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77)초가집 봄맞이 한창…"이젠 일할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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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에 전통 계승 어려워 "노랗던 새도 산성비 탓에 거무튀튀"
제주엔 양반도 대부분 초가집 살이…조천에 기와집 많은 이유는?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
옛것이 주는 포근함과 정겨움이 있다.
돌담 사이로 난 올레 끝에 마주하는 초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가장 제주다운 것 중 하나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흙, 나무, 풀을 이용해 지은 초가집을 보면 산천초목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에 순응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새 베고 집줄 놓고 초가지붕 새단장
지난 1월 16일 제주성읍민속마을.
아침 일찍부터 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객주집'에서 '초가지붕 잇기'가 한창이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일반 농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의고을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술·음식을 팔았던 곳이다.
옛 제주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눈과 비바람으로 썩고 낡아 못 쓰게 된 해묵은 지붕을 걷어내자 초가집 속살이 드러났다.
이어 햇볕에 잘 말린 누런 '새'(억새풀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초가지붕 위에 두텁고 고르게 덮은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미리 꼬아둔 집줄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초가집의 특성상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집채) 등 한 집에 여러 건물이 별동으로 나뉘어 있어서 주민들은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성읍민속마을에는 이 같은 초가집이 400여동(棟)이나 된다.
이 중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초가는 객주집과 고평오 고택, 대장간 등 5동이다.
초가지붕잇기는 1월부터 시작해 3∼4월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전통적인 봄맞이 행사다.
강한 제주의 비바람으로부터 집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첫 단추를 채우는 작업과 같다.
제주의 초가집과 초가지붕잇기는 그 형태와 방식이 국내 다른 지역과 다소 다르다.
타 지역에서는 무엇보다 빗물이 지붕에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경사가 급한 삼각형 모양을 띠지만, 제주의 초가지붕은 빗물보다도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에도 잘 견뎌야 했기 때문에 완만한 경사의 둥근 형태다.
또 논이 흔한 육지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생긴 볏짚을 초가지붕 덮는 재료로 쓰지만, 제주에선 '새'를 썼다.
논이 드물어 볏짚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밭에서도 구할 수 있는 억새풀의 일종인 새를 이용했다.
새는 볏짚만큼이나 열전도율이 낮아 여름에는 뜨거운 공기를 차단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기운을 막는 단열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새를 따로 키우는 별도의 밭인 '새왓'(띠밭)을 조성하고 있다.
곡식 농사를 지을 밭도 모자랄 판에 초가지붕에 덮을 '새'를 따로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초가지붕잇기'가 제주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임을 의미한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초가장인 강임용(76) 선생은 "동지(양력 12월 22∼23일 무렵)가 되면 푸른색의 새가 이렇게 노랗게 변한다"며 "잘 익은 새를 베어다가 (초가지붕잇기) 재료로 쓴다"고 설명했다.
그는 "누렇게 되기 전 푸른 색의 새를 베어다가 쓰면 빨리 썩고 벌레가 꼬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요즘에는 환경오염에 산성비 탓인지 새가 샛노랗게 익지 않고 거무튀튀한 색을 띠어 양질의 새를 구하기 힘들다"며 "제주시나 대정 지역 초가지붕잇기는 2년에 한 번씩 하던 걸 이제는 1년마다 한다"고 말했다.
성읍민속마을에선 습한 기후 탓에 지붕이 상하는 속도가 빨라 해마다 작업을 했던 반면, 다른 지역에선 2년 주기로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문제로 인해 양질의 새를 구하기 쉽지 않아 교체 주기가 빨라졌다는 설명이다.
새를 베고 난 뒤에는 초가집을 얽어매는 줄인 '집줄'을 만들어야 한다.
집줄은 길이가 짧은 새인 '각단'으로 만든다.
'호렝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각단을 꼬아 길게 한 갈래의 줄을 만들고, 다시 줄 두 개를 한데 엮어 더 굵고 튼튼하게 집줄을 만든다.
한 갈래의 줄을 만드는 걸 제주에선 '집줄 놓는다'고 표현하고, 두 갈래의 줄을 엮는 것을 '집줄 어울린다'고 말한다.
3㎝ 남짓한 두꺼운 집줄을 사용해 지붕을 단단히 고정하면 웬만한 제주의 강풍에도 끄떡없이 1∼2년을 견딜 수 있었다.
이처럼 해마다 밭에서 새를 재배해 수확하고, 집줄을 만들어 초가지붕을 잇는 작업을 하는 건 한 가정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 구성원이 힘을 모아 함께 하는 작업으로, 제주에선 '수눌음 정신'이라 말한다.
