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중기부 장관이 달려가야 할 현장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여야 공방이 치열했던 산업 관련 이슈 중 하나가 중소기업 연구개발(R&D) 예산 삭감 문제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식 회의에서 언급한 이른바 ‘R&D 카르텔’의 실체로 뿌려주기식 보조금이 지목됐다. 관행적인 예산 지원으로 좀비기업이 생명을 연장하며 중기 생태계를 어지럽힌다는 게 당정이 공유한 문제의식이었다.

일부 사례지만 기획·연구 역량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이 전문 브로커를 통해 연구 계획서를 대리 작성해 R&D 과제를 수주하는가 하면, 경쟁률이 1 대 1 미만인 공모 사업도 발견됐다. “카르텔은 없다”는 이영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의 호소에도 결국 올해 중기 R&D 예산은 작년 대비 22.7%(4150억원) 삭감됐다.

R&D 예산 칼질에 대혼란

R&D 예산 축소의 후폭풍은 연초부터 중소기업 업계에 몰아치고 있다. 중기부는 중기 R&D 과제를 수행하는 기업들과 협약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주머니에 들어올 돈이 줄었으니 그에 맞게 각 사업에 배분할 지원금을 재조정하는 작업이다. 올해 삭감 대상으로 선정돼 갑작스럽게 협약 변경을 요청받은 기업은 4000곳을 넘는다. 과제별 차이는 있지만 각 기업은 작년에 받은 지원금에서 최대 절반이 깎인 금액을 받게 된다. R&D에 투입할 자금 여력이 없는 중소·벤처기업들은 당장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일부 지방 중소기업은 어렵게 확보한 연구인력이 이탈할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수년간 수행해온 과제를 포기해버리는 기업이 속출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R&D 자금의 효율적인 배분·집행이라는 취지는 이해되지만 기업별·과제별 성과나 연구 진행도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지원 예산을 삭감한 것은 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문제가 있거나 효과가 작은 사업을 골라내는 방식이 아니라 총액을 정해 놓고 비율대로 줄이라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장관이 직접 나서 업계 달래야

기술 기반 사업은 개발 단계별로 투입되는 시간과 자금이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R&D 예산을 지원받는 기업 대부분은 아직 시장성을 갖추지 못한 곳이 많아 성장 초기에는 정부 정책자금을 집중적으로 지원해 생명의 싹을 틔워주는 게 맞다. 1500억달러(약 200조원·작년 말 기준) 기업가치로 평가받는 스페이스X조차 설립 초기 미국 정부의 자금 지원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연이은 로켓 발사 실패로 여러 차례 파산 위기를 경험했다.

외교부 차관 출신인 오영주 중기부 장관이 공식 취임한 지 4주째를 맞았다. 취임 일성인 ‘우문현답’(우리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 방침에 따라 소상공인·중기 지원단체, 뿌리기업을 돌며 현장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지금 정말 시급한 건 당혹감에 휩싸인 해당 중소·벤처기업인들을 직접 만나 달래고, R&D 예산 삭감에 따른 현장 혼란을 가라앉히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상황 설명과 함께 R&D 지원사업의 방향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그게 진정한 우문현답의 자세다.

도전과 창업 의지가 꺾인 생태계에 혁신은 생겨날 수 없다. 혁신의 불씨가 사그라지면 오 장관이 누차 강조한 K중기·벤처의 글로벌 진출도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