 서대문이 뻥 뚫려 풍수상 좋지 않으니 문의 위치를 이전해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조선 초의 권신인 이숙번 집 앞에 문을 세우려고 했으나 그는 집 앞에 문이 있으면 소음으로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문의 위치를 경덕궁(경희궁) 쪽으로 옮기고 이름도 돈의문에서 서전문(西箭門)으로 바꿨다. 동대문에서 쭉 이어져 종로를 거쳐 마포로 가는 서대문로(새문안길)는 이숙번의 집을 피해 일직선이 되지 못하고 서울역사박물관 앞에서 휘어진 것이다. 이후 1422년 지금의 강북 삼성병원 앞으로 한 번 더 옮겨지면서 이름도 본래대로 돈의문이 되었다. 새로 지은 문이라 새문, 신문(新門)이라 하고 이 근방을 신문, 새문이라 불렀다. 주변에 신문사가 많아 신문로가 된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니다. 신문(新門), 한글로 새문이다. 서대문 안쪽에 있는 새문안교회는 이 새로 생긴 돈의문, 즉 새문 안쪽에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 참 잘 지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은 우리가 아는 대로 한양도성의 안쪽이다. 한양도성은 남산에서 내려와 숭례문 구간을 통과해 정동 이화여고를 가로질러 돈의문으로 이어진다. 이곳 한양도성이 통과하는 서대문, 성문 밖에 경기감영이 있었다. 지금의 경기도청은 수원에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사대문 밖에 경기감영이 있었다. 수도 한양과 경기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경기감영이 사대문 밖, 궁궐 지근거리에 있어야 왕의 하명을 받기도 쉽고, 보고도 쉽게 할 수 있었다. 지금의 서울 적십자병원이 경기감영이 있던 자리다. 경기 관찰사가 근무하던 경기 감영은 1896년에 수원으로 내려갔지만, 우리 근대사에서 크게 조명을 받을 때가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던 때다.
국사 수업 시간에 조선 후기의 역사적 사건을 연도별로 외웠던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을 기억할 것이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지원으로 1881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생겼다. 이들에게 모든 지원이 몰리자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은 형편없는 대접을 받는다. 목숨과 녹봉을 바꾸어 먹고사는 게 군인들인데, 13개월 치나 월급이 밀려 이제나 저제나 창고에 쌀이 들어올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남대문 시장 수입상가 자리에는 대동미를 보관해 두는 미곡 창고 선혜청이 있었다. 이곳의 당상관을 맡고 있던 민겸호, 전임 당상관이자 현 경기도 관찰사인 김보현이 봉급 연체를 초래한 원흉으로 지목된다. 드디어 전라도에서 세곡선이 도착했다. 선혜청에서는 세곡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밀린 봉급 중 우선 1개월 치를 지급했다. 그런데 담당 고지기(관아의 창고 관리자)가 쌀에 겨와 모래를 섞고 나머지를 빼돌렸다. 격분한 군인들은 고지기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사실 이런 일은 우리 역사에서 반복됐다. 6.25 때 ‘국민 방위군 사건’이라 하여 군인들의 식량과 보급품을 빼돌려 수만 명의 군인들이 죽는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다. 이때 국방부 장관 이기붕이 이를 잘 해결해 국민들에게 큰 신임을 얻은 바도 있다. 이 일은 나중에 살펴볼 일이고,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는 김춘영 등 항의하는 주동자를 포도청에 넘겼다. 이에 가담자들은 조계사 뒤편의 민겸호의 집(현 대한재보험)으로 달려가 집과 가재도구를 때려 부수었다. 나중에 민겸호가 죽자 이 집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외국 공무원, 묄렌도르프에게 하사됐다. (이 집은 갑신정변에서 민영익이 자상을 입자 선교사 알렌이 묄렌도르프의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준 현장이고 나중에 독일 공사관이 된다) 민겸호의 아들이 충정로의 주인공 민영환이다. 민영환의 별서(별장)가 지금의 프랑스대사관 자리였다고 하니, 아마도 민영환의 아버지 민겸호가 경기 관찰사 시절 경기감영 지척인 충정로 별서에 자주 갔을 것이다.
성난 군인들은 왕좌에서 밀려 10년 가까이 실각한 흥선대원군을 찾아간다. 대원군은 그들을 달래며 녹봉의 완전 지급을 약속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봉기를 부추겼다. 뒷배를 얻은 군인들은 훈련도감 동별영(동대문 경찰서 부근)의 무기고를 털어 무장하고, 포도청에 잡혀 있는 동료들을 구출했다. 또 전직 선혜청 당상 김보현이 관찰사로 있는 이곳 서대문 밖, 경기감영에 쳐들어간다. 그러나 김보현은 피신한 뒤였다. 그들 중 일부는 감영의 무기고를 약탈해 민씨 일가 척신들의 집을 습격한다. 나머지 군인들은 서대문 밖 청수관 터에 있던 일본 공사관으로 쳐들어갔다. “왜놈을 때려죽이자”는 고함과 함께 습격했다. 사대문 밖 서지 연못가에 세워진 청수관은 경기 중군영 건물인데, 일본 공사관이 이곳에 입주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들은 사대문에 거주할 수 없었다. 서대문 밖, 지금의 영천시장 뒤 금화초등학교 자리가 일본 공사관 터이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 등 공사관 전원은 제물포항으로 피했고 공사관은 전소됐다.
이튿날인 7월 24일 성난 구식 군인들은 동대문 동별영에 집결한 뒤 왕십리 일대의 주민들과 합세해 민비를 잡으러 창덕궁으로 향했다. 민비는 상궁 복장으로 가장하고 장호원으로 피신해 죽음을 면했다. 화가 난 군인들은 숨어있던 민겸호와 김보현을 찾아 구타 끝에 창덕궁 중희당 아래서 살해했다. 시체의 입을 찢어 엽전을 개머리판으로 쑤셔 넣었다고 한다. 시체는 개천에 버려졌고 물에 불어 흐물거렸다.
다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민씨 척족을 파직했다. 척화파를 그 자리에 앉히고 군인들의 밀린 봉급을 지급했다. 그러나 민씨 척족이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한다. 청군은 대원군을 억류시켜 텐진으로 보내며 임오군란은 끝이 난다. 이곳 새문 밖, 경기감영과 일본 공사관은 임오군란이 긴박하게 전개된 현장이었다. 구식 군인들이 경기감영으로 몰려온 1882년의 430년 전, 1453년에는 농업박물관 자리에 있던 김종서의 집으로 왕권 찬탈을 획책한 수양대군 일행이 서대문 밖, 이 비탈길을 내려왔다. 그러고 보니 조선시대의 초기와 말기, 굵직한 두 개의 사건이 이곳 서대문 밖에서 일어났다. 계유정난은 부당하게 권력을 잡기 위해 능력 있는 신하들을 무참하게 살해하며 왕권을 찬탈한 사건이다. 권력이 항상 정의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는 오점을 남겼다. 임오군란은 또 어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군인들의 생존권 반란이다. 13개월의 녹봉미를 받지 못한 군인들은 굶어서 죽나 반란을 일으켜 죽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생존권이냐?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반란이냐? 똑같은 무력이라도 성격은 많이 다른 사건이다.
임오군란 발생 78년 후인 1960년, 다시 이곳으로 물밀듯이 밀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에는 6.25전쟁 중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이기붕의 집이 있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 전쟁 중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 착복해 국민방위군 중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5만명이 넘어가자 국민들의 공분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기붕은 국방부 장관으로 이 사건을 잘 처리해서 국민들의 신망을 얻었다. 이후 이기붕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1960년 4월 25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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