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지돈 "AI가 일상화 되면…인간에겐 예술만 남지 않을까"
아시아계 미국인인 ‘나’는 맨해튼에 본사를 둔 데이터 회사 ‘블룸 앤 블룸’에 취업한다. 블룸 앤 블룸 건물의 특징은 연봉과 직급에 따라 접근할 수 있는 층이 달라진다는 것. ‘나’는 미로 같은 복도를 헤매며 시공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경험한다.

소설가 정지돈(41·사진)은 지난해 이 같은 내용의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복도가 있는 회사’를 소설집 <인생 연구>에 실었다. 정 작가는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뒤 젊은작가상 대상, 문지문학상, 김현문학패 등을 수상하며 독자들이 주목하는 작가다.

‘무한한 가능성’을 다룬 매력적인 그의 소설은 정 작가가 혼자 쓴 게 아니다. 정 작가와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의 공동 작품이다. 정 작가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AI가 일상화되면 오늘날 건축가들이 굳이 CAD(설계 도면을 모델링하는 소프트웨어)를 썼다고 밝히지 않듯 따로 설명할 필요 없는 창작 도구가 될 것”이라며 “AI로 쓴 작품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의미 있는 작품이기를 바라면서 소설을 썼다”고 했다. 소설 소재와 제목은 정 작가가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따왔다. 그는 “보르헤스 소설 속 미로는 무한성과 확장성 두 측면에서 AI와 닮았다”고 설명했다.

챗GPT와의 협업을 마친 정 작가의 첫 소감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였다. 원고지 5장 이상의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문장의 수준도 초보적인 데다 이야기 전개는 전형적이었다. 그는 ‘창작 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아마 인공 신경망은 대부분의 사람보다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인공 신경망보다 인간이 훨씬 유연하다. 창조성과 지성은 지식이나 앎의 정도가 아니라 유연성의 정도를 뜻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도 그는 “창작의 범위를 확장하는 데 AI는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체스 챔피언 가리 카스파로프가 AI ‘딥 블루’에 패배한 게임만 기억해요. 하지만 그 이후에 또 다른 게임이 있었고, AI와 인간이 협업한 팀이 슈퍼컴퓨터를 이겼어요. 제일 강력한 건 AI나 인간이 아니라 AI와 인간의 연합팀이라는 거죠.”

AI가 일상화된 미래에 소설가라는 직업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질문을 받은 정 작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답했다. “미래에는 예술만이 남지 않을까요?” 그는 “기술 발전으로 인간이 노동에서 해방된다면, 인간이 인간의 행위를 보면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활동은 예술일 것”이라고 말했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