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특히 스파르타에서 공동생활은 의무였다. 스파르타 구성원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공동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식사도 같이하고, 초라한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서 잠도 같이 잤다. 거의 완벽한 ‘병영사회’가 스파르타 사회를 정의하는 특질이었다.
영화 300의 한 장면/한경DB
영화 300의 한 장면/한경DB
스파르타의 남성 소년들은 20세까지 아고게(ἀγωγή)라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했다. 20세부터 30세까지는 10년간 중앙 기숙사에서 공동으로 숙박을 같이했다. 또 20세 이후 40년간은 ‘페이디티아(φειδίτια)’라는 식사 공동체에서 집단생활을 했다. 스파르타의 의무 복무기간이 60세까지였던 만큼 자유로운 개인 생활은 평생 불가능한 일이었다.

공동식사에서 예외는 없었다. 2명의 왕을 뒀던 스파르타 사회에서 왕들도 제사 의식 같은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공동식사에서 빠질 수 없었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훈련받고, 함께 전투하는 이 공동체는 격렬한 운동으로 ‘시장이 반찬’이 아니면 먹기 힘들다는 악명 높은 ‘멜라스 초모스(μέλας ζωμός)’라는 ‘검은 국(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공동체 의식을 키웠다. '검은 죽'의 악명은 대단해 지금도 서양 사회에선 '스파르타 수프(spartan soup)'는 볼품없고 맛없는 음식의 상징처럼 쓰이기도 한다.

스파르타인들은 왜 이렇게 엄격한 공동체 생활을 강조했을까. 플루타르코스 등에 따르면 BC 7세기의 전설적 입법자 뤼쿠르고스는 부를 축적하고 사치를 누리는 것을 없애기 위해 사실상 화폐의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토지는 추첨으로 균등분배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는 근검과 절약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가혹할 정도로 이 같은 규범이 실행에 옮겨졌다. 스파르타인은 "사생활이란 원하지도 않고, 무엇인지도 모르고, 꿀벌처럼 공중의 한 부분이 되어 열광적인 애국심 속에서 자신을 잊고 국가와 왕을 위해 사는” 존재로 길러졌다는 것이다.

그 결과, 평생 다른 삶을 살 기회가 없었던 대부분의 스파르타 인들은 획일적인 평등이 사회 전체적으로 통용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스파르타인들은 정치적 평등과 평등한 삶의 상징으로서 ‘동등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호모이오이(Ὅμοιοι)’라는 용어를 중시했다.

물론 평등사회의 이념과 달리 실상은 다소 달랐지만 말이다. 역사 기록은 스파르타에서도 경주마를 보유할 정도의 부자는 물론 대규모 토지를 소유해 다른 스파르타인들에게 임대하는 사람이 존재했고, 식사 공동체에 참가할 만큼의 최소한 수입을 확보하지 못해 ‘동등한 사람’의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 채 하층민으로 떨어졌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만약 스파르타라는 도시가 폐허가 돼 신전과 건물의 기초만 남게 된다면, 시간이 흐른 뒤 후손들은 이 지역이 과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5분의 2를 점령하고 지역 맹주로 군림했던 강력한 장소였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읊었던 '검소한' 도시국가 스파르타는 그렇게 등장하고 유지됐다.

최근 축구 국가대표팀의 단체식사 시간에 손흥민 선수로 대표되는 고참급 선수들과 이강인 선수를 필두로 한 젊은 선수들 간의 다툼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파문이 확산하고 있다. 저녁 식사 자리를 팀 단합의 시간으로 여겨 단체가 함께 움직이는 것을 강조한 고참 세대와 개인 생활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 간의 사고방식의 차이가 두드러진 것으로 보인다.

단체식사라는 다소 예스러운 주제가 화제의 뉴스를 촉발한 것을 보면서 문득 공동식사의 대명사인 스파르타의 모습이 떠올랐다. 스파르타인들이 식사 자리에서 불거진 한국 축구 선수들의 다툼을 봤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