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눈물로 함께 부른 안숙선의 사철가
1970년대 말 국악고에 무용 전공으로 입학한 나는 태어나서 처음 판소리를 접했다. 이후 판소리를 다시 만나게 된 곳은 방송사였다. 1990년부터 꽤 오랜 기간 방송작가로 일한 나는 이 시대 최고 명창 안숙선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 방송과 공연 현장에서 종횡무진 다양한 활동을 하시던 선생님은 마치 마술을 부리듯 판소리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소리를 무한대의 세계로 이끌어 주셨다.

어느 여름날, 소리 공부 길에 동행하게 됐다. 선생님은 흥얼거리며 노래 한 자락을 부르셨다. ‘나는 몰랐네 나는 몰랐네 저 달이 날 속일 줄….’ 아마 창밖으로 보이던, 하늘에 휘영청 떠 있는 달을 보니 그 노래가 떠오르셨나 보다. 친정엄마도 즐겨 부르던 노래였기에 익히 알고 있던 노래를 명창의 목소리로 들으니 차원이 달랐다. 당시 KBS 작가로 일하고 있던 터라 함께 일하던 PD에게 얘기했고, 이후 그 PD는 선생님을 빅쇼에 모시기 위해 무던히도 쫓아다녔다. 입 싼 나 때문에 그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알려진 것에 혹시라도 화가 나셨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저 웃으며 끝내 대중가요 부르는 걸 아름답게 거절하셨다.

그때 나는 선생님이 그렇게까지 안 하실 일인가 싶기도 했는데, 선생님은 당시에도 득음을 위한 소리공력을 들이고 계셨던 것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더 좋아졌고, 방송에 섭외할 때도 더 신경 써서 빛나게 해드리는 것에 집중했다. 지금 나는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겸 단장으로 자리하고 있으니, 나의 오늘은 선생님으로부터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난 연말 선생님을 모시고 국립극장 송년 판소리 무대를 올렸다. 국립극장을 대표하는 송년 음악회로 2010년부터 시작된 인기 공연이다. 이번 공연에서 선생님은 심청가의 일부만 담당하셨다. 심청이가 선인 따라가는 대목을 마친 후 퇴장하던 선생님은 다시금 객석을 향해 앙코르를 자처하시곤 단가 ‘사철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하구나….’ 득음을 향해 삶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명창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소리를 들으며 관객과 무대 뒤 모든 사람은 눈물로 그 단가를 함께 부르고 있었다. 특히 창극단원 모두가 함께 부른 진도아리랑에서 선생님은 환희에 찬 표정으로 평생을 바쳐 부른 소리에 대한 사랑, 즐거움을 가감 없이 보여주셨다.

선생님의 소리는 아직 짱짱하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인의 가슴에 판소리의 찐하고 찡한 매력을 새겨주는 큰일을 하신 선생님은 작은 거인이다.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했던가. 우리네 사는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지만 선생님의 소리만큼은 영원히 기억될 만큼 아름답고 숭고하기에 오래오래 선생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