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키스 전에 책부터 읽어줘" 이것은 존엄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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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조원경의 책 경제 그리고 삶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에게서
엿보는 갈등과 소통의 경제관
'더 리더, 책 읽어 주는 남자'에게서
엿보는 갈등과 소통의 경제관
소통은 돈이 된다. 메타의 스레드를 비롯하여 다양한 SNS가 트위터 킬러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디 그뿐인가? 소통은 높은 비용을 줄여주는 역할도 한다. 갈등의 사회·경제적 비용이 심각할수록 최고의 화두는 제대로 된 ‘소통’이 된다. 우리 사회의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소통 부재가 여러 문제를 만들고 있다. 세대·젠더·이념·지역 등 사회 곳곳에 만연한 갈등과 대립이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였나?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갈등 관리 비용 추산에 나섰다. 갈등의 실태와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정확하게 파악해 효율적인 대책을 마련하려는 취지이다. 지난해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이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분석’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최대 246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했으나 너무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갈등국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갈등지수는 세계에서 3번째로 높다. 한국행정학회는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튀르키예,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다고 발표했다. 노사갈등이 한국만큼 심각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경영인들은 실제 근무시간의 상당을 소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기업문제 가운데 대부분은 소통 장애로 발생한다. 제대로 된 성과를 내던 기업이 갑자기 어려워진 경우를 보자. 고객과의 소통 또는 조직 내부의 소통 문제가 원인일 수 있다. 파격적인 소재의 소설을 영화로 만나는 것은 누가보아도 좋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가 그러한 경우다. 책 읽어 주는 이야기는 소통의 문제이다. 제목에서부터 소통 부재가 얼마나 큰 대가를 낳았을 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홍역 때문에 길에서 아파하며 남의 집 앞에서 구토하던 15살 마이클은 낯선 여자 한나(36세)를 만난다. 그녀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전차 검표원 한나는 그에게 엄청난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엄격함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독일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한나의 존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같은 독일인이어도 뭔가 다른 다정한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한나 역시 아는 사람도, 가족도 없었으니 그녀에게 마이클의 등장은 새로운 경험이고, 그게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된 배경이었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자신과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한창 성(性)에 눈뜰 나이인 마이클은 한참 누님뻘인 한나의 교육법 정도로 생각한다. 그녀를 위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위해 책을 열심히 읽어준다. 영화보다 책으로 보면 주인공 마이클의 심리가 제대로 들어난다. 그 대목을 읽어 보자.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를 통해 처음 베드신을 찍은 남자 주연배우 데이빗 크로스는 영화를 촬영할 때 15세 미성년이어서 베드신 촬영에 임할 수 없었다. 제작진은 데이빗이 성년이 되는 3년이란 기간을 기다리고 촬영에 임하며 사실적인 장면 연출을 만들어 냈다.
어느 날 한나는 소통이란 예고도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한나의 성실함이 검표원에서 사무직으로 승진의 기회를 주었는데 말이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놀랍다.
문맹인 한나는 사무직을 맡을 수 없어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났다. 8년 뒤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다가 피고석에 앉은 한나를 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태인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던 한나는 호송 도중 문을 열어주지 않아 유태인 삼백명이 불에 타 죽은 사건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한나는 여기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백함으로써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과중한 형을 받는다.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일을 한 그녀는 관련 보고서를 자신이 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백을 하게 된다. 한나는 문맹인 사실이 알려지느니 무기징역을 택한 것이다.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제야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나와 또 다시 20년의 이별을 맞아야만 하는 그의 사랑이야기는 가슴 뭉클하다.
한나가 문맹인 점을 알려야 하느냐는 갈등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진실을 밝히느냐 그녀의 자존감을 살려주느냐 사이에서 데이빗은 상대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 이후 10년간 한나에게 읽어 주었던 책들을 녹음한 테이프를 소포로 보내면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마이클은 노력한다. 왜 영화가 책 읽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이클은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나 10대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딸아이를 둔 이혼남이었다.
소포로 온 테이프들을 들으며 옛 추억을 떠올리던 한나는 해당 책을 빌려 테이프 내용과 글자를 대조하며 스스로 글을 배우게 된다. 세월이 흘러 마이클은 교도소 측에서 한나가 곧 가석방 될 예정이란 연락을 받는다. 마이클은 교도소에서 출소 일을 앞두고 면회를 한다. 둘은 잠시 재회로 감격을 나눈다.
