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바, 왜 내가 죽기를 바라는 거지?”

1938년 니콜라이 부하린은 혁명 동지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편지를 보냈다. 숙청돼 총살되기 직전 쓴 짧은 편지에는 스탈린의 옛 이름이자 수많은 가명 중 하나인 ‘코바’라고 부르며 원망 섞인 마음을 드러냈다. (조지아의 작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의 소설 <부친살해>에 나오는 캅카스 지방 의적에서 이름을 딴 ‘오시프 코바’는 스탈린 본인은 물론 동료들도 자주 썼던 이름이다. 스탈린이라는 이름도 가명이다.)
스탈린 초상/한경DB
스탈린 초상/한경DB
‘대량학살자’ 또는 ‘20세기의 괴물’이라 불린 스탈린은 레닌이 “권력을 잡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지만 통치하기는 가장 어려운 나라”라고 평했던 러시아를 30년 가까이 홀로 지배했다.

스탈린은 지하정치가 몸에 밴 사람이었다. 잠입과 은폐, 배반은 스탈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질이었다. 그는 러시아 사회 곳곳에서 음모가 횡행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때도 항상 “음모가 있지 않을까”하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쓸모가 있는 자들에겐 필요한 동안만큼은 후하게 베풀었고, 방해되는 자들은 정면으로 대결하지 않고 책략으로 쓰러뜨렸다. 스탈린은 “무자비했고 기회주의적이었으며 전술적으로 유연했고, 사사로운 생존을 위해 비타협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간”인물(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스탈린이 자란 환경은 척박했다. 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조지아의 고리 지역은 살벌한 정글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도 스탈린은 가난하지만 강한 아이였다. “우리는 그가 무서워서 피했다”라는 게 어린 시절 학교 친구들의 전언이기도 했다. 그는 “손에 몽둥이를 쥔 사람이 바로 대장”이라는 러시아 속담의 뜻을 어린 시절부터 온몸으로 익혔다.

혁명가로 산전수전 겪은 그의 삶은 더욱 잔혹해졌다. 스탈린은 제정 러시아 정보당국에 의해 9번 체포됐다. 짧은 구류 4번을 포함해 9번의 수감생활 중 8번이나 탈출했다.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감옥 생활 중 동료 수감자들은 그에 대해 “냉담한 스핑크스 같았다”고 입을 모았다.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스탈린은 ‘빈틈없는 유혹자’나 ‘사생아 생산자’며 ‘연쇄적 싸움꾼’, ‘강박적인 말썽꾼’이라는 평을 들으며 최악의 인물로 평가받았다. 혁명 동료가 약탈행위 중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어쩌겠어? 가시에 찔리지 않고 장미를 꺾을 수 없잖아?”라고 무심하게 내뱉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라”라는 것도 스탈린의 발언이었다.

이런 냉혹함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다졌다. 스탈린의 궁정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10년 넘게 살펴봤던 베리야의 아들은 “스탈린은 모든 사람을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누구나 쇠막대기로 다스렸다”고 요약했다. 몰로토프는 이런 상황을 두고 훗날 회고록을 통해 “스탈린 앞에서 우리는 모두 10대 같았다”라고 인정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는 데 있어선 강박증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집착했다. 스탈린은 젊은 시절부터 배신자를 지목해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무고한 사람들이었다.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제물을 고르고 계획을 세세한 부분까지 치밀하게 준비해서 무자비한 보복을 실행한 다음 잠자리에 드는 것”이라는 유명한 표현은 스탈린이 한 말로 전해진다. 실제 지하운동을 같이 한 동료 중 한명은 “스탈린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동지들의 주소를 제정 러시아 헌병대에게 넘겨 그들을 제거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스탈린은 적을 제거할 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감하고 철저하게 진행했다. 1938년 부하린을 총살로 숙청할 때 내건 명분 중에는 1229병의 고급와인과 11편의 포르노 영화, 호화판 해외 수입 의류, 고무로 만들어진 자위기구 및 다량의 현찰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인식공격성의 혐의까지 꼼꼼하게 추가됐다. 요식행위로 치러진 재판에선 국가 조사국에서 몰수한 부하린의 재산 목록이 130개 카테고리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가 ‘인민의 삶’과 동떨어진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부도덕한 이중인격의 가식적인 인물이었고 사치를 일삼았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내용들은 특히 강조됐다.

