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는 예술의 도시다. ‘영화의 성지’ 할리우드를 품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다.
서부의 심장인 LA는 동부에 비해 미술관이 훨씬 늦게 지어졌지만, 미국의 다른 주에서 볼 수 없는 예술 생태계가 있다. 서부 지역 부호들의 기부금과 기증으로 만들어진 미술관들엔 고흐, 세잔, 드가, 마그리트, 마네, 모네, 피카소 등 역사적인 명화는 물론 동시대를 이끌어가는 ‘지금의 예술’들이 한 데 모여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계 등 수 많은 국적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며 성장한 도시여서일까. LA의 예술계가 받아들이는 문화의 스펙트럼은 다른 어느 주보다 넓고도 깊다.
게티센터에서 야외 정원에서 내려다본 풍경 © 2022 J. Paul Getty Trust
게티센터에서 야외 정원에서 내려다본 풍경 © 2022 J. Paul Getty Trust
그런 LA에선 올해 유난히 많은 예술 행사들이 열린다. 세계 최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데스티네이션 크렌쇼’가 2.1㎞ 대로를 따라 설치된다. 그래미상을 받은 아티스트이자 유명 컬렉터인 드레이크는 문화예술계 전설처럼 회자되던 ‘루나 루나’를 다운타운LA에 복원했다. 루나 루나는 1987년 독일 함부르크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예술 놀이공원으로 장 미셸 바스키아, 데이비드 호크니, 로이 리히텐슈타인, 살바도르 달리, 키스 해링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 30여 명이 참여했던 프로젝트다.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게티센터 전경. © 2018 J. Paul Getty Trust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한 게티센터 전경. © 2018 J. Paul Getty Trust
올 9월엔 전미 최대 아트페어인 ‘PST아트: 예술과 과학의 충돌’이 도시 전역에서 열린다. 818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참여하는 50개 이상의 전시가 예정돼 있다. 무엇보다 LA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도심과 근교에서 만나는 수 많은 미술관들이다. 자신의 이름이 예술과 함께 영원히 기억되길 바란 미국의 석유재벌 폴 게티의 미술관, ‘서부의 메트’로 불리는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LACMA), UCLA의 지성들에게 예술적 감수성을 전하는 해머미술관, 브로드미술관과 허핑턴라이브러리,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까지 …. 소장품의 규모와 전시의 수준까지 그야말로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꿈결 속 같은 도시, 라라랜드(La La Land)다.
파리 퐁피두 센터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LACMA.
파리 퐁피두 센터의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LACMA.
로스앤젤레스(LA)엔 100개가 넘는 미술관이 있다. 모두 돌아본다면 1년간 여행해도 모자랄 수준이다. 꼭 미술품 감상에 욕심을 내지 않아도 좋다. 건축물 하나하나가 LA의 랜드마크로 불릴 만큼 독특한 개성과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누구나 거리를 걷고, 정원을 즐기며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주일 간 LA 아트 투어를 계획하는 이들을 위한 가이드를 준비했다. 그 기간이야 물론, 길면 길수록 좋다.


