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케이스 스터디 - 호텔신라
1호점 신성할망식당 박정미 사장. 사진=호텔신라
1호점 신성할망식당 박정미 사장. 사진=호텔신라
(본문)
‘맛있는 제주 만들기’(맛제주)는 호텔이 보유한 조리법, 서비스 교육 등 맞춤형 컨설팅을 제공하고 시설과 내부 인테리어 등을 개선해 영세 식당의 자립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다. 제주에서 별도 조리사 없이 소규모 음식점을 운영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대상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공들이는 상생 프로그램 중 하나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 셰프가 10년째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다. 박 셰프는 제주를 대표하는 식재료를 활용해 특별한 메뉴를 개발한다. 메뉴는 한식부터 양식, 중식, 분식까지 다양하다. 언뜻 외식사업가 백종원 씨가 골목상권을 살리고 영세 자영업자를 돕는 TV 프로그램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취지가 비슷해 보이지만, 원조는 호텔신라다.

‘위기의 자영업자’ 문제에 주목

맛제주의 시작은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텔신라가 제주에서 신라호텔과 면세점을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에게 받은 사랑을 지역사회에 환원할 방법을 고민하던 중 자영업자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박 셰프는 “맛제주 기획 당시 자영업자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었는데, 특히 음식점업 폐업 자영업자가 94%로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설명했다.

음식점업은 진입장벽이 낮아 사전에 준비 없이 개업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가 많았다. 박 셰프를 비롯한 호텔신라 직원들은 “식음(F&B) 부문에 강점이 있는 호텔신라의 업(業)을 살려 영세 자영업자의 재기를 돕고 제주 관광지의 음식 문화 경쟁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렇게 10년에 걸친 동행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맛제주 식당은 제주도청 주관 선정위원회 심의를 거쳐 최종 선정된다. 식당이 선정되면 박 셰프는 해당 식당을 방문해 개선할 점을 찾는다. 신메뉴 개발 외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식당 주인과의 소통이다. 박 셰프는 식당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건강까지 세심하게 살핀다.

한 식당은 재개장 이후 주인의 건강 문제로 운영을 지속하기 힘든 상황에서 박 셰프의 세심한 배려로 호텔신라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호텔신라는 식당 주인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해 듣고 삼성서울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줄 뿐 아니라 병원 진료 때마다 서울 신라스테이를 숙소로 제공했다.

식당 주인은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적극적으로 치료받은 덕분에 건강을 회복해 1년 만에 식당을 재개장했고, 지금은 문을 닫기 전 매출을 회복한 상태다. 박 셰프는 “맛제주 컨설팅 이후 매출이 올라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기쁘다”며 “생활고로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한 자녀를 대학에 보내거나 자녀를 결혼시켰다는 소식을 들으면 큰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9호점 해성도뚜리 김자인 사장과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세프. 사진=호텔신라
9호점 해성도뚜리 김자인 사장과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세프. 사진=호텔신라
하루 손님 10명이던 식당, 셰프 손맛에 ‘북적’

2014년 2월 6일 재개장한 1호점 ‘신성할망식당’은 순대국밥과 고기국수가 주메뉴인 20평 규모의 식당으로, 박정미 씨가 운영해왔다. 당시 딸이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고, 그동안 병원비로 쓴 대출금을 갚기 위해 남편이 일용직으로 일을 나가는 등 부부가 함께 식당을 운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이었다. 호텔신라는 주인 부부에게 주메뉴인 고기국수와 순대국밥의 맛을 한 단계 높이는 방법과 할망돼지볶음이라는 신메뉴를 개발해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 결과 신성할망식당은 제주를 대표하는 맛집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애월 해안 도로변에 위치한 9호점 ‘해성도뚜리’는 김자인 씨가 홀로 운영하던 동네 영세 식당으로, 2015년 3월 12일 재개장했다. 남편과 사별한 뒤 홀로 자녀 3명을 키우던 김 씨가 흑돼지구이를 판매하는 식당으로 시작했으나, 하루 평균 매출이 15만원밖에 안 될 정도로 영업이 저조해 식당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맛제주에 선정된 이후 분위기가 반전됐다. 박 셰프가 개발한 신메뉴 ‘토마토 짬뽕’으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박 셰프는 관광객들이 여행의 추억을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하는 것에 착안해 토마토 짬뽕을 개발했다. 특제 토마토소스를 이용해 해산물과 각종 채소를 볶아 만드는데, 식당 주인이 직접 채취한 톳과 함께 황게, 새우가 통째로 들어가 맛과 영양은 물론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컨설팅을 받기 전에는 하루에 찾아오는 손님이 10여 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자리가 없어 줄 서야 할 정도로 맛집이 됐다. 토마토 짬뽕을 먹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손님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맛제주 식당 중에는 분식집도 있다. 제주시 동문로에 위치한 12호점 ‘청춘테이블’은 김영숙 씨가 여고 앞에서 1995년부터 떡볶이, 김밥 등 분식류를 판매하던 영세 식당이었다. 조리 방법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한 김 씨가 남편의 실직 후 생계를 위해 단순히 ‘학교 정문 앞이니 장사가 잘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개업했으나 하루 매출이 3만원에 그칠 정도로 저조해 식당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던 중 맛제주에 선정돼 2015년 12월 9일 재개장한 뒤 기사회생했다.