하지만 제주에선 성읍민속마을, 제주민속촌 등을 제외하면 일반 민가에서 초가집은 자취를 감춰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게다가 집줄을 만들고 지붕을 이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숙련된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강임용 선생은 "어릴 적엔 동네 어른들 일하는 걸 쫓아디니면서 보고 배웠지만 지금은 그런 환경도 아니고 시대가 변했다"고 한탄했다.
그는 "가장 문제가 집줄 놓을 사람이 없다.
과거 남자가 하던 일이었는데 인건비 문제로 여자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제 젊은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하고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노인이 돼버렸다"며 "고령화가 더 진행되면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말했다.
◇ 제주에 기와집은 0.5%도 안돼
제주의 초가집에 대해 알아보는 김에 잠시 제주의 기와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주의 전통가옥은 초가집이었다.
양반도, 부자도 대부분 초가를 지어 살았고, 극히 일부만이 기와집에서 살았다.
기와집은 얼마나 있었을까.
기와는 지붕을 덮기 위해 점토를 틀에 넣어 일정한 모양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건축재다.
볏짚이나 새 등은 내구성이 좋지 않아 1∼2년이 지나면 교체해야 하지만 기와는 내구성과 방수성이 좋아 반영구적이다.
예부터 기와는 국가 시설이나 종교 시설, 고관대작 등 일부 개인들의 집에만 쓸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지붕을 덮는 기본 기능 외에도 건물의 경관과 치장 등에 사용돼 국가권력과 문화 수준, 부귀와 권세를 상징했다.
중죄인만이 유배돼 가는 '창살 없는 감옥'인 제주는 국가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1520년 제주로 유배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정(金淨)은 자신의 저서 '제주풍토록'에서 "(제주의) 가옥은 기와집이 거의 드물어 정의현과 대정현의 관사도 띠(새)로 지붕을 덮었다"고 기록했다.
조선 말엽인 1904년 1월 제주목과 대정·정의현의 호적상 집의 수와 식구 수, 집의 형태 등을 기록한 '삼군호구가간존안책'(三郡戶口家間存案冊)은 당시 제주에 총 5만1천355칸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초가집은 5만1천118칸, 기와집은 237칸이었다.
제주 전체 가옥에서 기와집이 차지하는 비중은 0.46%에 불과했다.
으리으리한 궁궐과 저택이 있던 조선의 수도 한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다.
도내 171개 마을 중 기와집이 있던 마을은 14개 마을로 가장 많은 곳은 조천리 61칸, 삼도동 57칸, 일도동 41칸, 함덕리 15칸, 북촌리 13칸 등이었다.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의 중심지로서 제주목(濟州牧) 관아 관리들과 양반들이 주로 살았던 삼도동과 일도동에 기와집이 가장 많을 것이란 예상과 다른 결과다.
어째서 조천에 가장 많은 기와집이 존재했던 것일까.
제주의 역사, 문화, 자연을 담은 책 '신비 섬 제주 유산'의 저자 고진숙은 조천포구와 연북정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조천포구는 과거 조선의 해상 관문으로,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드나들고 진상품이 오가던 중요한 항구였다.
조천포구 앞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은 제주에 파견된 관리나 유배된 사람들이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진 정자다.
머나먼 제주로 파견된 관리들이나 유배자들은 시설이 낙후됐을 뿐 아니라 음식도 문화도, 환경도 다른 제주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길 임금을 향해 간절히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고진숙은 책에서 "연북정에 올라가 울부짖고 싶은 그들을 돌본 사람들이 조천에 사는 김해 김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또를 잘 모신 덕에 출륙금지령(조선 중기 제주도민들이 제주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한 정책)의 최대수혜자로서 온갖 이권도 챙기며 한양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아닐지라도 번듯한 기와집을 줄줄이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이 조천에 기와집이 가장 많이 생긴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 이 기사는 '제주생활사'(고광민, 한그루, 2016), '제주 사람들의 삶과 언어'(김순자, 한그루, 2018), '신비 섬 제주 유산'(고진숙, 블랙피쉬, 2023), 제주지역 기와가마와 생산·수급체계(엄기일, 2020) 등 책자와 논문을 인용·참고하고 현장 취재를 거쳐 제주의 전통 가옥을 소개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
제주엔 양반도 대부분 초가집 살이…조천에 기와집 많은 이유는?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
옛것이 주는 포근함과 정겨움이 있다.
돌담 사이로 난 올레 끝에 마주하는 초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가장 제주다운 것 중 하나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흙, 나무, 풀을 이용해 지은 초가집을 보면 산천초목뿐만 아니라 사람도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자연에 순응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제주의 가옥과 마을, 그 속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3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 새 베고 집줄 놓고 초가지붕 새단장
지난 1월 16일 제주성읍민속마을.