마이클은 그녀가 글을 깨우쳤음에도 여전히 나치 시절 본인이 했던 일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끼지 않자 실망한다. 마이클이 떠난 후 한나는 본인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한나는 자살로 생애를 마친다. 마이클은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원통해 한다. 마이클이 이후 한나를 이해하는 모습과 한나와의 관계를 딸에게 고백하며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10대 소년을 사랑하게 되는 30대 여인의 떨림과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문맹이라는 평생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숨길 수밖에 없는 여인의 연약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착잡한 심정의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까? 휴대폰 문자에도 표정이 있다. 이모티콘으로 오가는 담백한 소통이 꽤나 매력적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어휘와 품사의 위치에 따라 드러나는 마음의 상태를 읽어 음미하면서 적절한 대화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 소위 소통의 매개로서 ‘글’은 상상력을 선사한다. 일면식 도 없는 사람의 문자 몇 줄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문맹이었던 한나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한나와 마이클의 격렬한 언쟁 장면은 일상에서도 흔한 다툼의 근원적 문제를 설명한다. 대상에 대해 알려 하지 않고 대상에게 나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오해와 불통의 산물은 갈등과 전쟁이다. 마이클과의 격한 언쟁 후에 한나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달라고 들이미는 모습에서 우리는 터놓는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소통은 경우에 따라 전쟁을 혹은 평화를 야기하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 기회를 확대하는 물꼬를 틀었다. 단순히 의사전달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 배려, 존중이 소통의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한다. 소설과 영화의 주제는 이를 관통하고 있다.
문맹이라는 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보고서의 필체 검증을 피하고 무기징역형을 감수하는 한나를 마이클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나를 만나 설득해볼 생각으로 면회를 신청하지만 도중에 발길을 돌리고 만다. 한나의 행위가 ‘문맹’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자의 ‘예기치 못한 범죄’임을 마이클 역시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한나를 이해하기 어려워 철학자인 아버지의 조언을 구하면서 고통스런 답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른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녀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위에 둘 수는 없다고 말이다.
과거에는 둘의 관계가 책을 읽어 주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등한 관계였었다. 세월이 흐른 후 한나는 이제 더 이상 줄 게 없다는 수치감을 직시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의 부활에 대한 욕망이 편지라는 소통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고 절망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로 자살이란 파국에 이르렀다.
소통의 부재는 종국에 가서 자신과 주변에 해를 끼친다. 한나의 이야기가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사회문제가 되는 이유이다. 말 못하는 이야기로 우울감을 말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수치와 갈등구조를 생각해 보자. 어쩌면 최근 발생한 유명 영화배우의 자살이란 파국도 소통의 부재와 거짓 이야기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미국 노드스트롬 백화점은 고객과의 소통에 있어서 소비자 최우선주의의 경영 이념을 갖고 아낌없는 배려를 통해 성공했었다. ‘노드스트롬 효과(Nodstrom Effect)는 얼마 전까지도 다른 기업에 모범이 되었다. 소비자와의 소통이 부족했던 것일까? 상황이 변화하면 소비자는 등을 돌린다. 지난해 8월 노드스트롬이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노드스트롬 유니언스퀘어점을 35년 만에 폐점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종전의 의사소통 수단은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사회적 혐오시설이 내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일이 사회적 관심을 끈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분쟁이 심화되면 구성원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지역 이기주의가 확대되며 각종 사회적 비용이 증가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다. 정치가 ‘지역 균형 발전’, ‘세대 간 화합’이란 이름으로 이런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싶은 요즈음이다. 서로를 위한 존중과 배려는 시너지를 만든다. 세상을 이끌어 온 원동력은 비밀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를 이끄는 제대로 된 소통에 있다. 더 리더의 소설 속 대사는 갈등 구조에서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과 그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
우리가 딜레마에 빠질 때 터놓고 이야기하는 소통의 공간이야말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처럼 읽고 묻고 서로 소통하며 존중하는 게 우리 사회의 예의여야 한다.
