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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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벤처기업부가 기업에 지급하던 연구개발(R&D) 예산 지원을 최대 50%씩 일괄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이미 연구용 장비를 갖추고 인력을 채용한 기업들은 당장 사업비가 끊긴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 삭감 대상에 포함된 중기부 소관 R&D 과제는 4000여 개에 달한다. R&D 효율화를 추진한다는 정부가 ‘옥석 가리기’ 없이 기업 경쟁력에 필수적인 핵심 사업까지 한꺼번에 멈춰 세웠다는 비판이 나온다.
R&D 예산 50% 삭감…中企 4000곳 '날벼락'

◆중기·벤처 4000여 곳 사업비 감액

16일 업계에 따르면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A씨는 지난 12일 올해 R&D 과제 예산 삭감 대상이니 설명회에 참여하라는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기정원)의 문자를 받았다. A씨는 2022년 4월 창업성장기술개발 사업에 선정돼 2년째 연구하고 있는데 올해는 약속한 금액의 사업비를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갑자기 삭감 소식을 듣게 돼 당황스럽다”며 “개발 인력부터 줄여야 할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A씨처럼 올해 삭감 대상으로 선정돼 갑작스럽게 협약 변경을 요청받은 기업이 4000곳이 넘는다. 정부의 R&D 예산 축소 기조 속에 중기부 R&D 예산이 전년보다 23%(4150억원) 줄어든 영향이다.

윤세명 중기부 기술혁신정책과장은 이날 감액 기업 대상 설명회에서 “집중적으로 투자할 영역 중심으로 R&D 예산이 개편됐다”며 “전체 예산이 줄면서 감액이 필요해 기업별로 협약 변경을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기부 R&D 사업 47개 중 24개가 삭감 대상이다. 삭감되는 24개 중 22개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사업비가 50%씩 깎인다. 나머지 2개 사업은 각각 20%, 25% 감액된다.

약속된 사업비 지원 계획에 따라 장비를 사들이고 인력을 고용해온 벤처업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한 벤처기업 대표는 “연구 장비까지 다 발주해놨는데 약속한 돈을 못 준다고 하면 어쩌라는 얘기냐”며 “이제 정부를 믿고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고 토로했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작년 사업비도 아직 다 못 받은 상황인데 이제 와서 협약 변경 의향서를 들이민다”며 “말이 좋아 의향서지 사실상 강압”이라고 했다.

◆전체 기업에 최대 50% ‘일괄 적용’

업계에서는 사업 성과나 필요성 등에 대한 고려 없이 4000여 곳에 지급하는 예산을 일률적으로 삭감한 것을 문제 삼고 있다. R&D 예산 효율화가 목적이었다면 과제별 진행 상황이나 중요도 등을 고려해 ‘좀비 과제’만 도려내야 했다는 주장이다. 기정원 관계자는 “50% 삭감 사업으로 정해졌다면 해당 사업에 참여하는 전 기업이 똑같이 50%씩 예산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R&D 축소 방향은 지난해 하반기 확정됐는데 이제서야 기업들에 통보한 것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중기부는 이번주 각 개별기업에 삭감 내역을 전달하고 이달 기업별 협약 변경을 추진한다는 계획을 잡았다. 충남 천안에서 벤처기업을 운영하는 기업 관계자는 “며칠 전까지 아무런 안내가 없어 우린 삭감 대상에서 빠진 줄 알았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협약 변경 절차라도 간소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일각에선 정부를 상대로 단체 행정소송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기정원은 기업들의 항의가 쏟아질 것을 예상해 18일부터 30여 명으로 구성된 대응팀을 운영하기로 했다.

수년간 진행해온 과제를 아예 포기하는 기업도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10월 기정원이 R&D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자 중 25%는 연구개발비 감액 시 과제를 중단하겠다고 답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중기·벤처 R&D는 신뢰를 갖고 접근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며 “큰 기업도 처음엔 정부지원금으로 성장한 경우가 많은 만큼 차분하게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고 했다.

고은이/최형창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