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오페라 얘기가 오가는 식탁에 '라구'가 나오면 생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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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지중배의 삶의 마리아주-맛있는 음악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속의 황금시대, 현재란 그런 거예요. 늘 불만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우디앨런 감독의 ‘미드나잇 인 파리’ 中>
좋은 음식은 같이 즐기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공유하게 해준다. 같이 즐기고 있는 음식이 가져다주는 추억들은 서로의 온갖 이야기들을 끄집어 내준다. 서로가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즐거움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현재의 삶에, 인간관계에, 혹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추억속 과거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함께 즐기는 음식을, 그 추억들을 먹으며 고민했던 일들이, 추억속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들이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이내 현재 같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날도 대구에서 우리는 그렇게 모였고 테이블에 둘러앉아 만든이의 마음이 담긴 음식들과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야기들을 공유했다.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만나진 인연들이다. 의사, 사업가, 회사원, 예술가 그리고 요리사등 다양한 구성의 우리는 멋진 셰프님이 미소로 반겨준 서까래가 멋스러운 포근한 이탈리안 식당에서 모였다. 그 멋진 셰프형님은 이날 모임의 호스트이다. 이름부터 멋진 구자태 셰프는 나의 이탈리안 요리의 멘토이기도 하다. 형님의 남부 이탈리아 음식은 사람들을 식탁앞에서 눈시울을 붉어지게 한다. 맛있음에 오는 눈물일 수도, 추억에서 오는 눈물일 수도, 행복과 떠오르지 않는 기억이 뒤섞인 뜨거움 일수도.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행복한 음식들과 와인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주방에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 자태형님은 웃고 떠들던 그 순간을 식기구가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게 하다가 그릇을 비우자 마자 너도 나도 할거없이 많은 추억들을 꺼내 놓게 하는 가장 심플하고 소박한 음식을 스윽 내밀었다.
도톰한 파케리(Paccheri) 파스타 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나폴리식의 라구, <라구 나폴레타노 Ragù Napoletano>를 듬뿍 얹은 투박한 그 요리. 설마 우리를 위해 이것을 준비할 줄이야. 보편적으로 많이 먹는 다진고기를 중심으로 양파, 당근, 셀러리등과 토마토 페이스트와 와인에 자작하게 만든 < 라구 볼로네제 Ragù alla Bolognese >와 달리 나폴리지역의 라구는 소갈비살이나 우둔살을 덩어리로 토마토퓨레와 와인에 아주 오랫동안 푹 고아서 국물이 어느정도 있는 라구(Ragù)이다. 나는 마치 오래 푹 삶아져서 마치 고기가 풍성한 국밥 같아서 이 나폴리식의 라구를 좋아한다. 어찌보면 단순하고 투박하다. 좋은 재료와 긴 시간이 그 맛을 만들어주는 이 음식은 내가 책이나 영화, 음악으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19세기의 과거의 투박한 나폴리와 같다. 꾸밈없고 직관적이며 그 색 또한 피처럼 빨간 이 음식은 음악으로 표현하자면 < 베리즈모Verismo 오페라 >와 같다. 나폴리 출신의 작곡가 레온카발로의 베리즈모 오페라 <팔리아치(광대들)>는 너무나도 현실적인 치정-범죄극이다. 내가 이 오페라를 고등학생때 처음 접했던 연출은 프랑코 제피렐리가 영화로 만들었던 비디오였다. 이탈리아 남부의 시골마을의 냄새와 바람에 날리는 모래가 느껴지는 강렬한 영상이었다. 어린 아내의 불륜 사실에 끓어오르는 화와 복수감이 올라왔지만 광대(팔리아쵸)인 카니오는 곧 막이 오르는 연극무대를 위해 비통한 마음으로 무대의상을 입으며 스스로 얼굴에 분장을 한다. 다른 남자에게 아내를 빼앗기고도 그 사실을 안 그 순간에도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연기를 해야 하는 그 심정, 내가 오페라가수라면 꼭 연기와 노래를 하고 싶은 장면, 도밍고가 부르는 카니오의 유명한 아리아 ‘의상을 입어라’의 장면은 너무나도 씁쓸하고 처절하다. “웃어라 광대야! 그러면 모두가 박수를 칠 것이다. 너의 고통과 눈물을 농담으로 바꾸어봐….웃어라 광대야. 너의 깨진 사랑에.. 너의 심장을 찌르는 슬픔을 비웃어라.” 이중적인 상황에 드러나는 한 인간의 절규이다. 무대에서 연극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결국 아내를 그리고 그 정부까지도 살해하고 외치는 세상 공허한 마지막 대사 “코미디는 끝났다”는 현재도 과거도 모두 부정하는 모든 것이 처절하게 무너져 버리는 장면이다. 이 마지막 대사는 후대에도 많은 어두운 작품들에 인용되곤 하였다. 모든 세상이 무너져버리는 이 대사가 어떤이는 해학과 풍자로 세상의 마지막이 아니라 즐거운 기억으로 마무리 짓는다. 우디 앨런이 감독한 영화 <로마 위드 러브>에서 극중 제리(우디 앨런扮)는 바깥사돈이 샤워를 하는 때에만 기가 막히게 오페라를 잘 부르는 것을 보고 가수로 데뷔를 시키고 이후 그를 주역으로 하여 오페라<팔리아치>를 올린다. 해학적으로 그는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를 하며 연기하고 부른 노래로 성공적으로 오페라를 끝낸다. 마지막의 “코미디는 끝났다”는 이들에게는 세상의 끝이 아니었다. 사돈은 제리의 계속되는 꼬드김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오페라무대에 한번 서 본 것만으로 행복했고, 제리 또한 기획에 대한 악평도 있지만 그 또한 아전인수로 생각하고 즐거워한다. 삶이 가진 다양한 모습 중 같은 모습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그 색깔은 무궁무진해진다. 이야기를 가진 음식과 음악이 함께하면 그 순간은 또 색달라질 것이다. 그날의 < 라구 나폴레타노 Ragù Napoletano >는 우리에게 나폴리 작곡가의 피로 물든 오페라를 이야기해주었고 그 오페라 이야기는 영화<로마 위드 러브>로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이들의 추억을 끄집어내 주었으며 또 다른이들 에게는 여행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지루함으로 가득한 게 인생이라고 믿었는데 마법보다 더 신비로운 인생을 당신이 보여줬어요” <우디앨런 감독의 ‘매직 인 더 문라이트’ 中>
-글 지휘자 지중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