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프리즘] 한국과 맞지 않는 회계기준, IFRS
2002년 에너지기업 엔론의 분식회계 사태로 자국 회계기준(US-GAAP)의 신뢰도가 추락하자 미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대안으로 국제회계기준(IFRS) 도입을 검토했다. 상당 기간 고민하다가 2012년 도입을 포기했다. US-GAAP은 회계처리 방법을 일일이 감독당국이 제시하는 ‘규정 중심’인 것과 달리 IFRS는 큰 원칙만 제시하고 구체적인 회계처리는 기업에 맡기는 ‘원칙 중심’인 게 핵심 이유 중 하나였다. ‘기업이 자신의 경제적 실질을 가장 잘 안다’는 철학에 근거한 IFRS는 기업과 회계 전문가들이 충분하고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판단했다면 같은 사안에 다른 회계처리도 인정한다. 미국은 그렇게 되면 기업 간 비교 가능성과 투자자 보호 등이 약해질 것으로 판단하고 IFRS를 도입하지 않았다.

미국처럼 규정 중심 회계기준(K-GAAP)을 쓰던 한국이 회계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2011년 IFRS를 전면 도입하자 큰 우려가 나온 것은 이 때문이다. 기업 내 회계인력, 외부감사 독립성, 전문가 견해에 대한 존중, 투자자의 회계 이해도가 훨씬 부족한 한국이 미국도 포기한 원칙 중심 기준을 제대로 받아들일지 의구심이 많았고, 실제 IFRS 시행 초기부터 큰 혼란을 겪었다.

IFRS의 손익계산서에 영업이익 항목이 없어 투자자의 반발이 거세자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이를 허용해줬다. 2012년엔 두산인프라코어가 발행한 영구채가 자본인지 부채인지를 놓고 회계기준원,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가 다른 의견을 내놔 몇 달간 혼란을 겪다가 IFRS해석위원회(IC) 판단에 따라 겨우 자본으로 결론 났다.

2015년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가 자회사 삼성바이오에피스를 종속회사에서 관계회사로 ‘지배력 변경 회계처리’를 하면서 불거진 논란은 혼란의 끝판왕이다. 매출 부풀리기 같은 단순 사안도 아니고 3개 대형 회계법인과 10명의 회계학자 자문을 거쳐 이뤄진 고도의 회계기준 해석 및 자회사 가치평가 문제에 일부 시민단체와 정치인이 개입해 전문가 판단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엔 문제가 없다고 한 금감원은 2017년 정권 교체 후 분식회계라고 입장을 뒤집어 혼란을 더욱 키웠다. 보다 못한 다수의 학자와 회계사가 들고일어나 삼바의 회계처리에 문제가 없다고 의견을 냈지만 검찰은 감독당국의 주장을 받아 기소했다.

지난주 삼성그룹 경영권 부당승계 재판에서 법원은 삼바의 분식회계 혐의를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논란이 발생한 지 무려 7년 만이다. 그렇다고 그사이에 상황이 크게 개선됐을까. 기업과 회계업계는 전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2020년 KT&G, 2022년 셀트리온, 올해 두산에너빌리티 감리 과정에서 보듯 금감원의 처벌 중심 감독은 달라지지 않았다. 기업의 항변은 무시하고 고의 분식회계를 저질렀다며 일단 최고 수위 징계를 주장하다가 상위 기관에서 번번이 제동이 걸렸다. 감독당국과 정치권력이 특정 의도를 갖고 회계기준을 악용하는 걸 막을 장치도 여전히 없다. 최근 몇 년 새 ‘주기적 지정감사제’마저 도입돼 현재와 미래 감사인 간 회계기준 관련 의견 충돌로 기업이 처벌받을 위험은 더욱 커졌다.

한국과 맞지 않는다고 10년 넘은 IFRS를 폐기하고 새 회계기준을 도입하는 것은 이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도 뭔가 보완장치는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회계 전문가들은 금감원의 회계기준 해석 기능 박탈, 무죄 판결 때 금감원 감리 담당자 징계 및 손해배상 의무화, 조세심판원과 유사한 회계심판원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을 거론한다. 뭐든 간에 현행 IFRS를 보완해 제2, 제3의 삼바 사태를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