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만난 메타버스…현실과 가상의 경계 완전히 무너진다
메타버스란 용어는 미국 작가 닐 스티븐슨의 소설 <스노 크래시>에 처음 등장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피자 배달원이지만, 가상공간에선 일류 검객이다. 주인공에겐 남루한 현실보다 메타버스 속 음모를 밝히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세상과 나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호접지몽의 경지다.

영화 ‘매트릭스’와 ‘레디 플레이어 원’ 등도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장자가 자신이 사람인지 나비인지 구분하지 못했던 것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도 현실과 가상을 오가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는 하나둘씩 현실이 되고 있다. 이미 일부 국가에서 메타버스를 현실에 준하는 세계로 인정하고 있다. 26일 경제매체 포브스에 따르면 영국 경찰은 16세 여성이 몰입형 비디오게임에서 성폭행당한 사건을 수사하고 있다. 가상현실(VR) 장비를 착용하고 있던 이 여성은 신체적 폭행을 당했을 때와 비슷한 트라우마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국가범죄수사국(NCA)은 지난달 메타버스에서 일어나는 성폭행과 살인 등도 범죄로 취급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감각을 구현하는 촉각 슈트가 보급되면 메타버스 이용자들이 이런 범죄로 인한 피해를 체감하게 될 것이라는 게 NCA의 설명이다.

메타버스의 파괴력은 점점 더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달이 메타버스 속 세계를 진짜 현실처럼 만들고 있어서다.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 대부분이 AI의 알고리즘으로 결정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해 7월 낸 논평에서 “메타버스를 ‘AI 기반 메타버스’로 바꿔 부르자”고 주장했다. 가상공간이 아니라 AI에 방점을 찍어야 메타버스의 실체를 바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연구소는 “따뜻하고 모호한 비전을 제시하다간 메타버스가 학대, 편견, 조작, 개인 안전 위협 등의 문제를 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AI의 지식 편향 이슈도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불쏘시개다. AI가 특정 사회에 쏠린 정보를 학습해 내놓는다면 메타버스는 문화적 편견을 체득하는 공간으로 변질할 수 있다. AI로 인해 누구나 고품질의 음성과 그래픽을 만들 수 있게 되면 실제 인물을 본뜬 아바타가 메타버스에서 가짜 뉴스를 퍼뜨리거나 명예훼손을 야기할 가능성도 있다.

올해엔 메타버스의 기차 바퀴가 더 빨리 굴러갈 가능성이 높다. 애플이 다음달 2일 혼합현실(MR) 체험 기기인 ‘비전 프로’(사진)의 출시를 앞두고 있어서다. 지난 19일 사전 판매를 시작해 사흘 만에 18만 대의 판매량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가 예상한 8만 대를 배 이상 웃돌았다. 스위스 투자은행인 UBS는 애플이 올해 비전 프로를 약 40만 대 출고해 매출 14억달러를 거둘 것으로 전망했다.

다른 업체들도 메타버스에 편승하고 있다. 일본 소니는 독일 지멘스와 협업해 개발 중인 MR용 헤드셋을 지난 8일 ‘CES 2024’에서 공개했다. 메타는 선글라스 업체인 레이밴과 함께 AI와 메타버스 기술을 응용한 스마트 안경을 개발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수년간 정체됐던 메타버스 산업이 올해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확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