그래서였나?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사회적 갈등 관리 비용 추산에 나섰다. 갈등의 실태와 이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정확하게 파악해 효율적인 대책을 마련하려는 취지이다. 지난해 국무총리실 산하 국무조정실이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분석’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2013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연간 최대 246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했으나 너무 오래된 기록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갈등국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중 갈등지수는 세계에서 3번째로 높다. 한국행정학회는 한국의 사회갈등지수가 튀르키예,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멕시코, 브라질에 이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다고 발표했다. 노사갈등이 한국만큼 심각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경영인들은 실제 근무시간의 상당을 소통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기업문제 가운데 대부분은 소통 장애로 발생한다. 제대로 된 성과를 내던 기업이 갑자기 어려워진 경우를 보자. 고객과의 소통 또는 조직 내부의 소통 문제가 원인일 수 있다. 파격적인 소재의 소설을 영화로 만나는 것은 누가보아도 좋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가 그러한 경우다. 책 읽어 주는 이야기는 소통의 문제이다. 제목에서부터 소통 부재가 얼마나 큰 대가를 낳았을 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 후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 홍역 때문에 길에서 아파하며 남의 집 앞에서 구토하던 15살 마이클은 낯선 여자 한나(36세)를 만난다. 그녀의 집에서 목욕을 하고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전차 검표원 한나는 그에게 엄청난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사랑의 대상으로 다가온다. 엄격함이 지배하던 전형적인 독일 가정에서 자란 그에게 한나의 존재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같은 독일인이어도 뭔가 다른 다정한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한나 역시 아는 사람도, 가족도 없었으니 그녀에게 마이클의 등장은 새로운 경험이고, 그게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된 배경이었다.
한나는 마이클에게 자신과 잠자리를 갖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 주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다. 한창 성(性)에 눈뜰 나이인 마이클은 한참 누님뻘인 한나의 교육법 정도로 생각한다. 그녀를 위해, 자신의 성적 욕구를 위해 책을 열심히 읽어준다. 영화보다 책으로 보면 주인공 마이클의 심리가 제대로 들어난다. 그 대목을 읽어 보자.
다음 날 그녀와 만났을 때 그녀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자, 그녀는 몸을 뺐다.
“그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그녀는 진지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 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고 그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집중력이 꽤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면서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이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를 통해 처음 베드신을 찍은 남자 주연배우 데이빗 크로스는 영화를 촬영할 때 15세 미성년이어서 베드신 촬영에 임할 수 없었다. 제작진은 데이빗이 성년이 되는 3년이란 기간을 기다리고 촬영에 임하며 사실적인 장면 연출을 만들어 냈다.
어느 날 한나는 소통이란 예고도 없이 마이클 곁을 떠난다.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한나의 성실함이 검표원에서 사무직으로 승진의 기회를 주었는데 말이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은 놀랍다.
문맹인 한나는 사무직을 맡을 수 없어 새로운 도시를 찾아 떠났다. 8년 뒤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을 참관하다가 피고석에 앉은 한나를 보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유태인 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던 한나는 호송 도중 문을 열어주지 않아 유태인 삼백명이 불에 타 죽은 사건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한나는 여기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자백함으로써 다른 부역자들보다 훨씬 과중한 형을 받는다. 유대인 학살과 관련한 일을 한 그녀는 관련 보고서를 자신이 썼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자백을 하게 된다. 한나는 문맹인 사실이 알려지느니 무기징역을 택한 것이다. 이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제야 그녀가 문맹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한나와 또 다시 20년의 이별을 맞아야만 하는 그의 사랑이야기는 가슴 뭉클하다.
한나가 문맹인 점을 알려야 하느냐는 갈등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그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진실을 밝히느냐 그녀의 자존감을 살려주느냐 사이에서 데이빗은 상대의 결정을 존중해 준다. 이후 10년간 한나에게 읽어 주었던 책들을 녹음한 테이프를 소포로 보내면서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마이클은 노력한다. 왜 영화가 책 읽는 남자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이클은 대학 졸업 후 변호사가 되었으나 10대의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했고, 딸아이를 둔 이혼남이었다.
소포로 온 테이프들을 들으며 옛 추억을 떠올리던 한나는 해당 책을 빌려 테이프 내용과 글자를 대조하며 스스로 글을 배우게 된다. 세월이 흘러 마이클은 교도소 측에서 한나가 곧 가석방 될 예정이란 연락을 받는다. 마이클은 교도소에서 출소 일을 앞두고 면회를 한다. 둘은 잠시 재회로 감격을 나눈다.
마이클은 그녀가 글을 깨우쳤음에도 여전히 나치 시절 본인이 했던 일에 대해선 죄책감을 느끼지 않자 실망한다. 마이클이 떠난 후 한나는 본인이 한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다. 한나는 자살로 생애를 마친다. 마이클은 그 비극적인 소식을 듣고 원통해 한다. 마이클이 이후 한나를 이해하는 모습과 한나와의 관계를 딸에게 고백하며 가족관계를 회복하는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10대 소년을 사랑하게 되는 30대 여인의 떨림과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문맹이라는 평생의 비밀을 수치심으로 숨길 수밖에 없는 여인의 연약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착잡한 심정의 인간의 내면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까? 휴대폰 문자에도 표정이 있다. 이모티콘으로 오가는 담백한 소통이 꽤나 매력적이기도 하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어휘와 품사의 위치에 따라 드러나는 마음의 상태를 읽어 음미하면서 적절한 대화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때 소위 소통의 매개로서 ‘글’은 상상력을 선사한다. 일면식 도 없는 사람의 문자 몇 줄이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하는데 문맹이었던 한나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당신은 묻지 않아(You never ask). 넌 말하지 않아(You never say).
