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약왕 동생'이 만든 경성 모던 다방…이상도 단골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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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 첫 동네
1930년대 예술가들의 성지, 낙랑파라
형 따라 상경한 이순석
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서울 돌아와 살롱 개업
모던 경성 이끄는 아지트
절친 시인 이상도 자주 와
해방 후 도안 선구자로
무궁화 대훈장·국회 해태상
그의 손에서 탄생
1930년대 예술가들의 성지, 낙랑파라
형 따라 상경한 이순석
도쿄미술학교 졸업 후
서울 돌아와 살롱 개업
모던 경성 이끄는 아지트
절친 시인 이상도 자주 와
해방 후 도안 선구자로
무궁화 대훈장·국회 해태상
그의 손에서 탄생
![시인 이상(왼쪽)과 소설가 박태원(가운데), 시인 김소운이 찍은 기념 사진. 당대 유명 예술인인 이들은 매일같이 낙랑파라에 모여 문학과 미술을 논하곤 했다. /연합뉴스](https://img.hankyung.com/photo/202401/AA.35529767.1.jpg)
![故 이순석](https://img.hankyung.com/photo/202401/AA.35608470.1.jpg)
동생은 형만큼이나 영리했다. 형이 의젓하게 드비즈 신부의 제약 비법을 전수했다면 순석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예술의 분위기에 젖었다. 그림과 공예에 차차 눈떴다. 이명래는 큰 야망을 품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이순석은 형을 따라 1918년, 13세에 충정로로 왔다. 중림동에 약현성당이 있었으니, 종교적 환경은 충남 아산 공세리와 비슷했다.
프랑스 ‘살롱’ 같은 예술인들의 아지트, 낙랑파라
![](https://img.hankyung.com/photo/202401/AA.35608469.1.jpg)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가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좋은 데생도 알맞게 놓여 실내 실외가 조화롭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파라’다.” (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직업’, 삼천리 1933년 10월)
![이상과 변동림이 처음 만난 낙랑파라 내부. /저자 제공](https://img.hankyung.com/photo/202401/AA.35608472.1.jpg)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등장하는 낙랑파라의 단골손님이 한국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하고도 헤어진 뒤 이곳 출입이 잦았다. 이곳의 지배인 변동욱에게 이상은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이 시작됐다.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말이 통하는 모던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 만하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문 ‘해태상’도 이순석 작품
!['고약왕 동생'이 만든 경성 모던 다방…이상도 단골이었다네](https://img.hankyung.com/photo/202401/AA.35531158.1.jpg)
1977년 서울 여의도에 신축한 국회의사당 정문 안에 있는 해태상도 이순석 선생의 작품이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당시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생은 주장했다.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해태상 예산 3000만원은 해태를 회사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조를 받았다. 이 돈으로 이순석이 국회의사당 앞 두 개의 해태상을 완성했다. 그때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다. 해태 기단 공사를 거의 마칠 무렵 박 회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노블와인 백포도주를 가져와 두 개의 해태상 기단 아래 묻었다. 36병씩 총 72병을 묻었고 이것을 국회의사당 준공 100년 뒤인 2075년에 마시기로 했다. 앞으로 51년 남았다. 지금은 국회가 국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국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대가 아닌가. 앞으로 51년 뒤면 우리 정치는 어떻게 될까.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인 국회의사당에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묻혀 있으니 곧 상서로운 바람이 불 것을 기대해 본다.
한이수 도시문화 해설사(NF컨소시엄에이엠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