아침 일찍부터 국가민속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객주집'에서 '초가지붕 잇기'가 한창이었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집은 일반 농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정의고을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어 나그네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거나 술·음식을 팔았던 곳이다.
옛 제주 전통가옥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마을주민들이 눈과 비바람으로 썩고 낡아 못 쓰게 된 해묵은 지붕을 걷어내자 초가집 속살이 드러났다.
이어 햇볕에 잘 말린 누런 '새'(억새풀의 일종인 '띠'를 뜻하는 제주어)를 초가지붕 위에 두텁고 고르게 덮은 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미리 꼬아둔 집줄을 이용해 바둑판 모양으로 단단히 고정했다.
초가집의 특성상 마당을 중심으로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모커리(안거리와 밖거리 사이에 가로 높인 집채) 등 한 집에 여러 건물이 별동으로 나뉘어 있어서 주민들은 쉴 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성읍민속마을에는 이 같은 초가집이 400여동(棟)이나 된다.
이 중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초가는 객주집과 고평오 고택, 대장간 등 5동이다.
초가지붕잇기는 1월부터 시작해 3∼4월까지 이어지는 제주의 전통적인 봄맞이 행사다.
강한 제주의 비바람으로부터 집과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첫 단추를 채우는 작업과 같다.
제주의 초가집과 초가지붕잇기는 그 형태와 방식이 국내 다른 지역과 다소 다르다.
타 지역에서는 무엇보다 빗물이 지붕에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해 경사가 급한 삼각형 모양을 띠지만, 제주의 초가지붕은 빗물보다도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에도 잘 견뎌야 했기 때문에 완만한 경사의 둥근 형태다.
또 논이 흔한 육지에서는 가을 추수가 끝나고 생긴 볏짚을 초가지붕 덮는 재료로 쓰지만, 제주에선 '새'를 썼다.
논이 드물어 볏짚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밭에서도 구할 수 있는 억새풀의 일종인 새를 이용했다.
새는 볏짚만큼이나 열전도율이 낮아 여름에는 뜨거운 공기를 차단하고, 겨울에는 차가운 기운을 막는 단열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제주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새를 따로 키우는 별도의 밭인 '새왓'(띠밭)을 조성하고 있다.
곡식 농사를 지을 밭도 모자랄 판에 초가지붕에 덮을 '새'를 따로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초가지붕잇기'가 제주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임을 의미한다.
제주도 무형문화재 제19호 초가장인 강임용(76) 선생은 "동지(양력 12월 22∼23일 무렵)가 되면 푸른색의 새가 이렇게 노랗게 변한다"며 "잘 익은 새를 베어다가 (초가지붕잇기) 재료로 쓴다"고 설명했다.
그는 "누렇게 되기 전 푸른 색의 새를 베어다가 쓰면 빨리 썩고 벌레가 꼬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아 제 역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요즘에는 환경오염에 산성비 탓인지 새가 샛노랗게 익지 않고 거무튀튀한 색을 띠어 양질의 새를 구하기 힘들다"며 "제주시나 대정 지역 초가지붕잇기는 2년에 한 번씩 하던 걸 이제는 1년마다 한다"고 말했다.
성읍민속마을에선 습한 기후 탓에 지붕이 상하는 속도가 빨라 해마다 작업을 했던 반면, 다른 지역에선 2년 주기로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문제로 인해 양질의 새를 구하기 쉽지 않아 교체 주기가 빨라졌다는 설명이다.
새를 베고 난 뒤에는 초가집을 얽어매는 줄인 '집줄'을 만들어야 한다.
집줄은 길이가 짧은 새인 '각단'으로 만든다.
'호렝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각단을 꼬아 길게 한 갈래의 줄을 만들고, 다시 줄 두 개를 한데 엮어 더 굵고 튼튼하게 집줄을 만든다.
한 갈래의 줄을 만드는 걸 제주에선 '집줄 놓는다'고 표현하고, 두 갈래의 줄을 엮는 것을 '집줄 어울린다'고 말한다.
3㎝ 남짓한 두꺼운 집줄을 사용해 지붕을 단단히 고정하면 웬만한 제주의 강풍에도 끄떡없이 1∼2년을 견딜 수 있었다.
이처럼 해마다 밭에서 새를 재배해 수확하고, 집줄을 만들어 초가지붕을 잇는 작업을 하는 건 한 가정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었다.
