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전과, 봉오동 전투의 비밀과 숨겨진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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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강희찬의 역사영화-진실과 거짓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전과하면 첫손에 꼽는 봉오동 전투.
그럼에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영화 덕택에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먼저 봉오동 전투의 시기와 장소의 배경을 살펴봤다. 그래야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먼저 시점 관련하여, 1920년 6월에 전투가 일어난 이유는 뭘까? 그 전해에는 비폭력투쟁이라는 3.1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그 대비가 묘했다. 3.1 운동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측면이 있지만 비폭력투쟁으론 독립이 어렵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독려하기 시작했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그다음 해에 일어나게 된다. 즉, 우발적이 아닌 준비된 전투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장소는 왜 봉오동이지? 두 번째 질문이다. 봉오동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마주치는 곳이다. 우리가 북간도라 부르는 지역으로 지금도, 전투가 치러질 당시에도 중국영토였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국경 너머에 많고 많은 땅 중에 왜 하필 그곳일까?
실마리는 그곳에 한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마을이 아니라 군사기지가 자리 잡은 북간도 지역의 무력항쟁의 본거지였다. 한반도의 청년들이 국경을 건너 봉오동에 몰려들었고 독립군에 합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600명 정도의 군인들이 있었고 증언에 의하면 봉오동은 산성으로 둘러쳐진 견고한 요새였다고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세 번째 질문은 누가 봉오동을 무력항쟁의 본산으로 만들었느냐는 점이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은 1908년, 봉오동에 한인 마을을 세웠고 그곳을 북간도 무력투쟁의 본거지로 만들어냈다. 최운산은 간도 최고의 갑부였다. 제면공장, 제유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여러 공장을 운영하고 축산 및 곡물무역으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자신의 경제력을 무력투쟁에 쏟아부었다. 경제력과 인품을 바탕으로 중국 정부, 사람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어 독립운동에 활용했다. 봉오동의 독립군들이 먹고 입고 무기를 쥘 수 있었던 것은 최운산의 돈 덕택이었다.
영화에서는 홍범도 장군만을 부각시키고 최씨 형제는 나오지 않는데 당시 총사령관은 최진동이었고 최운산은 참모장이었다. 홍범도가 연해주를 주 무대로 활동하다가 독립군 연합부대에 참여하기 위해 봉오동에 온 것이므로 실제 지휘권은 최씨 형제에게 있었고 홍범도는 연합부대의 한 부대를 맡았다는 주장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번엔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봉오동 전투가 있긴 전, 간도지역의 독립군들이 수십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바짝 독이 오른 일본군은 근거지인 봉오동을 섬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일본 정규군과 독립군이 맞섰다. 일본군은 전투 보고서에서 자국 전사자 1명, 부상자 2명으로 기술했다.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자 120명, 홍범도 장군 등 당시 전투에 참여한 증언자는 일본군 사상자를 500명 이상으로 봤다. 우리 측 입장을 따른다면 막강한 일본 정규군을 독립군이 어떻게 이겼을까 하는 의문이 따라온다. 여기에 다시 최운산이 등장한다. 그는 북간도 옆 연해주에서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돌아가는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대량 구입했다. 대포, 기관총, 장총, 수류탄, 권총 등이었다. 또 숨어있는 우군이 있었다. 날씨가 전투를 도왔다고 한다. 독립군의 유인책에 걸려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던 일본군은 갑작스런 폭우에 시야가 가려졌고 당황한 나머지 오인사격으로 아군을 많이 죽였다고 한다. 결국,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전사자 1명으로 기술한 일본군의 보고서는 이 전투가 얼마나 일본에게 치욕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장소를 이동하다가 같은 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또 한번 전투를 치렀다. 이후 최운산은 자신의 재산을 다 소진하면서 독립투쟁을 이어갔고 수차례 감옥살이로 인한 고문으로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죽었다. 독립군과 일본군 외에 이 전투에 참여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의 길 안내와 통역, 그들 편에 서서 밀정 노릇을 한 친일 조선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영화 덕택에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다.
