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에서 인간이 사라지는 시대를 한탄하기 위한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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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영미술관 특별초대전 '용(龍·用·勇)'
김을 김진열 김주호 서용선 4인의 작가 전시
그림일기부터 입체회화, 테라코타 등 각양각색
김을 김진열 김주호 서용선 4인의 작가 전시
그림일기부터 입체회화, 테라코타 등 각양각색
"세속적 물욕과 공명심에 얽매여서는 생각과 행동이 자유롭지 못함이고, 자유롭지 못한 정신 상태에서 어떻게 심금을 울리는 예술작품이 생겨나겠는가."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고(故) 김종영 화백(1915~1982)은 '유희삼매'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작품이 잘 팔리는 작가'가 성공의 척도가 되고, 미술 속 인간에 대한 고민이 점차 옅어지던 세태에 대한 지적이었다. 김 화백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유와 용기와 사랑을 겸한 '휴매니티'가 있다면 예술이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김종영 화백과 비슷한 고민을 가진 4인의 작가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미술관에 모였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새해 첫 전시로 마련한 김을·김주호·김진열·서용선의 단체전 '용(龍·用·勇)'이다. 박춘호 학예실장은 "'미술에서 인간이 사라졌다'는 한 원로작가분의 한탄을 듣고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작품의 환금성(用)이 주목받는 시대에도 용기(勇) 있게 휴머니즘을 추구한 작가들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일상을 담은 그림일기부터 테라코타, 대형 조각까지. 네 명의 작가가 선택한 작업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개천에서 용(龍) 난다'는 성공 신화 이면에 외면받곤 했던 이들, 바로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아기자기한 쪽은 김을(69) 작가다. 귀금속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자화상'과 가족사를 소재로 한 '혈류도' 연작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와 조각들은 공방에서 만들어낸 듯 손가방에 쏙 들어갈 크기다. 지금도 전시회를 열 때면 전시장 한편에 작은 책상을 마련해놓고 작업을 이어간다고 한다.
'그림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그림을 속이지 말라' 등 드로잉 곳곳의 문장이 창작자의 애환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작업물을 전부 태우고 그 재를 모아 '배드 드로잉(Bad drawing)'이란 제목으로 흔적을 남겼다. '스컬피'라는 조형 재료로 눈물을 형상화한 조각들을 장난감 트럭에 모아두기도 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쌓인 눈물이 한 트럭이라는 의미일까. 김진열 작가(71)는 쓸모를 다해 버려진 폐품으로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화폭에 담는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아낙네, 폐지를 줍는 노인, 시장에서 좁쌀 한되를 파는 상인이 그의 '뮤즈'다. 입체 회화 '그물질'(2023)은 전남 여수에서 40㎞가량 떨어진 연도 바닷가에 쓸려온 녹슨 양철을 염산 처리해 제작됐다. 작가는 겨울이면 강원 원주의 폐사지인 거돈사지를 찾는다고 했다. 고독하게 서 있는 벌거벗은 은행나무에서 고난을 이겨내는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이유에서다. '뿌리와 더불어'(2015) 등 입체 회화는 세월의 풍파에 묵묵하게 맞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표상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진열 작가는 "나뭇잎이 풍성한 여름에는 나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며 "겨울에 비로소 나무가 살아온 삶이 보인다"고 했다. '해학의 작가' 김주호(74)의 모델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테라코타로 제작한 그의 인물상 속 대부분의 사람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30명의 인간 군상을 담은 '별별30나한상'(2023)은 창령사지 오백나한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해학미를 토대로 힘겨운 삶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민초들의 바람을 담았다.