마을 전체 구성원이 힘을 모아 함께 하는 작업으로, 제주에선 '수눌음 정신'이라 말한다.
하지만 제주에선 성읍민속마을, 제주민속촌 등을 제외하면 일반 민가에서 초가집은 자취를 감춰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됐다.
게다가 집줄을 만들고 지붕을 이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숙련된 사람을 구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다.
강임용 선생은 "어릴 적엔 동네 어른들 일하는 걸 쫓아디니면서 보고 배웠지만 지금은 그런 환경도 아니고 시대가 변했다"고 한탄했다.
그는 "가장 문제가 집줄 놓을 사람이 없다.
과거 남자가 하던 일이었는데 인건비 문제로 여자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제 젊은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하고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노인이 돼버렸다"며 "고령화가 더 진행되면 앞으로가 더 문제"라고 말했다.
◇ 제주에 기와집은 0.5%도 안돼
제주의 초가집에 대해 알아보는 김에 잠시 제주의 기와집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제주의 전통가옥은 초가집이었다.
양반도, 부자도 대부분 초가를 지어 살았고, 극히 일부만이 기와집에서 살았다.
기와집은 얼마나 있었을까.
기와는 지붕을 덮기 위해 점토를 틀에 넣어 일정한 모양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건축재다.
볏짚이나 새 등은 내구성이 좋지 않아 1∼2년이 지나면 교체해야 하지만 기와는 내구성과 방수성이 좋아 반영구적이다.
예부터 기와는 국가 시설이나 종교 시설, 고관대작 등 일부 개인들의 집에만 쓸 수 있는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지붕을 덮는 기본 기능 외에도 건물의 경관과 치장 등에 사용돼 국가권력과 문화 수준, 부귀와 권세를 상징했다.
중죄인만이 유배돼 가는 '창살 없는 감옥'인 제주는 국가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1520년 제주로 유배 온 조선 중기 문신 김정(金淨)은 자신의 저서 '제주풍토록'에서 "(제주의) 가옥은 기와집이 거의 드물어 정의현과 대정현의 관사도 띠(새)로 지붕을 덮었다"고 기록했다.
조선 말엽인 1904년 1월 제주목과 대정·정의현의 호적상 집의 수와 식구 수, 집의 형태 등을 기록한 '삼군호구가간존안책'(三郡戶口家間存案冊)은 당시 제주에 총 5만1천355칸의 가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초가집은 5만1천118칸, 기와집은 237칸이었다.
제주 전체 가옥에서 기와집이 차지하는 비중은 0.46%에 불과했다.
으리으리한 궁궐과 저택이 있던 조선의 수도 한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모습이다.
도내 171개 마을 중 기와집이 있던 마을은 14개 마을로 가장 많은 곳은 조천리 61칸, 삼도동 57칸, 일도동 41칸, 함덕리 15칸, 북촌리 13칸 등이었다.
탐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의 중심지로서 제주목(濟州牧) 관아 관리들과 양반들이 주로 살았던 삼도동과 일도동에 기와집이 가장 많을 것이란 예상과 다른 결과다.
어째서 조천에 가장 많은 기와집이 존재했던 것일까.
제주의 역사, 문화, 자연을 담은 책 '신비 섬 제주 유산'의 저자 고진숙은 조천포구와 연북정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조천포구는 과거 조선의 해상 관문으로,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드나들고 진상품이 오가던 중요한 항구였다.
조천포구 앞에 있는 연북정(戀北亭)은 제주에 파견된 관리나 유배된 사람들이 '북쪽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진 정자다.
머나먼 제주로 파견된 관리들이나 유배자들은 시설이 낙후됐을 뿐 아니라 음식도 문화도, 환경도 다른 제주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길 임금을 향해 간절히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고진숙은 책에서 "연북정에 올라가 울부짖고 싶은 그들을 돌본 사람들이 조천에 사는 김해 김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또를 잘 모신 덕에 출륙금지령(조선 중기 제주도민들이 제주 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한 정책)의 최대수혜자로서 온갖 이권도 챙기며 한양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아닐지라도 번듯한 기와집을 줄줄이 지을 수 있었다.
그것이 조천에 기와집이 가장 많이 생긴 이유다"라고 설명한다.
[※ 이 기사는 '제주생활사'(고광민, 한그루, 2016), '제주 사람들의 삶과 언어'(김순자, 한그루, 2018), '신비 섬 제주 유산'(고진숙, 블랙피쉬, 2023), 제주지역 기와가마와 생산·수급체계(엄기일, 2020) 등 책자와 논문을 인용·참고하고 현장 취재를 거쳐 제주의 전통 가옥을 소개한 것입니다.
]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