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연립 다세대 주택 단지 모습. 사진=뉴스1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연립 다세대 주택 단지 모습. 사진=뉴스1
지난해 전국을 달궜던 전세사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한풀 꺾였지만, 피해자들이 여전히 고통 속에 지내고 있다. 특히 사회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전세사기라는 큰 짐을 짊어지게 된 2030 청년들은 주변에 피해 사실을 적극 알리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며 화를 삼키고 있었다.

대전 다가구주택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본 박모씨(28)는 보증금을 모두 날리고 살던 집에서도 맨몸으로 쫓겨날 처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박씨는 2022년 대전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며 석사 과정 2년 동안 지낼 전셋집을 인근에서 구했다.

집을 구할 당시 지역 공인중개사는 다가구주택 원룸을 박씨에게 보여주며 "집을 여러 채 가진 부자 소유라 안전한 매물"이라고 설명했다. 집주인도 선뜻 도배를 새로 하고 가구도 바꿔줬다. 박씨는 중개사의 말을 믿고 보증금 9000만원에 전세 계약을 체결했다.

2년이 지나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는 아직 대전 전셋집에 머물고 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지난해 건물 전체가 12억원에 경매로 넘어간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경매가 두 번만 유찰되어도 보증금은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날 것"이라고 토로했다.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가 받은 법원의 경매 통지서.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가 받은 법원의 경매 통지서.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박씨는 정부의 지원책이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우선매수권을 넘겨받아 매입하고 임대주택으로 제공한다고 하지만, 그의 전셋집은 1층에 상가가 있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집에서 쫓겨난 피해자들에게 임대주택이 제공되지만, 사기 피해지역 인근으로 제한된다. 박씨와 같이 대전에서 피해를 당하고 서울로 옮겨갈 계획이라면 아무 지원을 받을 수 없다.

취업준비에 나선 박씨는 향후 20년에 걸쳐 보증금 대출을 상환할 계획이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박씨 대신 은행에 대출을 갚고, 박씨가 20년 무이자로 HUG에 상환하는 방식이다. 박씨는 "앞으로 20년에 걸쳐 빚을 갚아야 한다"며 "부모님은 모른다. 그간 등록금을 대주신 부모님께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손 벌릴 생각도 없다. 부담되더라도 내가 안고 갈 것"이라고 했다.

피해 함구하는 피해자들…"가족 걱정·주변 눈총 싫어"

서울 관악구 오피스텔 원룸에 사는 이모씨(29)는 최근 자신이 사는 오피스텔을 낙찰받았다. 이른 나이에 집주인이 됐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떼인 보증금 대신이기 때문이다. 최씨는 "나에게 남은 방법은 이것뿐"이라며 흐느꼈다.

지방 출신인 이씨는 대학에 진학하며 서울로 상경했다. 취업 후에도 대학가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월급을 모았고, 2021년 역세권 신축 전셋집으로 옮겨갔다. 은행 대출만 2억원이 넘었지만, 이자 부담이 월세보다는 저렴했다. 주거비를 줄이면서 살기 좋은 신축 오피스텔로 옮겼기에 스스로 대견함도 느꼈다.

지난해 2년 계약 만기가 다가왔지만, 집주인도, 중개사무소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뒤늦게 전세 사기임을 깨달은 이씨는 피해자 단톡방과 서울시 전·월세 종합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아 강제경매를 신청했다. 그렇게 나온 오피스텔의 감정가는 2억원, 은행 대출보다도 적은 액수였다.

그는 "그래도 서울 역세권 신축 오피스텔이니 경매로 보증금을 모두 받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며 "감정가가 대출보다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내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부터 사흘 정도는 울면서 지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때부터 이씨에겐 전세 사기 피해자에 대한 온라인상의 조롱과 비난이 칼날이 되어 다가왔다. 그는 "피해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더는 그러한 비난을 버틸 수 없었다"며 "스스로 죄인이 된 기분에 점점 움츠러들었다"고 토로했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경매법원에서 경매 참가자가 매물 목록을 확인하고 있다. /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경매법원에서 경매 참가자가 매물 목록을 확인하고 있다. / 사진=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이씨는 낙찰받은 오피스텔에 거주하다 가격이 오르면 처분할 계획이다. 그는 "언제쯤 집값이 오를까 싶다. 눈앞이 캄캄하다"고 자조했다. 그도 전세 사기 피해를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이씨는 "전세 사기 뉴스가 워낙 많이 나오니 부모님이 괜찮냐고 전화하셨다"며 "걱정 끼치기 싫어 괜찮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서울의 좋은 대학에 갔다고 기뻐하던 부모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냥 똑똑하고 야무진 딸로 남아있고 싶다"며 "부모님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이씨는 이번 설 명절을 서울에서 보낼 계획이다. 그는 "아직 가족들 얼굴을 직접 보면서 밝게 웃을 자신은 없다. 이번 설에는 회사 일이 바쁘다 하고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62% 피해 사실 함구…"주변 걱정 끼치기 싫다"

20대와 30대가 주류인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사기를 당했는데, '멍청해서 속았다'는 사회적 비난까지 쏟아지니 하소연도 못 하고 속으로만 앓는 것이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1월 4일 기준 전국의 전세 사기 피해자 인정 건수는 1만944건이다. 인정받은 피해자의 73%는 20∼30대다. 30대가 48.2%로 가장 많고, 20대(24.8%), 40대(15.7%)가 뒤를 이었다.

민주연구원이 전세 사기 피해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피해자의 62.3%는 주변에 피해를 알리기 어려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피해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사회적 시선'과 '부모님 및 지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많았다.

한 사례자는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에서 자기가 깡통전세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왜 계약을 했느냐며 다그쳤다. 나도 많이 알아보고 한 건데, 실제론 도와준 것도 없으면서 어리석다는 취급을 하니 크게 상처받았다"고 말했다. 다른 사례자도 "친구들에게 굳이 얘기해 분위기만 싸해졌다.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것도 없으니 얘기할 필요도 없다"고 토로했다.

전세 사기 피해자들은 혼자 속앓이만 하다가 신체 건강(81.1%)과 정신 건강(96.4%) 악화를 경험했다. 신체적 문제로는 수면장애(34.3%), 위장장애(16.6%)가, 정신적 문제로는 우울증(35.6%), 불안장애(22.1%) 응답이 많았다.

민주연구원은 "피해 가구 다수가 사회적 편견 때문에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쳐 있다"며 "사회적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들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