1929년 11월 스탈린은 부하린, 리코프, 톰스키를 ‘당에 유해한 자들’로 지목해 비난하기 시작했다. 부하린은 공개적인 자기비판을 통해 연명을 했지만 끝내 스탈린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반대파를 당에서 축출하는 정도였지만, 1930년대 들어서선 반대파의 목숨을 물리적으로 뺏는 형태로 진행했다. 1936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 14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모두 처형됐다. 부하린과 리코프도 제거됐다. 저명한 정치권 인사들에 대한 공개재판이 빈번하게 진행됐고 ‘트로츠키 주의자’ ‘지노비예프 주의자’ ‘우편향주의자’에 대한 색출 작업이 지속됐다.

1934년 초 제17차 공산당대회에서 활동했던 대의원 1966명중 1108명이 ‘반혁명’혐의로 체포됐다. 17차 당 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로 선발됐던 사람들 중 70%, 즉 139명중 98명이 1937~1938년에 유명을 달리했다. 1933~1938년 사이에 공산당원 수는 3500만 명에서 1900만 명으로 감소했다. 수천 명이 당원이란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정계인사 상당수가 자살, 사고사, 자연사했는데 이중 과연 얼마나 타살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자신할 수 없다.

공산당 최고위층의 상황도 마찬가지 였다. 1937년에서 1940년 사이에 사망한 6명의 정치국 멤버 중 자연사한 사람은 발레리안 쿠이비셰프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쿠이비셰프의 10대 아들은 비밀경찰 조직인 NKVD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선 139명의 위원 중 98명이 죽임을 당했다. 우크라이나 공화국 중앙위원회에선 200명의 중앙위원 중 단 세 명만 살아남았다. 93명의 콤소몰 중앙위원회 위원 중에선 72명이 사라졌다.

1938년 11월21일 단 하루 동안 내무 인민위원회는 292명의 당 종사자들을 총살하라는 승인을 했다. 그 중 26명이 인민위원과 인민위원회 차관, 주집행위원회 의장 등 주요 정치인이었다. 스탈린은 직접 21명의 인민위원을 포함한 총살계획을 재가했다.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던 바쳬슬라프 몰로토프를 비롯한 정치국원들과 명목상 국가원수였던 미하일 칼리닌 등도 권좌를 유지했지만 가족을 잃고도 ‘찍소리’ 못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들은 스탈린이 자신의 아내를 체포하고 굴라크로 보내는 것을 말없이 수용해야만 했다. 오성장군 세묜 부됸니는 아내가 체포되자 절연하고 결혼을 무효화했다. 스탈린의 비서실장이었던 알렉산드르 포스크레비셰프는 아내가 끌려간 후 곧바로 재혼했다.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트로츠키를 제거할 때는 철저하게 뿌리를 뽑았다. 트로츠키가 1936년 12월 멕시코로 망명한 뒤에는 유럽에서 일어나는 일에 거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지만 트로츠키의 가족 대부분을 살해했다. 트로츠키의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1936년에 레닌그라드에서 사라졌고, 세르게이 세도프가 1937년 10월 처형되는 등 트로츠키의 두 아들 모두 살해됐다.

트로츠키의 지지자 수백 명도 다른 공산주의자들이나 NKVD요원에 의해 암살됐다. 트로츠키의 비서를 지냈던 루돌프 클레멘트는 1937년에 파리 센 강에서 머리 없이 몸통만 떠다니다 발견됐다. 1937년 9월 파리주제 소련 외교관이자 트로츠키 측과 친분이 있던 이그나체 레이스는 스위스 로잔의 한 식당으로 유인됐다가 도망치던 와중에 몽둥이에 맞아 의식을 잃은 뒤 총알 세례를 받았다.

게티와 리터스프론 등의 연구에 따르면 1937~1938년에 비밀경찰에 의해서만 157만5259명이 체포됐고, 이 중 87.1%가 정치적 이유에서 붙잡힌 사람이었다. 비밀경찰에 끌려온 사람의 85.4%인 134만4923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1936년 10월1일과 1938년 9월30일 사이 기간에 소련 60개 주요 도시에 있던 군사법정에서만 3만514명에 대해 ‘총살형’ 판결을 내려지기도 했다. 1937~1938년으로 시야를 넓혀보면 총살된 사람만 총 68만1692명에 달한다.

외국의 공산주의 운동가들도 스탈린이 주도한 숙청의 희생양이 됐다. 1937~1938년 소련에 머물고 있던 외국인 공산주의자 사회와 코민테른 조직 자체가 파괴됐다. 소련에 망명 중이던 독일 공산당은 정치국 위원 7명과 68명의 지도자 중 41명을 잃었다. 당시 히틀러에게 죽임을 당한 공산당원이 겨우 5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적인 극우파에 의해서라기보다 아군이라 생각했던 쪽에서 더 큰 타격을 입은 것이었다. 망명 중이던 폴란드 공산당도 중앙위원회가 송두리째 사라지다시피 했고, 약 5000명의 당원이 ‘폴란드 보안부의 첩보원’이라는 혐의로 살해됐다.

