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의 껍데기로 시대의 속살을 조롱한 '영원한 협객' 이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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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오동진 영화평론가
이두용은 멋있는 남자였다. 젊었을 때 그는 날카롭고 잘 생긴 남자였다. 이력에는 동국대 경제학과가 최종 학력으로 나오지만 그보다는 용산 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아 온, 서울 토박이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비슷한 연배의 감독들, 영화인들 상당수가 이북 출신이거나 타 지역 출신이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뽕’이나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같은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고 그것으로 더 유명해졌다는 것은 의외이기 때문이다.
말년에 이르러 얼굴이 흘러 내리고 윗머리가 듬성듬성해지자 그는 카우보이 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놀랍게도 그게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는 여지없는 그 시절 ‘한국적 상남자’였지만 그렇다고 그걸 으스대며 내세우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같은 아들 뻘 평론가에게 공손할 만큼 늘 점잖게 대해 주었다.
사람들은 ‘뽕’과 ‘물레야 물레야’가 에로 영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건 진실로 무지한 생각이다. 특히 ‘뽕’의 경우는, 내가 볼 때, 옷조차 없어 헐벗었던 민중들의 밑바닥 삶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자연주의 작품이다.
주인공 안협(이미숙)은 먹고 살기 위해 뽕밭에서 치마를 올린다. 이 마을의 남다른 매춘과 권력, 정치의 공간에는 일본 제국주의조차 들어서지 못한다. 일본 순사는 마을 밖에 서있는 관찰자일 뿐이다. 이두용은 놀라운 민중주의를 ‘뽕’에 담았다. 1986년 작품이다. 전두환의 폭정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때였다. 산도적처럼 무식했던 당시 정권은 이두용이라는 영화 아티스트의 정치적 저항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두용의 영화를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언론들은 그가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1980)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은(1983) 사실을 주로 부각시키며 그를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성과를 낸 감독 쯤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보다 정말 주목해야 할 작품은, 한국 최초의, 본격 범죄 스릴러이자 하드 보일드 작품 격인, 전설 중에서도 최고 전설인 영화 ‘최후의 증인’이다. 이 영화는 현재의 살인사건을, 과거 지리산 토벌대와 빨치산(파르티잔)의 싸움으로 오버랩시키고, 그 사이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남녀, 그들 모두가 겪어야 했던 비극을 그린다. 아무래도 시선은 ‘지리산 공비토벌대장=악당’이라는 것에 더 가 있었던 작품이다. 특히 한국 역사에 있어 진정한 악한은 과거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금 더 권력을 갖고 살아가는, ‘반민특위형’ 인물이라는, 무언의 지적이 깔려 있다. 이 영화가 나온 때는 1980년 계엄령 때였다.
당연히 이두용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고, 각서를 썼으며, 그 결과 영화는 54분이나 난도질 당했다. ‘최후의 증인’의 원판이 복원된 것은 2005년이 돼서야 이다. 후배 감독 박찬욱 류승완 등은 이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나설 정도였다. 말년의 그와 비교적 가깝게 지낸 나는 2년 정도 충주무예액션영화제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를 조직위원장으로 모셨다. 영화제는 비교적 아수라장이었고 그건 나의 정교하지 못했던 운영 탓이었다. 어쨌든 영화제는 현재 중단된 상태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그의 영화 중 ‘돌아온 외다리’인지 그 속편인지, 아니면 ‘분노의 왼발’인 가를 튼 적이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관객의 틈에서 영화를 보던 그가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웃으며 기억한다. 그가 말했다.
“이거, 내가 찍었어?”
그가 한창 영화를 만들었던 196,70년대에는 일명 ‘가께모찌’가 유행이었다. 겸직이라는 뜻의 일본 말로 한번에 두 세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것을 말했다. 아마도 ‘왼발 시리즈’가 그런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리즈의 제왕이었고 어쩌면 지금과 같은 넷플릭스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꽤나 성공해서 굉장한 두께의 돈방석에 앉았을 것이다. 그의 숱한 협객 무술영화 시리즈,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유쾌하게 기억되고 소환될 것이다. 그와 나눴던 막걸리 잔이 그립다. 대부분 극장 뒤 허름한 노포들이었다. 요즘 세태로 볼 때 이두용은 너무 일찍 돌아갔다. 그는 1968년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미군 정보수집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원산에서 납치된 사건이다. 이두용 감독이 (약간의 침을 튀기며) 말했었다.
