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있다"…독일 유학파 임동식 화가가 숲속에서 작업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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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작가들의 별난 아틀리에
멋진 경치에 대한 최고의 칭찬은 ‘그림 같다’는 탄성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경치에서 ‘아, 저 풍경은 마치 임동식의 작품 같다’라는 생각을 한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지만, 자연 또한 예술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 화가가 임동식이다. 그는 충남 공주에서 ‘친구가 권유한 풍경’을 그리거나, 자신이 자연과 교감했던 과거의 장면들을 기억해 그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몇 해 전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등 굵직한 공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지만, 그것은 그의 나이 칠십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화가의 작업실은 흔히 작업과 닮아 있다. 글을 쓰는 작가는 카페의 좁은 구석에서도 대작을 완성할 수 있지만, 화가에게는 적어도 그리고 싶은 너비와 높이만큼의 화판을 둘 공간이 필요하다. 또한 작업의 내용에 따라 온갖 너절한 것들을 주워 쌓아 놓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캔버스와 팔레트, 붓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두지 않는 작업실도 있다. 그곳이 먹고 자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이어도 말이다. 화가 임동식의 작업실은 후자에 가깝다.
눈 내리는 겨울 어느날 공주 교동 좁은 골목길의 안쪽에 위치한 대문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이 집에는 화가 임동식과 그의 친구 ‘우평남 화백’(인용 부호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하겠다)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좁고 넓은 네 방에는 언제나처럼 막 시작한 작품과 곧 끝나갈 작품들이 펼쳐져 있다. 현재의 작업실인 공주 교동 작업실은 아마도 임동식 인생의 끝까지 함께 할 작업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작업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2007년 맨 처음 방문했던 작업실, 그리고 더 이전에 직접 지어 살았던 작업실을 회고할 수밖에 없다. 공주 안에서 이리 저리 움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작업실의 변화가 작품의 역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1945년생인 임동식이 예순을 넘기던 시절의 작업실은 공주 신관동 구(舊) 버스터미널의 건물 4층에 있는 작은 원룸이었다. 2007년 당시 대전시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이었던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전시 작품을 고르기 위한 목적으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임동식의 작업실에 드나들었다. 작업실은 너무 좁아 두 사람이 서 있어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화장실 입구와 현관이 있는 면을 제외한 나머지 사면에 수많은 캔버스들이 기대어 있었다. 또한 방의 온 천지에 크고 작게 새로 시작하거나 마무리되어가는 그림들이 있었다. 앉을만한 공간이 가운데 겨우 남아 있었다.
임동식의 작업실에는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안료에 테레빈이나 린시드같은 기름을 섞어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풍경을 주로 그리는 그는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화면을 보면 그 아래 그려진 것들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그려진 풍경화들에서는 그려진 나무와 숲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려 공기층을 표현하는 작업들이 많았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보면 임동식은 홍익대 졸업 십년 만에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그 이후에 공주 원골의 작업실에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십년을 거주했다. 옛날 원님이 살던 곳이라 원골이라는 지명이 붙은 그 곳에, 30평 정도의 임시가건물로 작업실 겸 거주지를 직접 만든 곳이었다. 그곳을 방문했던 이들의 입을 빌자면, 대문을 쾅 닫으면 합판으로 조성된 집 전체가 흔들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대해 임동식은 ‘1993년 봄, 공주시 신풍면 원골마을 입주, 감나무 숲으로 둘러 쌓인 터에 맨손으로 손수 지은 작업장 25평, 터 잡기부터 시작하여 건물골조(지붕공사, 벽면처리, 내장공사, 배수로), 화단공사, 뱀이나 쥐에 대한 신경쓰기, 여름에 모기, 파리 대책, 겨울의 온돌방에 매일 군불때기, 즉 인간생존의 1차 문제를 공부하다.’라고 기록한 바 있다. ‘나홀로 목수되기’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이 시절, 봄에는 수선화를 키우고, 어미 잃은 아기 토끼를 집안에 들여 먹이를 주고 이불을 쌓아 토끼 운동코스를 만드는 등의 일을 작업과 병행한다. 예컨대, 1993년 ‘어미 잃은 산토끼와 생활’에 대한 임동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93. 9 ~ 1994. 5(8개월간)
어미 잃은 산토끼 두 마리 방안에서 키우기
-젖 먹이기
-옷속, 몸속에 집어넣어 어미 체온 비슷한 느낌 받게 하기
-침대 옆에 재우기
-뛰어놀게 작업장 바닥에 방석, 담요, 옷 등을 이용, 운동코스 만들기
(상시-미끄럼 방지)
-성장 후 토끼풀 등 온갖 풀 먹이 조달
-두마리 산토끼와의 대화’ 1)
봄이 되어 어느 정도 자란 녀석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나서는, 토끼들에 대한 그리움을 퍼포먼스를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 작업들은 그야말로 원골의 작업실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들이다.2)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던 임동식은 왜 서울이 아닌 공주에 자리를 잡았을까? 지방자치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까지도 문화예술은 아무래도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야 말로 서울 어느 다방에서 했던 이십대들의 전시는 미술사에 기록이 되어도, 지방의 굵직한 작가들이 활동을 하는지 안하는지 기척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 미술계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그가 공주에 정착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향인 충남 연기군이 지척이라 친근한 탓도 있겠지만, ‘자연’이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까닭일 것이다. 당시에는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외면을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예술이 있다고 생각했다.