숙청의 물결은 군대로도 퍼졌다. 1937년 발생한 여러 숙청 중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붉은 군대의 주요 장군들을 숙청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은 군부의 반란 가능성을 매우 우려했다고 전해진다.

우선 혹독한 고문 끝에 육군정치국위원 얀 가마르니크가 자살했다. 이어 붉은 군대 전반을 관통하는 대대적인 숙청작업이 이뤄져 ‘제대로 훈련받은’ 유능한 군사지도자들이 사라졌다. ‘종심타격이론’으로 20세기 전쟁교범을 근본적으로 바꿨고 ‘붉은 나폴레옹’으로 불렸던 대 전략가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유능한 장군들이 모조리 제거됐다. 소련의 원수 5명중 3명, 군사령관 15명중 13명, 군단장 85명중 57명, 사단장 195명중 110명, 여단장 406명중 220명이 체포됐고 상당수가 처형됐다. 슈할레프스키 원수를 비롯해 예고로프, 야키르, 우보례비치, 벨라프, 키레예프, 코자노프 등의 주요 장성들이 제거됐다. 붉은 군대 사령관을 지냈던 오성장군 바실리 블류헤르는 한쪽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은 뒤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했다. 로코소프스키 상장은 죽은 지 20년이 된 어떤 남자가 제공했다는 증거 탓에 곤욕을 치렀다.

‘인민의 적’의 부인으로 분류된 숙청 장군과 장교들의 부인들 역시 자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38년 8월29일 ‘인민의 적의 부인’으로 지목된 15명의 여성들이 총살당했다. 다만 저명 인물들이었던 투하체프스키, 유보레비치, 코르크, 가마르니크의 미망인들은 목숨을 부지한 채 8년형에 취해지는 ‘배려’를 받았다.

니나 투하체프스키를 비롯한 이들 부인들은 1941년 2차 대전 중 총살형에 처해졌다. 부하린의 아내 안나 라리나는 목숨은 건졌지만 20년 이상 감옥과 노동수용소, 시베리아 유형지를 전전했다. 갓 한 살이었던 부하린의 아기는 엄마 품에서 떨어져 나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 채 고아원에서 지냈다.

숙청대상자들의 자식의 경우, 1937년 8월 15일 칙령에 의해 15세 이상 되는 자녀들은 그들의 어머니들과 동일한 처분을 받아야만 했다. 이들 ‘사회적으로 위험한 아이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고, 1~1.5세가량의 어린 아이들만 그들의 어머니와 같은 수용소에서 살 수 있었다. 그나마 열악한 수용소의 환경으로 어린 유아들의 생존확률도 높지 않았다. 1943년 독일과 전쟁 중에도 일반 굴라크에서 일반인의 영아사망률이 0.47%였던 반면 어머니가 죄수인 아이들의 사망률은 무려 41.7%에 달했다.

전체적으로 스탈린의 ‘숙청’ 희생자가 얼마냐 되는가에 대해선 학자마다 편차가 크다. ‘대숙청 기간’에 350만 명 정도라는 시각부터 일각에선 1500만 명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까지 제시한다. 어떤 시각이건 간에 ‘정확한 통계’는 구할 수도 없다. 고르바초프 시절인 1990년에 나온 자료는 1930~1953년에 처형된 사람을 78만6098명으로 파악했다. 처형된 사람과 수용소에서 사망한 사람을 합한 수의 최저치는 182만9903명으로 나타나있다.

결론적으로 1929년부터 1953년까지 스탈린 치하에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2차 대전 사망자 2650만 명을 제외하고라도 1200만~2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스탈린 체제하에서 시체는 러시아 사회에서 가장 일상적인 생산품”(로버트 컨퀘스트)이란 말은 과장이라 할 수 없는 표현이다.

러시아에서 반정부 운동을 펼쳐왔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최대 정적’ 알렉세이 나발니가 최근 갑작스럽게 의문사했다. 푸틴 대통령의 5선이 유력한 대통령 선거를 한 달 앞두고 급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나발니는 2020년 독살 시도에서 극적으로 살아남기도 했지만, 끝내 푸틴의 ‘정적 제거’의 마수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푸틴 집권 이후 정적들의 비명횡사가 잇따르는 가운데, 러시아사에서 노골적이고 잔혹한 정적 제거가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는 점이 떠올라 스탈린의 잔혹한 행보를 다시 정리해 봤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