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원전은 무조건 유럽에서 나가라던 웨스팅하우스가 협상 테이블에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지난달 31일, 체코 정부가 두코바니·테믈린 원전 수주전 중간 결과를 발표하자 국내 원전업계에서 나온 희망 섞인 분석이다. 이날 체코 정부는 1기 규모였던 원전 건설계획을 4기로 크게 확대하는 동시에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전격 탈락시켰다. 준공 시기와 공사비 등에 대한 체코 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게 직접적인 이유다.

원전 1기의 프로젝트 규모는 약 9조원, 4기는 30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갑자기 세 배 이상으로 판이 커진 시장에서 강력한 후보이던 웨스팅하우스가 한국수력원자력과 프랑스전력공사(EDF)의 2파전을 구경만 하게 된 것이다. 원전업계에서 ‘플랜B’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몰린 웨스팅하우스가 오는 4월 중순 재입찰 전 한수원과 지식재산권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한수원, ‘기술독립’ 입증 가능할까

그래픽=허라미 기자
한전이 수출한 UAE 바라카 원전 3호기.  한전 제공
그래픽=허라미 기자 한전이 수출한 UAE 바라카 원전 3호기. 한전 제공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는 유럽 원전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2022년 10월부터 한국형 원자로 ‘APR1400’을 둘러싼 지재권 소송을 치르고 있다.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이 원전 수출 움직임을 인지하자마자 “한국 원자로의 체코, 폴란드, 사우디아라비아 수출을 막아달라”며 워싱턴DC 지방법원에 소장을 냈다.

웨스팅하우스는 APR1400이 2000년 자신들이 인수한 기업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에서 파생한 기술인 만큼 제3국 수출 땐 미국 연방규정 810절(수출통제 규정)에 의해 미국 에너지부(DOE)와 웨스팅하우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수원은 APR1400이 기술적으로 독립된 원전이라고 반박하지만 문제는 입증이다. 1997년 미국 CE와의 라이선스 협력을 통해 들여온 게 한국형 원자로의 시작인 만큼 ‘기술 독립’을 법정에서 완벽하게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한수원 측은 협상에서 웨스팅하우스에 “세계 시장을 국가별로 나누자”는 제안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가 ‘지식재산권을 침해한 한국 원전은 수출 시장을 떠나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전해졌다. 원전 발주국 정부가 원자로 등 핵심기술 이전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은 만큼 한수원으로서는 원전을 수주하더라도 지재권 소송에서 패소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체코 정부가 웨스팅하우스를 탈락시키면서 상황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웨스팅하우스가 경쟁 상대로 남아 있었다면 한·미 원전 기업 간 분쟁은 계속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이제 웨스팅하우스는 판이 커진 체코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위기에 몰렸다. 한국과의 협상을 통해 30조원 중 일부를 챙기는 방안이 현실적 선택지로 올라올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 체코 원전을 수주하도록 협력하고, 웨스팅하우스는 일정 부분 로열티와 일감을 챙기는 방식이다.

UAE 때처럼…美와 공동수출 이뤄질까

이는 2009년 한국이 프랑스를 제치고 수주한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의 사업 구조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전력은 웨스팅하우스와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바라카 원전을 수주했다. 당시에도 웨스팅하우스가 수주전에서 빠지면서 협상이 수월해졌고, 한국 측은 원전 수출 대가로 웨스팅하우스에 라이선스 로열티와 핵심 일감 일부를 제공했다. 체코 원전 프로젝트 규모에 비춰보면 웨스팅하우스가 한수원과 협력할 경우 조 단위 이익을 취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웨스팅하우스는 탈락 후 약 2주가 지난 현재까지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장고에 들어갔다. 체코 측은 웨스팅하우스에 탈락을 사전 통보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웨스팅하우스는 발표 하루 전날만 해도 ‘체코전력산업동맹’과 수출협력 양해각서를 맺고 “우리 원전이 채택되면 체코 협력기업에 전체 일감의 70%를 주겠다”는 발언까지 했다. 한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은 그만큼 충격과 고민이 크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이 이뤄지면 한수원으로서도 원전 수출과 관련한 법적 리스크를 일단락 짓고 실리를 얻을 수 있다. ‘원전 10기 수출’이라는 국정과제에서 성과를 낼 수 있는 데다, 원전 발주국이 ‘K원전’을 택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제거되면서 수출에도 탄력을 받게 된다.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에 따르는 부담이 없지는 않다. 사실상 한국형 원자로의 원천 기술이 웨스팅하우스 소유라는 점을 인정하는 셈이 돼서다. 한수원이 미국 정부 허가를 통해 원전을 수출하는 이 방식은 법적 리스크를 피할 수 있지만, 한국형 원전이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 대상이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 향후에도 원전 수출을 위해서는 미국 측 허가를 받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 상황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지재권 분쟁이 지속되면 원전 수출 때마다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웨스팅하우스와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원전 수출 시 서로의 몫을 규정한 협약을 맺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양국 정상 간 논의 필요” 지적도

체코 정부는 원전 4기에 대한 입찰제안서를 오는 4월 15일까지 받겠다고 밝혔다. K원전의 수출 성패를 가늠할 운명의 두 달이 다가온 셈이다. 웨스팅하우스와의 지재권 분쟁 상황도 입찰제안서에 담길 것으로 전망돼 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의 행보가 주목된다. 리스크를 최소화해야 하는 체코 정부 또한 두 기업의 협상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재권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같은 유럽연합(EU) 국가인 데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프랑스에 수주가 돌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일각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미국 측과 협의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미국 에너지부와 관련 논의를 지속하고 있지만 뚜렷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미국 에너지부는 소송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분쟁 해결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양국 간 원전 동맹이 지속해 발전하려면 정상 간 지재권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형 원전의 수출 성적을 가늠할 체코 원전 우선협상대상자는 오는 6월 발표된다.

박한신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