1990년 초에 독일에서 돌아온 후 그는 붓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독일에서 자연 속에서 하는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를 했지만, 다시 붓을 잡고자 했을 때 무슨 일인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현방식이 다른 미술의 형식에 오래 몰두하다보니, 흰 캔버스가 낯설고 붓질은 예전같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원골 작업실 시절의 임동식에게 동갑내기 친구 우평남의 등장은 인생의 새로운 장(章)은 선물한다. “친구는 미대를 나왔다면서 왜 그림을 안 그리는가, 나라면 그림을 그리겠다”라고 독려하는 한편, 운전을 못하는 임동식을 차에 태우고 다니며 ‘나라면 이것을 그리겠다’라고 권유해 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이다. 바로 그 친구 우평남이 원골을 나와 신관동 원룸에 이르기까지 이리 저리 작업실을 이사다니고 있던 임동식에게, 자신이 직접 지은 공주 교동의 집을 작업실로 내 준 것이다. 현재의 임동식 작업실은 다시 그림 그리기를 권유한 친구 우평남의 부모와 팔남매가 살았던 장소이다. 그 집을 고쳐서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임동식의 작업실은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임동식은 풍경을 권유했던 친구 우평남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하여 상당한 양의 작업이 쌓였으며, 임동식의 주선으로 전시를 하기에 이른다. 임동식은 그 작업실에 친구의 이름을 먼저 내세워 나무 현판에 “자연예술가 우평남의 집”이라 쓰고 그 아래 작게 “임동식 공주 교동 작업실”이라고 보일락 말락 하게 써 놓았다. 실제로는 임동식이 사용하고 있는 작업실이고, 친구 우평남이 작은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임동식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보다 친구의 이름을 더 크게 써 놓았다. 공주여중 앞 잘 닦인 도로변의 집들 사이 좁은 골목 끝,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장독과 화분들, 그리고 ‘ㄱ’자로 이루어진 황토벽 옛 집이 보인다. 앞서 했던 개인전과 현재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 작품이 많이 나가 있어서 새로운 작품들이 여러 점 시작되고 있었다. 작업실을 둘러보면서 이 작품, 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마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문득 두세 개를 이어 붙여 길게 만든 붓들이 눈에 띄었다. 햇살을 받은 풀잎의 투명함, 거친 나무 껍질의 질감, 촉촉한 봄비 한 방울,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한 송이를 세심하게 그린 그의 작품을 만들어낸 붓들이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이다. 붓 두 세 개를 이어서 길게 잡고 그리면 그 낭창거리는 끝을 잘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화면이 지향하는 바, 자연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는 붓을 길게 잡는다고 했다. 칠십대 후반이 된 자신의 손길과 그 손길의 의도를 전하는 붓이 더 자연에 가깝게 인위성을 제거하려면 툭 툭 얹어지는 붓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구가 권유한’ 풍경을 그리듯이, 붓이 놓이는 자리에 대한 자연적 여지를 담겠다는 것이다. 긴 붓대로 그리면 답답하지 않는가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작업 방식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세상이 달아나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허덕거리는 나의 일상 속에, 임동식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일은 언제나 삶의 근본을 환기시킨다. 이제 나이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더 하지 못하겠다는 핑계, 시간이나 자금이 부족하다는 변명이 난망해진다. 무엇이든 자세히 보기, 감정이입하거나 감탄하기, 작업하는 동안의 더딘 시간을 감당하기,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통과하기, 작업 말고는 관심 끊기. 그의 작업실에서 배운 것은 이런 태도들이다.
