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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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은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의 선장(船長)과도 같다. 그의 입을 통해 비로소 악단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결정되고, 그의 손짓에 따라 거친 파도에도 변치 않을 고유의 색채가 정해진다. 예술감독은 선장이 그러하듯 수십 명의 단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최선의 결과를 뽑아내도록 이끌어야 한다. 새로운 예술감독을 만나는 일이 새로운 선장과 함께 항해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이유다.

지난 12일 경기 수원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공연은 ‘김선욱호(號)’의 첫 번째 출항으로 기대를 모았다. 김선욱은 2006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만 18세 나이로 최연소 우승을 거두며 피아니스트로 먼저 이름을 알린 클래식 스타다. 지휘자로는 4년 차에 불과하지만 음악가로서의 탄탄한 기본기와 우수한 소통력 등을 인정받아 올해부터 대한민국 굴지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게 됐다.

오후 7시30분. 김선욱은 긴장한 표정이었지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빠르게 무대를 걸어 나왔다. 첫 곡은 경쾌한 리듬과 밝고 산뜻한 선율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 김선욱은 주선율을 내는 악기군을 꼼꼼히 짚으면서도 유연한 지휘를 선보였다. 때때로 현과 관의 아티큘레이션(각 음을 분명하고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이 첨예하게 맞물리지 못하고 소리가 어긋나면서 선율 라인이 흔들리긴 했지만, 작품 본연의 유쾌한 기운은 잘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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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는 거장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무대에 올랐다. 김선욱의 간절한 요청에 프랑스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그가 들려준 곡은 러시아 낭만주의 작곡가 스크랴빈의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백건우는 첫 소절부터 심연을 파고드는 듯한 묵직한 타건을 선보이면서 작품 특유의 몽환적인 정취를 불러냈다. 피아니스트에게 고난도 기교를 요구하는 작품이지만, 백건우는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뼈대가 되는 음과 나머지 음, 고음과 저음, 색채 대비를 강조하면서 격렬한 추동력을 불러냈다.

변주곡 형식의 2악장에선 긴 호흡과 섬세한 터치로 시시각각 변하는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다채로운 심상을 마음껏 펼쳐냈다. 나이를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장대한 에너지는 마지막 악장에서 터져 나왔다. 짧게 끊어치는 터치로 유리알처럼 맑은 색채를 불러내며 청중의 귀를 간지럽히다가도 돌연 몸 전체가 앞뒤로 튀어 오를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내려치면서 강렬한 화염을 일으키는 그의 연주는 청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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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 ‘베토벤 10번 교향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베토벤의 영향이 짙게 담긴 브람스 교향곡 1번으로 채워졌다. 김선욱의 해석은 정석에 가까웠다. 1악장 상단에 쓰인 ‘un poco sostenuto(조금 음을 길게 끌면서)’를 철저히 지키겠다는 듯 음 하나하나를 충실히 짚어가는 지휘로 고뇌에 찬 악상을 찬찬히 풀어냈다. 다만 셈여림, 강세 변화를 통해 음향을 입체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구간이 지극히 매끄럽게 흘러가면서 단조로운 인상을 남겼다. 클래식 전용 홀이 아닌 만큼 이따금 들리는 불분명하면서도 답답한 음향도 감상을 저해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2악장에선 긴밀한 관 앙상블과 윤은솔 객원악장이 들려준 온화한 색채의 솔로가 인상적이었다. 3악장에선 간결하면서도 유연한 리듬 표현에 집중하면서 춤곡의 매력이 비교적 잘 드러났다. 문제는 마지막 악장이었다.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선명한 대비, 각 성부가 촘촘하게 층을 이루며 증폭시키는 음향적 긴장감이 ‘환희’의 주제에 도달하는 순간 장쾌한 에너지로 변화하는 게 백미인데, 템포와 악상 변화가 점적이기보다는 비약적으로 이뤄지면서 다소 평면적으로 전체 구조가 조형된 건 내내 아쉬움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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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죽을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할 것 같다.” 공연을 앞두고 연 기자간담회에서 김선욱이 한 말이다. 그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며 새로운 바다로 떠났다. 젊은 음악 천재가 노련한 선장으로 성장하는 여정에 거는 기대가 크다.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