게티센터 © 2022 J. Paul Getty Trust
게티센터 © 2022 J. Paul Getty Trust
미국 역사상 최고의 석유 재벌 폴 게티(1892~1976)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개인 소장품을 LA
에 묻었다. 태평양 연안 퍼시픽 펠리세이즈에 있는 게티 빌라, 산타모니카산 해발 270m언덕에 자리 잡은 게티 센터 등 두 곳의 미술관을 지었다. 게티 빌라의 언덕 아래엔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게티 센터의 꼭대기에선 LA시와 주변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게티 센터는 연간 180만 명이 찾는, 미국에서도 관람객이 가장 많은 미술관이다. 리처드 마이어가 산 위에 설계한 요새같은 이곳은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트램을 타야 갈 수 있다. 5분 가량의 트램을 타고 오르면 완벽한 내진설계와 방재 시설로 지어진 명작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계절 옷을 갈아입는 게티 센터의 유럽식 정원. 누구나 무료로 갈 수 있다. © 2022 J. Paul Getty Trust
사계절 옷을 갈아입는 게티 센터의 유럽식 정원. 누구나 무료로 갈 수 있다. © 2022 J. Paul Getty Trust
미술품 수집광이던 게티는 1954년 자신의 집에 갤러리를 열어 소장품을 전시했다. 인근에 고대 건축 양식의 새 미술관을 지었는데, 그게 게티 빌라다. 1974년 미술관으로 개관했지만 게티는 정작 이 미술관은 가보지도 못했다. 개관 후 2년 후 사망했는데, 82세였던 그는 6억6000만달러의 유산을 남겼다. 소장품이 늘어나자 게티 재단은 1997년 게티 센터를 지었다. 게티 빌라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 에트루리아 유물이 전시돼있고 게티 센터엔 미국과 유럽 근현대 미술품이 진열됐다.
게티센터는 산타모니카산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방문객은 주차장에서부터 5분 가량 트램을 타고 올라간다.  © 2002 J. Paul Getty Trust
게티센터는 산타모니카산 언덕 위에 지어졌다. 방문객은 주차장에서부터 5분 가량 트램을 타고 올라간다. © 2002 J. Paul Getty Trust
두 곳만 다 돌아봐도 하루가 모자라다. 게티 빌라의 하이라이트는 전망 좋은 야외 레스토랑과 유럽식 호화 정원. 게티 센터는 기획전시 외에도 웨스트 파빌리온에 고흐, 렘브란트, 모네 등 명화들이 모여있다. 게티 센터 안엔 100만 권 이상이 장서와 200만 장이 넘는 사진을 소장한 게티연구소도 있다. 방문 시간 등을 미리 예약해야 하는데, 주차비를 제외하면 모두 무료다.

하얀 벌집 미술관 브로드, 아침부터 “줄을 서시오”

현대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LA에선 아침부터 줄을 서야 하는 곳이 있다.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제프 쿤스, 쿠사마 야요이 등 현대미술의 거장을 무료로 만날 수 있는 더 브로드 미술관이다. LA다운타운에서 새하얀 벌집 모양의 건물을 찾으면 된다. 총 면적만 1만1140㎡(3370평), 그 중 절반 가량이 전시 공간이다.
LA다운타운의 '더 브로드 뮤지엄' 전경. 무료 개방된 미술관엔 아침부터 줄을 늘어선다.
LA다운타운의 '더 브로드 뮤지엄' 전경. 무료 개방된 미술관엔 아침부터 줄을 늘어선다.
개관한 지 10년도 안됐지만, 매년 90만 명 넘는 관람객이 찾는 글로벌 명소가 됐다. 부동산 개발로 슈퍼리치가 된 자선사업가 엘리 & 에디 브로드 부부는 2015년 반세기 수집한 2000여 점의 컬렉션을 내놨다. LA시민들 누구나 유명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관람료도 받지 않는다는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더 브로드 뮤지엄 미술관 입장통로. 거대한 동굴 속을 탐험하듯 설계됐다.
더 브로드 뮤지엄 미술관 입장통로. 거대한 동굴 속을 탐험하듯 설계됐다.
세계적 건축회사 ‘딜러 스코피디오&렌프로’는 ‘장막과 납골당’이라는 컨셉트를 내세웠다. 건물 외벽엔 유리섬유 강화 콘크리트로 미래적인 분위기를, 건물 내부 진입로는 지하 동굴을 탐험하듯 설계했다. 사방이 거울로 된 ‘인피니티 미러 룸’은 1년 내내 붐비는 전시장.
더 브로드 뮤지엄의 제프 쿤스 작품들.
더 브로드 뮤지엄의 제프 쿤스 작품들.
풍선 모양의 튤립 7송이를 부풀린 제프 쿤스의 ‘튤립’과 대표 작품들을 여럿 볼 수 있다. 앤디 워홀, 신디 셔먼, 로이 리히텐슈타인, 키스 헤링, 장 미셸 바스키아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스타 작가들의 작품들로 가득 차있다.
'더 브로드 뮤지엄'의 내부 공간.
'더 브로드 뮤지엄'의 내부 공간.
더 브로드 미술관의 건너편엔 1979년 개관한 LA의 또다른 명품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MOCA)’가 있다. 잭슨 폴락에서 몬드리안, 크래스 올덴버그 등 194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를 한눈에 볼 수 있다.