“그거 알아 동진씨. 그 큰 배가 원산에서 납치돼 대동강에서 나타났어. 당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됐든 뭐가 됐든 동해에서 서해로 가려면 남해를 거쳐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었대. 어떻게 육로를 동서 횡단을 한 걸까. 그것도 배가. 이 얘기 재밌지 않아?”
자, 그렇다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얘기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 그 큰 짐을 왜 내게 맡기고 가시는 것일까. 짖궂은 노친네같으니라구. 잘 가세요 사랑했던 늙은이. 이 영화 얘기는 다시 뵐 때 또 하기로 하지요. 페어웰, 나의 감독님. / 오동진 영화평론가
[에필로그] '피막' 속으로 떠난, 이두용 감독의 마지막 대화
기침이 너무 잦으셨다. 기관지가 문제였다. 자주 사래가 걸리셨고 한번 기침이 나오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코로나19에 걸렸다.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암이라고 했다. 극도로 약해진 기관지를 타고 바이러스는 폐를 공격했을 것이다. 언젠가 통화했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코로나에 걸렸잖아. 그것 때문에 병원을 다녀. 아휴 죽겠어.” 그 얘기를 심상하게 듣지 말았어야 했다. 코로나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시점이여서 그가 우회해서 던진 메시지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내게 자신이 폐암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달포 전 4편의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원 행사 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막’때문에 전화를 드렸고 그에게 관객과의 대화(GV) 무대 행사에 오시기를 요청드렸다.
“동진씨가 알아서 잘해 줘요.”
그때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알아 차렸어야 했다. 아니 어느 정도는 감을 잡았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천추의 한이다.
놀랍고 기이하며 이건 무슨 하늘의 뜻인가 라는 심정이 드는 것이 그의 죽음을 예고한 것인 양 그의 마지막이 될 영화 행사를 ‘피막’으로 준비했다는 점이다. 피막은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공간과 바깥 세상을 구분하는 일종의 바리케이드이다. 거기엔 피막지기라는 직종의 사람이 그 안과 밖의 경계를 지킨다.
이두용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 '피막'의 스토리처럼 피막 밖에서 스스로 피막 안으로 들어 가서 생을 마감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피막지기 역을 했던 남궁원 선생도 지금 건강이 극히 안좋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막의 주인공들 모두 세상을 등졌거나 끝에 가 있다는 얘기다.
지금에 와서야 이상한 계시같다고 얘기하는 것도 경을 칠 일이다. 그냥 그건 수사학이고 말 만들기의 재미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냥 그보다는 그의 전설적인 작품 ‘피막’을 다들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길이 남기기를 바랄 뿐이다.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
사기한 미스터 허 (1967, 각본)
미워도 다시 한번 (1969, 조연출
잃어버린 면사포 (1970)
댁의 아빠도 이렇습니까 (1971)
형2 (1971)
죄 많은 여인 (1971)
어느 부부(1971)
날벼락 (1971)
야오귀 (1971)
어디로 가야 하나 (1971)
웃고 사는 박서방 (1972)
가지 마오(1971)
아낌없이 바치리 (1972)
체포령(1973)
홍의 장군 (1973)
용호대력(1974)
죽엄의 다리 (1974)
작은 새 (1974)
돌아온 외다리 1,2 (1974)
분노의 왼발(1974)
배신자(1974)
무장 해제(1975)
사생결단 (1975)
병태의 감격시대 (1975)
흑야 (1975)
아메리카 방문객 (1976)
비밀객2 (1977)
뉴욕 44번지 (1977)