1)도록 <임동식 1975-2005>, 아르코 미술관, 2005, p.52
2)그는 공주 원골에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예술과 마을’ 전시(주민들은 이를 ‘축제’라고 불렀다고 한다)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임동식의 기획자로서의 활동은 이 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있으니, 이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
눈 내리는 겨울 어느날 공주 교동 좁은 골목길의 안쪽에 위치한 대문을 잠시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이 집에는 화가 임동식과 그의 친구 ‘우평남 화백’(인용 부호에 대한 설명은 추후에 하겠다)이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좁고 넓은 네 방에는 언제나처럼 막 시작한 작품과 곧 끝나갈 작품들이 펼쳐져 있다. 현재의 작업실인 공주 교동 작업실은 아마도 임동식 인생의 끝까지 함께 할 작업실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작업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2007년 맨 처음 방문했던 작업실, 그리고 더 이전에 직접 지어 살았던 작업실을 회고할 수밖에 없다. 공주 안에서 이리 저리 움직인 것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작업실의 변화가 작품의 역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1945년생인 임동식이 예순을 넘기던 시절의 작업실은 공주 신관동 구(舊) 버스터미널의 건물 4층에 있는 작은 원룸이었다. 2007년 당시 대전시립미술관의 학예실장이었던 나는 코앞으로 다가온 전시 작품을 고르기 위한 목적으로 일주일이 멀다 하고 임동식의 작업실에 드나들었다. 작업실은 너무 좁아 두 사람이 서 있어도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 화장실 입구와 현관이 있는 면을 제외한 나머지 사면에 수많은 캔버스들이 기대어 있었다. 또한 방의 온 천지에 크고 작게 새로 시작하거나 마무리되어가는 그림들이 있었다. 앉을만한 공간이 가운데 겨우 남아 있었다.
임동식의 작업실에는 유화 특유의 기름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안료에 테레빈이나 린시드같은 기름을 섞어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 풍경을 주로 그리는 그는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화면을 보면 그 아래 그려진 것들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그려진 풍경화들에서는 그려진 나무와 숲이 숨을 쉴 수 있도록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려 공기층을 표현하는 작업들이 많았다.
더 이전으로 올라가보면 임동식은 홍익대 졸업 십년 만에 독일 함부르크 미술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고, 그 이후에 공주 원골의 작업실에 1993년부터 2003년까지 십년을 거주했다. 옛날 원님이 살던 곳이라 원골이라는 지명이 붙은 그 곳에, 30평 정도의 임시가건물로 작업실 겸 거주지를 직접 만든 곳이었다. 그곳을 방문했던 이들의 입을 빌자면, 대문을 쾅 닫으면 합판으로 조성된 집 전체가 흔들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대해 임동식은 ‘1993년 봄, 공주시 신풍면 원골마을 입주, 감나무 숲으로 둘러 쌓인 터에 맨손으로 손수 지은 작업장 25평, 터 잡기부터 시작하여 건물골조(지붕공사, 벽면처리, 내장공사, 배수로), 화단공사, 뱀이나 쥐에 대한 신경쓰기, 여름에 모기, 파리 대책, 겨울의 온돌방에 매일 군불때기, 즉 인간생존의 1차 문제를 공부하다.’라고 기록한 바 있다. ‘나홀로 목수되기’라고 스스로 이름붙인 이 시절, 봄에는 수선화를 키우고, 어미 잃은 아기 토끼를 집안에 들여 먹이를 주고 이불을 쌓아 토끼 운동코스를 만드는 등의 일을 작업과 병행한다. 예컨대, 1993년 ‘어미 잃은 산토끼와 생활’에 대한 임동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93. 9 ~ 1994. 5(8개월간)
어미 잃은 산토끼 두 마리 방안에서 키우기
-젖 먹이기
-옷속, 몸속에 집어넣어 어미 체온 비슷한 느낌 받게 하기
-침대 옆에 재우기
-뛰어놀게 작업장 바닥에 방석, 담요, 옷 등을 이용, 운동코스 만들기
(상시-미끄럼 방지)
-성장 후 토끼풀 등 온갖 풀 먹이 조달
-두마리 산토끼와의 대화’ 1)
봄이 되어 어느 정도 자란 녀석들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나서는, 토끼들에 대한 그리움을 퍼포먼스를 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이 작업들은 그야말로 원골의 작업실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들이다.2)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독일 유학까지 다녀왔던 임동식은 왜 서울이 아닌 공주에 자리를 잡았을까? 지방자치제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지금까지도 문화예술은 아무래도 서울과 수도권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가 활동을 시작한 1970년대야 말로 서울 어느 다방에서 했던 이십대들의 전시는 미술사에 기록이 되어도, 지방의 굵직한 작가들이 활동을 하는지 안하는지 기척을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 미술계의 상황을 잘 알면서도 그가 공주에 정착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고향인 충남 연기군이 지척이라 친근한 탓도 있겠지만, ‘자연’이 그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까닭일 것이다. 당시에는 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인가 외면을 당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자연과 인간 사이에 예술이 있다고 생각했다.