먼저 봉오동 전투의 시기와 장소의 배경을 살펴봤다. 그래야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먼저 시점 관련하여, 1920년 6월에 전투가 일어난 이유는 뭘까? 그 전해에는 비폭력투쟁이라는 3.1 만세운동이 있었는데 그 대비가 묘했다. 3.1 운동은 우리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알린 측면이 있지만 비폭력투쟁으론 독립이 어렵다는 뼈아픈 깨달음을 준 사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임시정부는 무장투쟁을 독려하기 시작했고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그다음 해에 일어나게 된다. 즉, 우발적이 아닌 준비된 전투였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장소는 왜 봉오동이지? 두 번째 질문이다. 봉오동은 함경북도 온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마주치는 곳이다. 우리가 북간도라 부르는 지역으로 지금도, 전투가 치러질 당시에도 중국영토였다. 질문으로 돌아가서, 국경 너머에 많고 많은 땅 중에 왜 하필 그곳일까?
실마리는 그곳에 한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통 마을이 아니라 군사기지가 자리 잡은 북간도 지역의 무력항쟁의 본거지였다. 한반도의 청년들이 국경을 건너 봉오동에 몰려들었고 독립군에 합류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시 600명 정도의 군인들이 있었고 증언에 의하면 봉오동은 산성으로 둘러쳐진 견고한 요새였다고 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세 번째 질문은 누가 봉오동을 무력항쟁의 본산으로 만들었느냐는 점이다. 최진동, 최운산 형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은 1908년, 봉오동에 한인 마을을 세웠고 그곳을 북간도 무력투쟁의 본거지로 만들어냈다. 최운산은 간도 최고의 갑부였다. 제면공장, 제유공장, 성냥공장, 비누공장 등 여러 공장을 운영하고 축산 및 곡물무역으로 부를 일궜다. 그는 자신의 경제력을 무력투쟁에 쏟아부었다. 경제력과 인품을 바탕으로 중국 정부, 사람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어 독립운동에 활용했다. 봉오동의 독립군들이 먹고 입고 무기를 쥘 수 있었던 것은 최운산의 돈 덕택이었다.
영화에서는 홍범도 장군만을 부각시키고 최씨 형제는 나오지 않는데 당시 총사령관은 최진동이었고 최운산은 참모장이었다. 홍범도가 연해주를 주 무대로 활동하다가 독립군 연합부대에 참여하기 위해 봉오동에 온 것이므로 실제 지휘권은 최씨 형제에게 있었고 홍범도는 연합부대의 한 부대를 맡았다는 주장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번엔 전투에 대해서 알아보자. 봉오동 전투가 있긴 전, 간도지역의 독립군들이 수십 차례 국내 진공작전을 펼쳤고 바짝 독이 오른 일본군은 근거지인 봉오동을 섬멸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일본 정규군과 독립군이 맞섰다. 일본군은 전투 보고서에서 자국 전사자 1명, 부상자 2명으로 기술했다. 임시정부는 일본군 전사자 120명, 홍범도 장군 등 당시 전투에 참여한 증언자는 일본군 사상자를 500명 이상으로 봤다. 우리 측 입장을 따른다면 막강한 일본 정규군을 독립군이 어떻게 이겼을까 하는 의문이 따라온다. 여기에 다시 최운산이 등장한다. 그는 북간도 옆 연해주에서 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돌아가는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대량 구입했다. 대포, 기관총, 장총, 수류탄, 권총 등이었다. 또 숨어있는 우군이 있었다. 날씨가 전투를 도왔다고 한다. 독립군의 유인책에 걸려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던 일본군은 갑작스런 폭우에 시야가 가려졌고 당황한 나머지 오인사격으로 아군을 많이 죽였다고 한다. 결국,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전사자 1명으로 기술한 일본군의 보고서는 이 전투가 얼마나 일본에게 치욕적이었는지를 반증한다.
봉오동 전투에 참여했던 홍범도 부대와 김좌진 부대는 장소를 이동하다가 같은 해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또 한번 전투를 치렀다. 이후 최운산은 자신의 재산을 다 소진하면서 독립투쟁을 이어갔고 수차례 감옥살이로 인한 고문으로 해방을 몇 달 앞두고 죽었다. 독립군과 일본군 외에 이 전투에 참여한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일본군의 길 안내와 통역, 그들 편에 서서 밀정 노릇을 한 친일 조선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