초분 (1977)
생사의 고백(1978)
선배(1979)
오빠가 있다(1979)
물도리동(1979)
경찰관(1979)
지옥의 49일(1979)
우산 속의 세 여자 (1980)
최후의 증인(1980)
쌍웅(1980)
귀화산장(1981)
피막(1981)
해결사(1982)
욕망의 늪(1982)
이상한 관계(1983)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84)
낮과 밤(1984)
장남(1985)
돌아이 (1985)
뽕(1986)
돌아이 2(1986)
내시(1986)
고속도로 (1987)
업 (1988)
뽕2(1988)
침묵의 암살자 (1989)
청송으로 가는 길 (1990)
흑설(1991)
연애는 프로 결혼은 아마추어 (1994)
위대한 헌터 G.J. (1995)
아리랑 (2003)
말보로 전쟁(2009, 제작고문)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2013)
이두용의 영화를 피상적으로 접근하는 언론들은 그가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1980)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은(1983) 사실을 주로 부각시키며 그를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성과를 낸 감독 쯤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보다 정말 주목해야 할 작품은, 한국 최초의, 본격 범죄 스릴러이자 하드 보일드 작품 격인, 전설 중에서도 최고 전설인 영화 ‘최후의 증인’이다. 이 영화는 현재의 살인사건을, 과거 지리산 토벌대와 빨치산(파르티잔)의 싸움으로 오버랩시키고, 그 사이에서 생존해야만 했던 남녀, 그들 모두가 겪어야 했던 비극을 그린다. 아무래도 시선은 ‘지리산 공비토벌대장=악당’이라는 것에 더 가 있었던 작품이다. 특히 한국 역사에 있어 진정한 악한은 과거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지금 더 권력을 갖고 살아가는, ‘반민특위형’ 인물이라는, 무언의 지적이 깔려 있다. 이 영화가 나온 때는 1980년 계엄령 때였다.
당연히 이두용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고, 각서를 썼으며, 그 결과 영화는 54분이나 난도질 당했다. ‘최후의 증인’의 원판이 복원된 것은 2005년이 돼서야 이다. 후배 감독 박찬욱 류승완 등은 이 영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나설 정도였다. 말년의 그와 비교적 가깝게 지낸 나는 2년 정도 충주무예액션영화제를 같이 한 적이 있다. 그를 조직위원장으로 모셨다. 영화제는 비교적 아수라장이었고 그건 나의 정교하지 못했던 운영 탓이었다. 어쨌든 영화제는 현재 중단된 상태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그의 영화 중 ‘돌아온 외다리’인지 그 속편인지, 아니면 ‘분노의 왼발’인 가를 튼 적이 있다. 그리 많지 않은 관객의 틈에서 영화를 보던 그가 한 말을 나는 지금도 웃으며 기억한다. 그가 말했다.
“이거, 내가 찍었어?”
그가 한창 영화를 만들었던 196,70년대에는 일명 ‘가께모찌’가 유행이었다. 겸직이라는 뜻의 일본 말로 한번에 두 세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것을 말했다. 아마도 ‘왼발 시리즈’가 그런 작품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시리즈의 제왕이었고 어쩌면 지금과 같은 넷플릭스 시대의 사람이었다면 꽤나 성공해서 굉장한 두께의 돈방석에 앉았을 것이다. 그의 숱한 협객 무술영화 시리즈,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언제든지 유쾌하게 기억되고 소환될 것이다. 그와 나눴던 막걸리 잔이 그립다. 대부분 극장 뒤 허름한 노포들이었다. 요즘 세태로 볼 때 이두용은 너무 일찍 돌아갔다. 그는 1968년의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다. 미군 정보수집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군에 의해 원산에서 납치된 사건이다. 이두용 감독이 (약간의 침을 튀기며) 말했었다.
“그거 알아 동진씨. 그 큰 배가 원산에서 납치돼 대동강에서 나타났어. 당시 우리 정보에 따르면 푸에블로호가 됐든 뭐가 됐든 동해에서 서해로 가려면 남해를 거쳐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없었대. 어떻게 육로를 동서 횡단을 한 걸까. 그것도 배가. 이 얘기 재밌지 않아?”
