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30년차 발레리노를 자유롭게 만드는 네 단어
‘도전.’ 요 근래도 많이 쓰는 단어이자 예전부터 무척이나 애증하는 단어다. 거의 10년간 몸담았던 ‘파리국립오페라발레단’을 ‘세계 3대 발레단 중 하나’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만약 나에게 묻는다면? “아무나 들어갈 순 없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발레단.” 세상의 모든 역사는 도전이라는 이 단어 하나로 발전과 변모를 거듭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인 건 그 도전은 누구에게나 ‘무료’라는 것이다. 즉 도전이라는 행위를 행동으로 옮기기 전 그 ‘도전을 의식하는 과정’을 거치는 그 의식적 행위가 10원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짜라는 말이다.

도전하고자 마음먹는 과정이 공짜여서 그런지, 그것을 머릿속과 가슴에 담아두고만 있다가 헛된 메아리처럼 날려 보내는 ‘노 쇼(no show)’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결국 자신이 품었던 그 도전에 대한 생각과 의식을 어떻게 자신의 신체가 반응하게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결국 실행의 문제라는 얘기다.

자신의 삶을 쟁취해 낸, 그리고 해내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그 도전에 대한 의식을 행동으로 옮겨버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왜 대부분 사람은 도전이라는 행위에 대해 그리도 주저하고 망설일까? 그건 분명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그 실패로 인해 갖게 되는 주위의 ‘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도 의식하는 그 존재들이 우리의 도전하지 않음에까지도 의식을 할까’를 생각해보면 당연히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부터 그들에게 우리는 아무런 관심사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의식’함으로써 그들의 관심을 갈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꾸준함.’ 이 세상을 거꾸로 뒤집어 버릴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꾀한다면 꾸준함만큼의 강력한 힘을 가진 행동도 없을 것이다. 느리고 더디게 느껴지더라도 그 행위가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라면 꾸준함의 힘은 실로 어마어마한데, 문제는 그 꾸준함을 이어 나가는 힘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가다. 결국은 그것이 타인에 의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인지에 따라 극명하게 갈릴 것이며, 이는 실제로 극명한 차이의 결과를 낳게 된다.

‘간절함.’ 이 한 단어가 가진 의미에 스스로를 위험이라는 동굴 속으로 자신을 던지는 사람들을 발견하곤 한다. 도박과 같을 수도 있을 스스로의 던짐이라는 끝은 그 누구도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그 간절함이라는 동굴에 자신을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는 자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삶의 가치와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절제.’ 스스로의 통제가 가능한지 여부만큼이나 자신을 기쁘게, 또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없는 것 같다. 30년 가까이 ‘발레(Ballet)’를 해오며 자주 느끼게 되는 아주 단순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 자신과 싸우고 있는 순간들이 있다. 더 먹고 싶지만 더 이상 먹어선 안 될 때, 더 자고 싶지만 그만 일어나야만 할 때, 더 쉬고 싶지만 계속해야만 할 때 등.

끝없는 산 비탈길을 오르는 삶인 것 같지만, 산의 중턱에 걸터앉아 잠시 숨 돌릴 수 있는,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삶이라는 산길을 오르는 나만의 여정. ‘도전’과 ‘꾸준함’, 그리고 ‘간절함’과 ‘절제’. 2024년 갑진년, 스스로를 되돌아보기 위해 다시금 되새겨 보게 되는 단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