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처음 단지형 아파트가 들어선 것은 1964년입니다. 이제는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51.9%가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입니다. 20년 넘은 노후 아파트 비중도 50%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한때 곳곳에 비닐이 붙고 페인트 냄새도 풀풀 나던 새 아파트가 우리와 오랜 세월을 보내며 낡은 헌 집이 된 것입니다. 손때 묻고 추억이 담긴 노후 아파트의 이야기를 담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차량 1대가 다닐 길만 남기고 빼곡하게 주차된 한 아파트 단지.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차량 1대가 다닐 길만 남기고 빼곡하게 주차된 한 아파트 단지.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영차"

노후 아파트의 아침 출근길은 이중 주차된 차량을 미는 일로 시작됩니다. 운이 좋으면 한 대, 아니면 흡사 테트리스를 하듯 두 세대를 밀어 차량이 빠져나갈 공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간혹 비가 내리거나 땅이 얼어 빙판이 된 날이면 차 밀기가 곤혹스러워집니다. 어쩌다 카니발 같은 대형 차량을 밀어야 하는 날이 오면 그날은 복권을 삽니다. 이날의 불행이 당첨으로 보상받길 바라면서 말입니다.
구축 아파트의 출근길은 이중주차 차량을 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구축 아파트의 출근길은 이중주차 차량을 미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아침마다 차를 미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아파트 단지에 차는 많은데 주차장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야 각 지자체가 조례를 통해 가구당 1대 이상의 차량을 댈 수 있는 주차장을 짓게 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아파트 주차장, 가구당 0.4대 기준

1980년대만 하더라도 자동차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주차장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주택건설기준에 관한 규칙에서 주차장 설치 규정을 보면 수도권의 경우 전용 60㎡ 미만은 가구당 0.2대, 전용 85㎡ 미만은 가구당 0.4대의 공간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소위 '국민 평형'에 살더라도 절반은 차가 없고, 그보다 작은 집에 산다면 당연히 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삼중주차된 차량 너머 이중주차된 대형 레저용 차량(RV)이 통행로를 막고 있습니다. 저런 차는 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삼중주차된 차량 너머 이중주차된 대형 레저용 차량(RV)이 통행로를 막고 있습니다. 저런 차는 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아파트 지하 주차장 설치가 의무화된 것도 1991년의 일입니다. 이전까지는 지하 주차장이 없는 아파트가 대다수였습니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압구정 현대', '압구정 한양', '대치 은마' 등 유명한 아파트도 지하 주차장이 없습니다.

지하 주차장 설치가 의무화된 이후로도 한동안은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작게 지어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흡사 개미굴 같은 느낌이지요. 요즘처럼 지하 전체가 주차장인 아파트 단지는 2000년대 중반 이후에나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주차장은 여전히 부족했지만, 자동차는 빠르게 보급됐습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자동차 누적 등록 대수는 2594만9000대입니다. 국민 2명당 1대는 보유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 보니 노후 아파트에 산다면 주차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중 주차는 기본이고 삼중, 사중 주차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중주차 차량을 이리저리 밀고, 주차 차량으로 좁아진 길을 아슬아슬 빠져나가다 보면 의도치 않게 접촉 사고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부족한 주차 공간 탓에 생활이 불편한 것은 물론, 이웃 간에 얼굴을 붉히는 일까지 벌어지는 셈입니다.

테니스장·놀이터 없애고 주차장 만들지만…'역부족'

때문에 노후 아파트에선 주차장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됩니다. 차단기를 설치해 외부 차량 유입을 막는 것은 기본이고 단지 내 인도에 사선 주차를 하도록 주차선도 긋습니다. 화단이나 공용 테니스장, 놀이터를 없애면서 주차장으로 용도변경을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주차 공간이 부족해 결국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가는 차량이 발생합니다. 이 때문에 주차장이 부족한 아파트의 주변 도로는 저녁마다 주차장으로 변하곤 합니다. 지자체에 따라서는 이러한 사정을 감안해 저녁부터 새벽까지 갓길 주차를 허용합니다. 학생이 없는 야간에 한정해 지역 주민들에게 주차장을 개방하는 학교도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다양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지만, 노후 아파트에서 주차장 문제는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주차장이 너무 적게 설치됐기 때문입니다. 주차난에 시달리는 주민들은 결국 리모델링과 재건축 등으로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한 아파트 단지 옆 도로에 차량들이 빼곡하게 주차된 모습.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한 아파트 단지 옆 도로에 차량들이 빼곡하게 주차된 모습.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마침 정부도 안전진단 기준 개선을 하기로 했습니다. 진현환 국토교통부 1차관은 최근 준공 36년이 된 서울의 한 노후 아파트를 찾아 "주민의 생활 불편 정도가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 새로운 안전진단 평가 기준을 상반기 중 마련하겠다"며 "노후한 아파트는 안전진단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현재 재건축 안전진단 평가 항목의 비중은 구조안전성 30%, 주거환경 30%, 설비노후도 30%, 비용편익 10%입니다. 구조안전성 비율을 낮추고 주차장 시설 등의 주거환경과 녹물 등의 설비노후도 비중을 높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새 아파트를 지으면 널찍한 주차장도 생깁니다. 하지만 리모델링이나 재건축 같은 정비사업이 모든 아파트에서 이뤄질 수도, 하루아침에 진행될 수도 없습니다. 노후 아파트에 사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주차하고, 혹여라도 차를 옮겨달라는 연락이 오면 한달음에 달려 나가는 에티켓을 지켜야겠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