1990년 초에 독일에서 돌아온 후 그는 붓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독일에서 자연 속에서 하는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를 했지만, 다시 붓을 잡고자 했을 때 무슨 일인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표현방식이 다른 미술의 형식에 오래 몰두하다보니, 흰 캔버스가 낯설고 붓질은 예전같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원골 작업실 시절의 임동식에게 동갑내기 친구 우평남의 등장은 인생의 새로운 장(章)은 선물한다. “친구는 미대를 나왔다면서 왜 그림을 안 그리는가, 나라면 그림을 그리겠다”라고 독려하는 한편, 운전을 못하는 임동식을 차에 태우고 다니며 ‘나라면 이것을 그리겠다’라고 권유해 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친구가 권유한 풍경’ 연작이다. 바로 그 친구 우평남이 원골을 나와 신관동 원룸에 이르기까지 이리 저리 작업실을 이사다니고 있던 임동식에게, 자신이 직접 지은 공주 교동의 집을 작업실로 내 준 것이다. 현재의 임동식 작업실은 다시 그림 그리기를 권유한 친구 우평남의 부모와 팔남매가 살았던 장소이다. 그 집을 고쳐서 작업실로 사용하면서 임동식의 작업실은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임동식은 풍경을 권유했던 친구 우평남에게 그림그리기를 권유하여 상당한 양의 작업이 쌓였으며, 임동식의 주선으로 전시를 하기에 이른다. 임동식은 그 작업실에 친구의 이름을 먼저 내세워 나무 현판에 “자연예술가 우평남의 집”이라 쓰고 그 아래 작게 “임동식 공주 교동 작업실”이라고 보일락 말락 하게 써 놓았다. 실제로는 임동식이 사용하고 있는 작업실이고, 친구 우평남이 작은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임동식은 이곳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기보다 친구의 이름을 더 크게 써 놓았다. 공주여중 앞 잘 닦인 도로변의 집들 사이 좁은 골목 끝,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장독과 화분들, 그리고 ‘ㄱ’자로 이루어진 황토벽 옛 집이 보인다. 앞서 했던 개인전과 현재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 작품이 많이 나가 있어서 새로운 작품들이 여러 점 시작되고 있었다. 작업실을 둘러보면서 이 작품, 저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아마 이전에도 있었겠지만) 문득 두세 개를 이어 붙여 길게 만든 붓들이 눈에 띄었다. 햇살을 받은 풀잎의 투명함, 거친 나무 껍질의 질감, 촉촉한 봄비 한 방울, 소리 없이 내리는 함박눈 한 송이를 세심하게 그린 그의 작품을 만들어낸 붓들이 테이프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이다. 붓 두 세 개를 이어서 길게 잡고 그리면 그 낭창거리는 끝을 잘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화면이 지향하는 바, 자연과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그는 붓을 길게 잡는다고 했다. 칠십대 후반이 된 자신의 손길과 그 손길의 의도를 전하는 붓이 더 자연에 가깝게 인위성을 제거하려면 툭 툭 얹어지는 붓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친구가 권유한’ 풍경을 그리듯이, 붓이 놓이는 자리에 대한 자연적 여지를 담겠다는 것이다. 긴 붓대로 그리면 답답하지 않는가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작업 방식을 음미해보고자 한다.
세상이 달아나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허덕거리는 나의 일상 속에, 임동식의 작업실을 방문하는 일은 언제나 삶의 근본을 환기시킨다. 이제 나이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더 하지 못하겠다는 핑계, 시간이나 자금이 부족하다는 변명이 난망해진다. 무엇이든 자세히 보기, 감정이입하거나 감탄하기, 작업하는 동안의 더딘 시간을 감당하기, 예측 불가능한 난관을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통과하기, 작업 말고는 관심 끊기. 그의 작업실에서 배운 것은 이런 태도들이다.
1)도록 <임동식 1975-2005>, 아르코 미술관, 2005, p.52
2)그는 공주 원골에서 인근 주민들과 함께 ‘예술과 마을’ 전시(주민들은 이를 ‘축제’라고 불렀다고 한다)를 기획하기도 했는데, 임동식의 기획자로서의 활동은 이 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쳐 있으니, 이는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