기존 메뉴를 업그레이드해 수제 떡볶이·즉석떡볶이와 수제 단무지김밥을 개발하고, 신메뉴로 ‘토마게티(토마토라면+스파게티)’를 선보인 뒤 매출이 살아난 것이다. 호텔신라가 12호점만을 위한 메뉴 개발을 위해 지역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분식 메뉴 선호도 조사를 진행한 뒤 개발한 메뉴 덕분이다.

26호점 ‘용담생국수’는 2023년 12월 20일에 재개장했다. 식당 주인은 넉넉지 않은 형편임에도 자발적으로 독거노인에게 매월 무료 식사를 제공하며 지역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박 셰프는 기존 메뉴인 고기국수를 업그레이드하고, 돼지국밥을 새로 선보였다. 시설 인테리어도 대폭 개선해 협소하고 분리돼 있던 주방 공간을 1인 운영에 맞게 리뉴얼했다. 회전식 가마솥, 서랍식 냉장고 등 새로운 주방 장비도 마련했다. 홀 공간은 기존 좌식 테이블을 철거하고 입식으로 변경해 고객에게 쾌적한 식사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함께 맛있는 제주만들기 25호점 탄생을 축하하며 25호점 동문칼국수 이윤지 사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호텔신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함께 맛있는 제주만들기 25호점 탄생을 축하하며 25호점 동문칼국수 이윤지 사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호텔신라
어려운 이웃에 손길…나눔의 선순환

맛제주는 재기 발판을 마련한 식당 주인들이 직접 봉사 단체를 만들고 이웃 주민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 나눔의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역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 재기에 성공한 식당 주인들이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며 자발적으로 봉사 모임을 만들어 봉사활동에 나서고 있는 것. 2015년 10월에는 제주시 연동에 소재한 ‘연동경로회관’을 방문해 어르신 120여 명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했다. 2016년 2월에는 독거노인과 재가장애인 등 소외 이웃 120가정에 이불을 기증했다.

식당 주인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하는 ‘맛있는 밥상’ 봉사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다. 2016년 10월 당시 태풍 차바의 피해를 크게 겪은 곳 중 한 곳인 서귀포시 남원읍의 ‘신례 2리 노인회관’을 방문해 어르신 120여 명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노인회관 주변 환경정화 활동과 함께 생필품도 전달했다.
맛있는 밥상 봉사활동. 사진=호텔신라
맛있는 밥상 봉사활동. 사진=호텔신라
2017년 9월에는 추석 명절을 앞두고 식당주들이 제주시 구좌읍의 ‘동제주 종합사회복지관’에서 지역 어르신과 독거노인 100여 명에게 갈비탕, 즉석 바비큐 등 직접 만든 음식을 제공했다. 2019년 1월에는 설 명절을 맞아 제주도 내 몸이 불편한 가족이 있는 110가정에 이불을 기증했다.

맛제주는 대표적 지역사회 공헌으로 인정받아 2015년 제10회 자원봉사자의 날을 맞아 실시한 전국자원봉사자대회에서 기업 부문 최고 영예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맛제주의 성공으로 강원도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해 폐광 지역 영세 식당을 살려 지역경제 활성화를 꾀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코로나19로 대면 봉사가 어려워지면서 맛있는 밥상 봉사활동이 잠시 중단됐지만, 2024년 2월부터 봉사활동을 재개할 예정이다.

맛있는 제주 만들기 식당 주인들은 수년째 봉사활동에 참여하면서 유대감도 높아졌다. 이들은 “저희가 받은 고마움과 배려가 우리 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위한 나눔 문화가 확산할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아 봉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인터뷰]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 셰프

“26개 영세 식당 살린 ‘제주 백종원’…타 지역도 벤치마킹해 보람”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셰프. 사진=서범세 기자
박영준 제주신라호텔 메인셰프. 사진=서범세 기자
- ‘맛있는 제주 만들기(맛제주)를 10년째 이끌고 있다. 메뉴를 개발할 때 어떤 점에 중점을 두는지.

“음식점에서 가장 중요한 ‘맛’이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표준 레시피 정립에 초점을 맞춘다. 최종 선정된 식당을 암행 방문해보면 처음과 그다음 방문 때의 맛이 다른 경우가 많다. 표준 레시피 없이 손대중, 눈대중으로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열 번째 고객이든 100번째 고객이든 항상 균일한 맛을 제공할 수 있도록 식당 주인에게 전자저울, 온도계 사용법을 교육하고 온도와 염도를 파악하도록 제주신라호텔에서 감각 교육도 진행한다.”

