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여주인공 직업의 트렌드는 작가, 억압을 글로 푼다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여성작가의 뮤지컬
여성작가의 뮤지컬
그녀들이 ‘작가’인 이유
뮤지컬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있다. 하지만 과거 상당수의 대극장 뮤지컬들은 여성을 마리아 혹은 마돈나로 정형화시켜 ‘남성들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요소로 사용했다. <지킬 앤 하이드>(1997)는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창작 뮤지컬 <겨울 나그네>(1997)의 다혜와 제니도 다를 바 없다. 마돈나를 조금 틀어 카리스마 있는 혁명적 인물로 바꾸면 <두 도시 이야기>(2007)의 마담 드파르지가 된다. 브람 스토거가 쓴 <드라큘라>의 미나는 타자기를 다루는 선생-신여성이지만, 뮤지컬(2014)에서는 드라큘라의 불멸의 아내로 ‘마리아화’ 되어있다. 같은 맥락에서 <레미제라블>(1980 파리, 1985 런던)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존재하지만, 자기 서사를 가진 판틴, 떼나르디에 부인, 에포닌, 코제트를 제외하고 모두 이름이 없다. ‘앙상블’로 호명되거나 공장 노동자, 가발 노동자, 마담, 노파라는 ‘계층’이나 ‘나이’로 구분되어 있다. 이에 반해 <레미제라블>의 모든 남성은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의 서사가 모두 구현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다.주체적인 여성, 서사의 등장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특히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은 젠더 감수성에 예민하여 여성을 대상화하는 기존의 틀에서 대부분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2018년 공연계를 강타했던 미투 운동 이후 강화된 현상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부터도 징후적으로 관찰되었다.<아가사>(2013), <레드북>(2017), <마리 퀴리>(2018), <호프>(2019)로부터 시작하여(현재 <아가사>는 사연, <마리 퀴리>는 삼연 중이다) <백인당 태영>(2023)에 이어 현재 공연되고 있는 <메리셸리>(2021), <여기, 피화당>(2024)까지 여성을 주체로 세우고 끌어안는 작품들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물론 영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위키드>(2003), <펀 홈>(2013), <이프/덴>(2013), <웨이트리스>(2015), <식스>(2017) 등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많다.
여성작가 뮤지컬, 감금과 성장
그런데 흥미롭다. 많은 여성서사 창작 뮤지컬의 주인공들이 ‘작가’다. 특히 중소극장 뮤지컬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현재 공연되고 있는 <아가사>의 아가사, <메리셸리>의 메리셸리, <여기, 피화당>의 가은비, 조금 더 범위를 확장해서 <너를 위한 글자>(2019)의 캐롤리나, <이상한 나라의 아빠>(2022)의 주영이가 그렇다. 공연을 완료했거나 공연 예정인 <난설>(2019)의 허초희, <실비아, 살다>(2022)의 실비아 플라스, <브론테>(2022)의 브론테 자매들도 전부 글을 쓰는 여성들이다. 먼저, 이들은 다채롭다. 여성주의 소설, 추리소설, (최초의) SF소설, 여성영웅소설, 아동소설의 작가이며 동서양의 시인이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작품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비교적 잘 알려진 작가의 전기적 사실들이 공연의 바탕을 이룬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뮤지컬로 제작되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을 위한, 자신에 대한’ 서사를 쓰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한계와 범주에 맞서 자기파괴적인 행동을 분출하기도 하며, 비틀거리는 고딕 인물이 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체념과 분노 사이를 오가는 내적 투쟁을 거친다.<아가사>와 <메리셸리> 그리고 <여기, 피화당>에는 ‘감금의 이미지’가 뚜렷하다. 아가사와 메리, 가은비는 자신을 감춘다.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 혹은 여성의 성(性)에 대한 위태로운 시선은 감금과 억압의 조건이다. 미궁에 사는 로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감금된 아가사와 메리다. 그리고 가은비는 피화당이라 명명한 동굴에 실제로 자기 자신을 가둔다. 아가사의 살인충동, 메리의 괴물성은 내적 투쟁이 광기와 불안으로 잠재된 것이다. 불륜을 저지르는 남편, 천재적 능력을 가로채려는 남성들, 여성의 집필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항하여 그들은 내면에 로이와 괴물을 낳는다. 이에 비해 가은비의 감금은 훨씬 직접적이며 물리적인 것이다. 가은비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힘들게 살아 돌아왔으나 ‘몸이 더렵혀졌다’는 이유로 죽은 삶을 산다. 가은비가 피화당에서 쓰는 <박씨전>은 영웅이 되어 세상을 호령하고 싶은 여성들의 꿈을 담는다. 이들의 소설은 감금된 그들이 쓰는 진짜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너를 위한 글자>의 캐롤리나와 <이상한 나라의 아빠>의 주영이는 ‘성장하는 여성들’이다. 역시 사랑이다. 사랑은 성장을 이루고 성장은 작가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서게 만든다. 점점 눈이 멀어가는 캐롤리나는 서툰 소설가였지만 투리와 도미니코의 사랑에 힘입어 진짜 작가로 성장한다. 투리가 캐롤리나를 위해 발명한 타자기는 그녀의 눈이 된다. 주영이는 동화작가의 꿈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무엇을 써야 할지 깨닫는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죽은 아버지의 꿈은 주영이의 꿈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그들의 소설은 진짜 자신들의 이야기로 더 깊어질 것이다. 광기와 슬픔, 사랑과 성장의 서사를 쓰고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창작 뮤지컬의 스펙트럼이 확장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일본인으로 살면서 조선인 박문자로 죽은 <22년 2개월>(2023)의 가네코, <일 테노레>(2023-2024)의 연극하는 독립운동가 진연이의 등장은 호쾌하고 의리 넘치며 쿨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여성서사 모델을 기대하게 만든다. 뮤지컬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가득 찬 여러 여성들을 만나는 기쁨이 점점 더 깊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