한나와 마이클의 격렬한 언쟁 장면은 일상에서도 흔한 다툼의 근원적 문제를 설명한다. 대상에 대해 알려 하지 않고 대상에게 나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오해와 불통의 산물은 갈등과 전쟁이다. 마이클과의 격한 언쟁 후에 한나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어달라고 들이미는 모습에서 우리는 터놓는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소통은 경우에 따라 전쟁을 혹은 평화를 야기하기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소셜미디어가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 기회를 확대하는 물꼬를 틀었다. 단순히 의사전달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회문제가 해결될까. 그렇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점이다. 타인에 대한 이해, 배려, 존중이 소통의 기본 조건이 되어야 한다. 소설과 영화의 주제는 이를 관통하고 있다.
문맹이라는 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보고서의 필체 검증을 피하고 무기징역형을 감수하는 한나를 마이클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나를 만나 설득해볼 생각으로 면회를 신청하지만 도중에 발길을 돌리고 만다. 한나의 행위가 ‘문맹’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자의 ‘예기치 못한 범죄’임을 마이클 역시 깨달은 것이다. 그는 한나를 이해하기 어려워 철학자인 아버지의 조언을 구하면서 고통스런 답을 얻는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른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녀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우위에 둘 수는 없다고 말이다.
과거에는 둘의 관계가 책을 읽어 주며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동등한 관계였었다. 세월이 흐른 후 한나는 이제 더 이상 줄 게 없다는 수치감을 직시했다. 그런 가운데 사랑의 부활에 대한 욕망이 편지라는 소통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고 절망했다. 그리고 소통의 부재로 자살이란 파국에 이르렀다.
소통의 부재는 종국에 가서 자신과 주변에 해를 끼친다. 한나의 이야기가 개인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고 사회문제가 되는 이유이다. 말 못하는 이야기로 우울감을 말할 수 없는 이 세상의 수치와 갈등구조를 생각해 보자. 어쩌면 최근 발생한 유명 영화배우의 자살이란 파국도 소통의 부재와 거짓 이야기로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미국 노드스트롬 백화점은 고객과의 소통에 있어서 소비자 최우선주의의 경영 이념을 갖고 아낌없는 배려를 통해 성공했었다. ‘노드스트롬 효과(Nodstrom Effect)는 얼마 전까지도 다른 기업에 모범이 되었다. 소비자와의 소통이 부족했던 것일까? 상황이 변화하면 소비자는 등을 돌린다. 지난해 8월 노드스트롬이 ‘샌프란시스코의 랜드마크’ 노드스트롬 유니언스퀘어점을 35년 만에 폐점했다. 모든 게 온라인으로 바뀌는 세상에서 종전의 의사소통 수단은 한계를 노출하게 된다.
사회적 혐오시설이 내 지역에 들어서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일이 사회적 관심을 끈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이런 분쟁이 심화되면 구성원 간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지역 이기주의가 확대되며 각종 사회적 비용이 증가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다. 정치가 ‘지역 균형 발전’, ‘세대 간 화합’이란 이름으로 이런 갈등을 조장하는 것은 아닌지를 묻고 싶은 요즈음이다. 서로를 위한 존중과 배려는 시너지를 만든다. 세상을 이끌어 온 원동력은 비밀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를 이끄는 제대로 된 소통에 있다. 더 리더의 소설 속 대사는 갈등 구조에서 진정한 소통의 어려움과 그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
“나는 한나의 범죄를 이해하고 싶었고 동시에 또 그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리고 싶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그녀의 범죄를 이해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그녀의 범죄에 대해 당연히 내려야 할 합당한 유죄 판결을 결코 내리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범죄에 합당한 유죄 판결을 내리려고 하면, 그녀의 범죄를 이해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도 남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딜레마에 빠질 때 터놓고 이야기하는 소통의 공간이야말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소설과 영화의 메시지처럼 읽고 묻고 서로 소통하며 존중하는 게 우리 사회의 예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