김주호의 해학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하기도 한다. 버려진 포장지를 활용해 만든 '위험한 질주'(2022)가 단적인 예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쓰레기더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작품 바닥에 놓인 운반 수레를 밀면 조각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작가는 "자원 낭비가 환경 파괴로 이어지는 문명의 '위험한 질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 명의 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서용선(72)은 대학교수 정년을 10년 남기고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양평으로 들어갔다. '도시풍경' '역사화' '자화상' 연작으로 이어진 그에게 그림은 '세상과 맞닿아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에선 채색한 대형 나무 인물상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3월 24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한국 근대조각의 선구자 고(故) 김종영 화백(1915~1982)은 '유희삼매'라는 제목의 글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작품이 잘 팔리는 작가'가 성공의 척도가 되고, 미술 속 인간에 대한 고민이 점차 옅어지던 세태에 대한 지적이었다. 김 화백은 이렇게 덧붙였다. "자유와 용기와 사랑을 겸한 '휴매니티'가 있다면 예술이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김종영 화백과 비슷한 고민을 가진 4인의 작가가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한 미술관에 모였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이 새해 첫 전시로 마련한 김을·김주호·김진열·서용선의 단체전 '용(龍·用·勇)'이다. 박춘호 학예실장은 "'미술에서 인간이 사라졌다'는 한 원로작가분의 한탄을 듣고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며 "작품의 환금성(用)이 주목받는 시대에도 용기(勇) 있게 휴머니즘을 추구한 작가들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일상을 담은 그림일기부터 테라코타, 대형 조각까지. 네 명의 작가가 선택한 작업의 형태는 각양각색이다. 그러나 이들의 작품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개천에서 용(龍) 난다'는 성공 신화 이면에 외면받곤 했던 이들, 바로 '인간'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이다. 아기자기한 쪽은 김을(69) 작가다. 귀금속 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자화상'과 가족사를 소재로 한 '혈류도' 연작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회화와 조각들은 공방에서 만들어낸 듯 손가방에 쏙 들어갈 크기다. 지금도 전시회를 열 때면 전시장 한편에 작은 책상을 마련해놓고 작업을 이어간다고 한다.
'그림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그대는 그림을 속이지 말라' 등 드로잉 곳곳의 문장이 창작자의 애환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림이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작업물을 전부 태우고 그 재를 모아 '배드 드로잉(Bad drawing)'이란 제목으로 흔적을 남겼다. '스컬피'라는 조형 재료로 눈물을 형상화한 조각들을 장난감 트럭에 모아두기도 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 쌓인 눈물이 한 트럭이라는 의미일까. 김진열 작가(71)는 쓸모를 다해 버려진 폐품으로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화폭에 담는다. 바닷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아낙네, 폐지를 줍는 노인, 시장에서 좁쌀 한되를 파는 상인이 그의 '뮤즈'다. 입체 회화 '그물질'(2023)은 전남 여수에서 40㎞가량 떨어진 연도 바닷가에 쓸려온 녹슨 양철을 염산 처리해 제작됐다. 작가는 겨울이면 강원 원주의 폐사지인 거돈사지를 찾는다고 했다. 고독하게 서 있는 벌거벗은 은행나무에서 고난을 이겨내는 삶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이유에서다. '뿌리와 더불어'(2015) 등 입체 회화는 세월의 풍파에 묵묵하게 맞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표상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김진열 작가는 "나뭇잎이 풍성한 여름에는 나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며 "겨울에 비로소 나무가 살아온 삶이 보인다"고 했다. '해학의 작가' 김주호(74)의 모델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테라코타로 제작한 그의 인물상 속 대부분의 사람은 환한 미소를 띠고 있다. 30명의 인간 군상을 담은 '별별30나한상'(2023)은 창령사지 오백나한상에서 영감을 얻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해학미를 토대로 힘겨운 삶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을 찾고자 하는 민초들의 바람을 담았다.
김주호의 해학은 사회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하기도 한다. 버려진 포장지를 활용해 만든 '위험한 질주'(2022)가 단적인 예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쓰레기더미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작품 바닥에 놓인 운반 수레를 밀면 조각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작가는 "자원 낭비가 환경 파괴로 이어지는 문명의 '위험한 질주'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네 명의 작가 중 가장 대중적인 서용선(72)은 대학교수 정년을 10년 남기고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양평으로 들어갔다. '도시풍경' '역사화' '자화상' 연작으로 이어진 그에게 그림은 '세상과 맞닿아 살아가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에선 채색한 대형 나무 인물상을 만나볼 수 있다. 전시는 3월 24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