자, 그렇다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얘기는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아 그 큰 짐을 왜 내게 맡기고 가시는 것일까. 짖궂은 노친네같으니라구. 잘 가세요 사랑했던 늙은이. 이 영화 얘기는 다시 뵐 때 또 하기로 하지요. 페어웰, 나의 감독님. / 오동진 영화평론가
[에필로그] '피막' 속으로 떠난, 이두용 감독의 마지막 대화
기침이 너무 잦으셨다. 기관지가 문제였다. 자주 사래가 걸리셨고 한번 기침이 나오면 멈추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코로나19에 걸렸다. 그렇다. 그게 문제였다. 직접적인 사인은 폐암이라고 했다. 극도로 약해진 기관지를 타고 바이러스는 폐를 공격했을 것이다. 언젠가 통화했을 때 그가 말했다.
“내가 코로나에 걸렸잖아. 그것 때문에 병원을 다녀. 아휴 죽겠어.” 그 얘기를 심상하게 듣지 말았어야 했다. 코로나가 거의 끝나가고 있던 시점이여서 그가 우회해서 던진 메시지를 깨닫지 못했다. 그는 내게 자신이 폐암으로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 달포 전 4편의 고전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원 행사 때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피막’때문에 전화를 드렸고 그에게 관객과의 대화(GV) 무대 행사에 오시기를 요청드렸다.
“동진씨가 알아서 잘해 줘요.”
그때 그의 힘없는 목소리를 알아 차렸어야 했다. 아니 어느 정도는 감을 잡았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천추의 한이다.
놀랍고 기이하며 이건 무슨 하늘의 뜻인가 라는 심정이 드는 것이 그의 죽음을 예고한 것인 양 그의 마지막이 될 영화 행사를 ‘피막’으로 준비했다는 점이다. 피막은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공간과 바깥 세상을 구분하는 일종의 바리케이드이다. 거기엔 피막지기라는 직종의 사람이 그 안과 밖의 경계를 지킨다.
이두용 감독은 자신이 만든 영화 '피막'의 스토리처럼 피막 밖에서 스스로 피막 안으로 들어 가서 생을 마감했다. 영화에서 주인공 피막지기 역을 했던 남궁원 선생도 지금 건강이 극히 안좋으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막의 주인공들 모두 세상을 등졌거나 끝에 가 있다는 얘기다.
지금에 와서야 이상한 계시같다고 얘기하는 것도 경을 칠 일이다. 그냥 그건 수사학이고 말 만들기의 재미 같은 것에 불과하다. 그냥 그보다는 그의 전설적인 작품 ‘피막’을 다들 기억하고, 또 기억하고, 또 기억해서, 길이 남기기를 바랄 뿐이다.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
사기한 미스터 허 (1967, 각본)
미워도 다시 한번 (1969, 조연출
잃어버린 면사포 (1970)
댁의 아빠도 이렇습니까 (1971)
형2 (1971)
죄 많은 여인 (1971)
어느 부부(1971)
날벼락 (1971)
야오귀 (1971)
어디로 가야 하나 (1971)
웃고 사는 박서방 (1972)
가지 마오(1971)
아낌없이 바치리 (1972)
체포령(1973)
홍의 장군 (1973)
용호대력(1974)
죽엄의 다리 (1974)
작은 새 (1974)
돌아온 외다리 1,2 (1974)
분노의 왼발(1974)
배신자(1974)
무장 해제(1975)
사생결단 (1975)
병태의 감격시대 (1975)
흑야 (1975)
아메리카 방문객 (1976)
비밀객2 (1977)
뉴욕 44번지 (1977)
초분 (1977)
생사의 고백(1978)
선배(1979)
오빠가 있다(1979)
물도리동(1979)
경찰관(1979)
지옥의 49일(1979)
우산 속의 세 여자 (1980)
최후의 증인(1980)
쌍웅(1980)
귀화산장(1981)
피막(1981)
해결사(1982)
욕망의 늪(1982)
이상한 관계(1983)
여인 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1984)
낮과 밤(1984)
장남(1985)
돌아이 (1985)
뽕(1986)
돌아이 2(1986)
내시(1986)
고속도로 (1987)
업 (1988)
뽕2(1988)
침묵의 암살자 (1989)
청송으로 가는 길 (1990)
흑설(1991)
연애는 프로 결혼은 아마추어 (1994)
위대한 헌터 G.J. (1995)
아리랑 (2003)
말보로 전쟁(2009, 제작고문)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