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 대한, 그래서 모든 사람을 위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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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심완선의 SF라는 세계
이하진,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
이하진,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
물리학자들은 모든 것에 대한 이론, 통칭 만물이론을 가정했다. Theory for Everything, 그야말로 모든 현상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꿈의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4대 힘인 전자기력, 중력, 강력, 약력이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된다. 그리고 물리학을 공부한 이하진 작가는 이론의 명칭에 주목했다. ‘for’는 흔히 ‘~을 위한’으로도 사용된다. 만물에 대한 이론은 만물을 위한 이론이 될 수 있다. 말장난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모든 사람을 설명하는 이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모두를 위한 이론일지도 모른다.
이하진의 SF 소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은 초능력과 같은 ‘이력(absurd force)’을 가정한다. 기존의 물리학 개념을 깨부수는 부조리한(absurd) 힘이다. 이력은 이론상 무엇이든 가능하다. 주인공 ‘미르’가 발현한 이력은 열을 옮기는 능력이다. 뜨거운 것을 시원하게,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미르는 눈짓 한 번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손쉽게 위반한다. 미르와 같은 ‘발현자’들은 통계적으로 인구의 10%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력에 감탄하며 발현자를 특별 취급한다. 다만 이력을 사용한 범죄 역시 급증한다. 힘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부조리한 세상의 이면이다. 더불어 이력으로 인한 재난과 불치병도 소설을 무겁게 만든다. 작중의 ‘희망을 모르는 세대’는 사망 소식을 듣는 데 익숙하다. 익숙하다 못해 무딘 채로 살아간다. 비극을 추모하는 일은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크리스마스의 비극’은 일어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계속하여 현재진행형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불치병을 얻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회복하길 기다리는 주변인이 있다. 사망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살아있다. 재난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고, 병의 치료법을 찾고, 아픔에 공감하며 슬픔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중은 싸늘하다. 많은 이가 자신이 겪는 비극은 슬퍼해도 남의 일에는 관심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추모 장소에 찾아가 유가족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앞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통인 사람들, 희망을 믿기는 어려워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누군가는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냐’는 말에 ‘그럼에도 한 번 더’로 답한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다고, 손을 놓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작중 미르는 자신과 절친한 ‘건’의 병을 치료하려 애쓴다. 건은 미르를 돕느라 병에 걸렸다. 건이 있기에 미르는 비극을 무관심하게 넘기지 못한다. 미르는 딱히 박애주의자가 아니지만, 남들에게도 자신처럼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게다가 건을 치료할 방법이 생긴다면 다른 이들도 치료받을 수 있다. 이력을 무효화하는 이론을 입증하기만 하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것이 만물이론처럼 희망사항에 불과하더라도.
미르를 비롯해 소설의 등장인물은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자문하곤 한다.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적인 부조리가 그들을 지치게 한다. 무뎌지지 않는 데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친 사람은 어떻게 회복할까? 희망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 기대감을 배울까? 자신이 해온 일이 소용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힘을 얻는다. 선의와 용기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옆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피드백 고리는 돌고 돌아 결국 미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한 사람을 살아있게 하려는 한 번씩의 노력은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헛된 환상이 아니다. 반복해서 관측되고 입증되는 사실이다.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서술되는 과학적 연구와 맞물려 이야기를 단단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에 대해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쉽게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들이 치유력을 발휘하는 모습에는 언제나 울림이 있다. 더불어 작중의 용어 중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력을 발현한 사람이 발현자라면, 발현자의 반대말은 잠재자다. 잠재자는 이력이 없는 사람이 무능력자가 아니고, 일반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발현자와 잠재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론상 누구든 발현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비극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고, 남을 구하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며, 공감하고 이해하고 기억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분명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다.
이하진의 SF 소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은 초능력과 같은 ‘이력(absurd force)’을 가정한다. 기존의 물리학 개념을 깨부수는 부조리한(absurd) 힘이다. 이력은 이론상 무엇이든 가능하다. 주인공 ‘미르’가 발현한 이력은 열을 옮기는 능력이다. 뜨거운 것을 시원하게,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미르는 눈짓 한 번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손쉽게 위반한다. 미르와 같은 ‘발현자’들은 통계적으로 인구의 10%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이력에 감탄하며 발현자를 특별 취급한다. 다만 이력을 사용한 범죄 역시 급증한다. 힘 있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부조리한 세상의 이면이다. 더불어 이력으로 인한 재난과 불치병도 소설을 무겁게 만든다. 작중의 ‘희망을 모르는 세대’는 사망 소식을 듣는 데 익숙하다. 익숙하다 못해 무딘 채로 살아간다. 비극을 추모하는 일은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크리스마스의 비극’은 일어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계속하여 현재진행형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불치병을 얻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회복하길 기다리는 주변인이 있다. 사망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 살아있다. 재난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고, 병의 치료법을 찾고, 아픔에 공감하며 슬픔을 추스르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중은 싸늘하다. 많은 이가 자신이 겪는 비극은 슬퍼해도 남의 일에는 관심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굳이 추모 장소에 찾아가 유가족을 조롱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앞에는 보통 사람들이 있다. 남들보다 조금 더 보통인 사람들, 희망을 믿기는 어려워하더라도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중 누군가는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냐’는 말에 ‘그럼에도 한 번 더’로 답한다. 계속해서 기억하고 싶다고, 손을 놓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작중 미르는 자신과 절친한 ‘건’의 병을 치료하려 애쓴다. 건은 미르를 돕느라 병에 걸렸다. 건이 있기에 미르는 비극을 무관심하게 넘기지 못한다. 미르는 딱히 박애주의자가 아니지만, 남들에게도 자신처럼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게다가 건을 치료할 방법이 생긴다면 다른 이들도 치료받을 수 있다. 이력을 무효화하는 이론을 입증하기만 하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것이 만물이론처럼 희망사항에 불과하더라도.
미르를 비롯해 소설의 등장인물은 ‘내가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고 자문하곤 한다.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적인 부조리가 그들을 지치게 한다. 무뎌지지 않는 데만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친 사람은 어떻게 회복할까? 희망을 모르는 사람은 언제 기대감을 배울까? 자신이 해온 일이 소용없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힘을 얻는다. 선의와 용기는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옆에서 옆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피드백 고리는 돌고 돌아 결국 미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한 사람을 살아있게 하려는 한 번씩의 노력은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다.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헛된 환상이 아니다. 반복해서 관측되고 입증되는 사실이다. 이는 소설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서술되는 과학적 연구와 맞물려 이야기를 단단하게 만든다.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에 대해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쉽게 행복해지지 못하는 이들이 치유력을 발휘하는 모습에는 언제나 울림이 있다. 더불어 작중의 용어 중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력을 발현한 사람이 발현자라면, 발현자의 반대말은 잠재자다. 잠재자는 이력이 없는 사람이 무능력자가 아니고, 일반인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잠재적인 가능성을 지닌 사람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발현자와 잠재자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론상 누구든 발현자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비극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고, 남을 구하는 힘을 발휘할 수도 있으며, 공감하고 이해하고 기억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분명 모든 사람에 대한 이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