- 식당 선정 기준이 궁금하다.

“호텔신라는 식당 선정 과정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제주도청과 지역 방송사가 함께 선정위원회를 구성해 심의 절차를 거쳐 선정한다. 최종 선정까지 3~4개월 정도 소요된다. 우선 식당주가 제주도민이어야 하고, 별도의 조리사 없이 혼자 전업으로 운영하는 등 필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식당 규모와 월 매출, 순수익, 지원의 시급성, 식당주의 참여 의지도 함께 평가한다. 이런 평가를 거쳐 최소 5곳, 최대 20여 곳까지 추천을 받는다. 최종 선정된 식당의 음식 맛과 운영 상황 전반을 파악하기 위해 제주도청 관계자들과 함께 식당에 알리지 않고 미스터리 쇼퍼처럼 암행 방문도 해본다.”

- 컨설팅 과정에서 식당 주인을 설득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대부분 식당 주인이 연세가 있는 데다 주부 10단이다 보니 음식을 만들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조리법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따르곤 한다. 예를 들어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를 만들 때 육수가 아닌 맹물을 사용하거나, 생선을 구울 때 적합한 조리 도구를 사용하지 않아 맛뿐 아니라 안전성과 위생에 대한 교육도 진행한다.”

- 애착이 가는 메뉴는 뭔가.

“모든 메뉴가 자식처럼 소중하지만, 2015년 토마토 짬뽕(9호점)과 고기국수·돼지국밥(26호점)에 들어가는 명품 사골 육수가 가장 애착이 간다. 평소 즐기는 라면의 열량을 낮추려고 토마토를 넣어 끓이니 의외로 시원하고 상큼한 맛이 났다. 더 연구한 끝에 9호점의 토마토 짬뽕을 선보이게 되었다. 여성들이 특히 좋아해 소셜미디어에서 입소문이 났고, 이후 SBS 〈미운 우리 새끼〉에 방영되면서 더 유명해졌다. 명품 사골 육수는 26호점의 고기국수와 돼지국밥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맛을 차별화하기 위해 돼지뼈 육수에 멸치 육수를 섞어보니 돼지의 누린내가 잡히면서 깊고 풍부한 맛이 났다. 기존 단골 고객도 맛을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신메뉴를 통해 식당의 매출이 기존보다 5배 이상 올랐다.”

- 가장 보람찬 순간은 언제였나.

“식당 주인 대부분 생계형인 만큼 그동안 여행 갈 여유가 없었다. 2016년 이들을 서울신라호텔로 초청해 남산과 경복궁 등을 관광하고 CEO와 함께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온 것 같다며 다들 좋아하셨다. 맛제주 5주년이던 2018년에는 제주신라호텔에서 기념행사를 하면서 식당 주인들을 초청했다. 특급 호텔에서 좋은 서비스를 경험해봐야 자신의 식당에서도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기에 마련한 자리였다. 맛제주 식당들이 재개장 후 매출이 많이 올라 자녀가 가업을 잇거나 다른 가족이 비법을 전수받아 분점을 낸 경우도 있다. 재개장 후에도 사후관리 차원에서 종종 방문하는데, 처음엔 생활고에 지쳐 어두웠던 식당 주인들이 장사가 잘되면서 표정이 밝아졌을 때 보람을 느낀다.”

- 코로나19 시기에는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대면 봉사를 할 수 없던 시기라 기존 식당 관리에 집중했다. 위생과 안전한 먹거리에 초점을 맞춰 위생 점검과 위생 교육에 신경 썼다. 종합 환경 기업인 세스코와 협약을 맺고 정기적 방역 활동도 진행했다. 제주관광공사와도 ESG 활동의 일환으로 2호점 사장님과 해양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을 했다. 맛제주 식당 홍보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신라스테이 제주의 스페셜 조식 메뉴로 맛제주 식당에서 판매하는 메뉴를 선보였는데, 고객의 반응이 좋았다.”

- 다른 지역에서 벤치마킹하는 사례도 있었다.

“강원랜드 사회공헌재단에서 폐광 지역 내 위기를 겪고 있는 자영업자를 지원하는 ‘정·태·영·삼(정선·태백·영월·삼척) 맛캐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맛제주 기사를 보고 연락이 와서 자문을 제공했다. 강원도를 방문해 식당주들이 초심을 잃지 않도록 맛제주 식당의 성공 경험을 공유했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조언했다.”

- 향후 계획은.

“2024년 2월 6일, 1호점이 재개장한 지 만 10년이 된다. 1년에 2~3곳씩 재개장하다 보니 참여 식당이 26호점까지 늘었다. 재개장을 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고 식당의 매출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상품, 서비스, 시설 점검 등 사후관리에 집중할 계획이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