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박솔뫼는 그보다 80여 년 앞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소설가 김말봉의 단편소설 <망명녀>를 읽고 단편소설 <기도를 위하여>를 썼다.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기도를 위하여—김말봉과 박솔뫼>에는 김말봉의 작품 세 편, 그리고 박솔뫼의 작품과 에세이가 한 편씩 나란히 수록돼 있다.
가벼운 가방에서 비롯된 이야기
김말봉의 소설 <망명녀>에는 명월관에서 기생으로 일하던 순애, 순애를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 윤숙, 윤숙의 애인이자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사회 변혁을 꿈꾸는 윤정섭이 등장한다.

“너는 모든 과거를 짓밟아버려야 한다. 말살해버려라. 흑암의 생활에서 지내온 것은 흉내라도 내지 말아라, 응?”

윤숙은 모르핀에 중독된 순애를 타이르고 살뜰히 살피며 순애가 현실에 다시 잘 안착하도록 돕는데, 윤숙이 순애의 담배와 주사를 숨기면서까지 도울 때는 잘 극복되지 않던 순애의 중독 증세가 윤정섭과 함께 공부를 하며 눈에 띄게 좋아진다. 결국 순애는 윤정섭과의 사랑을 키워 나가기 시작하고, 그런 순애를 바라보며 윤숙은 “네가 윤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상도 싶다.”며 둘의 관계를 축복하기로 한다.

마침내 혼인의 날이 다다랐다. 순애는 윤정섭에게 도착한 편지를 어깨 너머로 들여다보다가 편지에 숨겨진 암호가 윤정섭이 이틀 뒤 동지에게 모포 속의 물건을 전해야 한다는 지령임을 알아챈다. 순애는 윤정섭 대신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자동차에 오른다. 윤숙에게는 행복을, 윤정섭에게는 동지됨을 마지막으로 기원하고 약속하면서.

박솔뫼는 <기도를 위하여> 세 인물과 더불어 김말봉을 등장시킨다. 순애는 윤정섭의 임무를 대신 수행하다가 운명을 달리하고, 윤정섭과 윤숙은 전과 같은 애인 사이라기보다는 여동생을 먼저 떠나보낸 오누이 같은 관계가 되어 한집에 산다. 순애의 영혼은 때때로 그들을 찾아왔다가 사라지고, 이들 셋의 이야기 사이사이 김말봉의 삶이 적혀 있다. 그리고 아주 잠깐씩, 부산에서 생활했던 김말봉의 일상을 상상하는 박솔뫼의 흔적이 얼굴을 든다.

“김말봉이 졸업한 학교는 서울 정신여학교로 알려졌다. 그러나 김말봉은 부산 부산진일신여학교에서 3년을 수료한 후 서울로 가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실제로 오래 다녔던 곳은 부산의 부산진일신여학교이다. (……) 김말봉은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동래로 이전한 일신여학교를 찾아보았을까 아니면 좌천의 일산여학교를 찾아가 남아 있는 선생님들과 동래로 옮긴 학교 이야기를 하였을까. 언덕은 가파르지만 두 붉은 건물은 나를 지표로 삼아 찾아와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문장의 나아감에 따라 80여 년 전부터 작가 활동을 시작했을 김말봉은 윤숙과 윤정섭, 순애처럼 종이 위에만 사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가, 거꾸로 소설 속 세 사람이 김말봉처럼 한 세기 전 서울과 교토 어딘가를 실제로 오갔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는데, 이 감각의 끝없는 전환은 아마 모두 박솔뫼의 가벼운 가방에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사람이 아니니 마음만 먹으면 정말로 자신을 어디든 따라올 수” 있을 순애는 집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윤숙에게 자신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가 달라고 농담인 듯 진담인 듯한 말을 건네지만 윤숙은 다음 날 아침, 가방을 챙겨 내내 혼자였던 것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산으로 떠난다. “자신을 보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 윤숙에게는 편했”기 때문에. 고이 접어 가방 안에 넣고 챙겨올 수도 있었을 순애를 두고, 윤숙은 어쩌면 윤이 순애를 가방에 넣어 일본에 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어쩌면 순애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거나 일본어를 금세 익혀 새로운 생활에 금세 적응했다거나 하는 생각들로 금세 위치를 옮긴다. 그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나는 가방에 이들을 접어 넣어 가지고 올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렇게 가벼워진, 아니 본래 가벼웠던 가방을 들고 박솔뫼가 써내는 끝없는 이야기가 늘 새롭게 좋다. 생각은 자유롭게 과거와 현재를 오갈 수 있고, 그렇게 김말봉과 윤숙, 윤정섭과 순애는 같은 세계에 속하게 된다. 일단 같은 세계에 속한 다음부터는 그들끼리 서로 마주치고 대화하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