UCLA 지성과 호흡하는 해머와 LACMA

UCLA 캠퍼스와 함께 LA베버리힐스 지역의 명소는 해머미술관이다. 사업가 아먼드 해머(1898~1990)가 사망한 해에 개관한 개인 미술관인데 1994년부터 UCLA가 운영을 맡고 있다. 해머미술관은 1년에 300회가 넘는 수많은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미술관이라고 하기엔 ‘지성의 보고’와 같은 곳. 강연과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독서회, 심포지엄, 영화상영, 음악회와 같은 이벤트가 무료로 펼쳐진다.
UCLA 부속 미술관인 해머뮤지엄. 신예 작가들을 발굴하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UCLA 부속 미술관인 해머뮤지엄. 신예 작가들을 발굴하는 미술관으로 유명하다.
해머미술관은 50% 이상의 전시를 여성 작가에게 할애하고, 해외 작가나 지역 작가 등을 발굴해 예술계 신예들을 키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부터 LA지역 예술가들을 위한 비엔날레 ‘Made in L.A.’를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해머미술관은 LA도심과는 떨어진 대학가의 분위기를 머금고 있다. 미술관 정원과 레스토랑, 마당에 놓인 토마스 헤더윅의 ‘스펀 체어’ 등에 편히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현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다.
LA아트투어-해머미술관
LA아트투어-해머미술관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은 미 서부 최대의 주립미술관으로 해머와 다운타운의 중간쯤 위치한다. 소장품만 15만 점에 달하고 매년 160만 명이 찾는 ‘LA의 메트’.
LA아트투어- LACMA 뒤뜰에 설치된 마이클 하이저의 '공중에 뜬 돌'(Levitated Mass).
LA아트투어- LACMA 뒤뜰에 설치된 마이클 하이저의 '공중에 뜬 돌'(Levitated Mass).
2008년 LACMA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이 미술관은 주변에 늘어선 야자수와 붉은 띠로 둘러싸인 건축물로 우선 유명해졌다. 파리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의 작품. LACMA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컬렉션을 모은 전시장을 포함해 수 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미술관에 들어서지 않고도 감상할 수 있는 공공예술 작품들로도 이름났다. 340의 바위 덩어리를 공중에 띄운 마이클 하이저의 2012년 작품, 1920~30년대 LA시의 가로등 202개를 복원해 모아둔 크리스 버든의 ‘어반 라이트’,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의 12간지 조각상 등이 대표적이다.
LACMA-미술관 앞에 설치된 크리스 버든의 '어반 라이트'
LACMA-미술관 앞에 설치된 크리스 버든의 '어반 라이트'

일본 전통가옥이 왜 LA에서 나와?

LA외곽 산마리노에는 대규모의 정원 속 미술관과 도서관, 식물원이 어우러진 ‘헌팅턴라이브러리’가 있다. 산마리노라는 도시 자체가 헨리 헌팅턴(1850~1927)이라는 철도 재벌이 땅을 사서 개발한 지역이다.
LA 외곽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라이브러리&뮤지엄의 일본 정원.
LA 외곽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라이브러리&뮤지엄의 일본 정원.
미술관은 영국 18세기 초상화와 프랑스 18세기 가구, 20세기 초까지의 미국 미술이 핵심 소장품이다. 미술관 자리는 원래 헌팅턴의 저택이다가 그가 죽고 난 다음 해부터 일반에 공개됐다. 헌팅턴은 미술관보다 도서관으로 더 유명하다. 구텐베르크 성경, 링컨의 문서 등이100만 권이 넘는 희귀서적과 650만 개 넘는 희귀 원고가 보관돼 있다. 진본은 박사학위를 가진 전문가나 유명 인사로부터 추천서를 받아와야만 열람할 수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대부분 정원부터 찾는다. 대정원 안에 식물원과 사막정원, 일본 정원, 셰익스피어 정원 등 12개가 있다. 모두 둘러보려면 하루로는 부족하다. 헌팅턴엔 작년 10월 일본의 전통적인 쇼야 가옥이 새로 들어섰다. 8년에 걸친 협상과 건축을 거쳐 조경까지 완벽하게 지어진 이 집은 LA에 거주하는 일본인 아키라와 요코 요코이 부부가 기증했다고. 매일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만 개방되고, 화요일엔 문을 닫는다. LA=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