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공화주의와 한국 정치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대한민국이 ‘공화제’ 국가임을 선포하고 있다. 1919년 임시정부 임시헌장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 제헌 헌법에 도입됐고 이후 9차례의 헌법 개정에서도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민주’에만 주목했고, ‘공화’는 소홀히 했다.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첫째, ‘민주주의’라는 말이 들어온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민주(democracy)’와 ‘공화(republic)’가 혼용됐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1인이 통치하는 군주국이 아니라 법치에 기반한) 공화국”이라는 의미였기에 굳이 민주와 공화를 구별해 사용하지 않았다. 둘째 5·16 군사정부가 만든 민주공화당이 17년8개월을 통치하면서 ‘공화’라는 단어에 거부감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최근 ‘공화주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공화주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동료 시민들의 삶을 좋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싶었다”고 정치에 참여한 이유를 설명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동료 시민’이다. 대통령이 흔히 쓰는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과는 다른 ‘공화적’ 언어다. 동료 시민에는 정치인과 국민이 상하관계가 아니며, 국가사회의 구성원인 시민을 자율적·능동적 주체로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대통령이 국민을 비자율·수동적인 통치의 대상으로 보는 ‘친애하는 국민’이라는 말보다 민주정치에 더 부합한다. 한 위원장이 ‘시민’과 ‘국민’의 차이를 알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은 건국 당시 민주정이 아니라 공화정을 표방했다. 존 F 케네디는 “동료 시민 여러분!’ 바로 다음에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물으십시오”라고 ‘시민적 책임’을 강조했다.

한 위원장은 늘 정치인과 시민의 책임을 강조한다. 지난한 과제 앞에서는 “저희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정치인의 책임을 능동적으로 앞세운다. 정치인이 책임지겠으니 ‘동료 시민’이 함께해달라는 시민 행동을 요청하는 공화주의 정치다. 공화주의는 이렇게 정치인의 책임감, 동료 시민의 공공성을 강조한다.

공화주의의 핵심 두 기둥은 ‘법치’와 ‘시민적 덕성’이다. 법치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 시민적 덕성으로 더불어 사는 공존이 이뤄지는 시스템이다. 정치철학자 모리치오 비롤리는 <공화주의>에서 “시민이 된다는 것의 의미란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 또는 ‘키비타스(civitas)’, 즉 개인들이 법의 지배 아래 정의와 자유를 만끽하면서 더불어 살도록 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 정치 공동체의 멤버가 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마디로 공화주의는 법치와 공공성을 체화한 ‘시민 정신’ 또는 ‘시민됨’이 구현되는 체제다.

공화주의는 한국 사회가 산업화·민주화 이후 새로운 이념과 가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데서 출발한다. 우리 정치는 여전히 보수는 반공과 자본주의에, 진보는 독재와 사회주의에 매몰돼 있다. 이 때문에 미래를 걱정하는 많은 지식인이 공화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정치는 ‘민주화 이후’에도 보수·진보를 대표하는 두 거대정당이 타협 없이 대치하는 ‘정당정치 후퇴’의 모습을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에 ‘친명’만 있고 ‘더불어’는 없으며, 국민의힘에 ‘용산’만 있고 국민은 없다는 세간의 비판이 따갑다. 산업화 시대의 기업가와 노동자 대립, 민주화 시대의 권위주의와 민주화 운동세력 대치가 ‘민주화 이후’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대립하는 위기 상황이다.

무엇이 필요한가. 민주화 다음으로 공화주의, 민주시민 다음으로 공화적 시민이 필요하다. 시장의 불평등을 보완하는 공화적 평등, 민주주의가 타락해 만들어진 중우정치를 넘어 공화적 책임정치가 나타나야 한다. 법치를 통한 정의의 실현, 시민적 책임과 다수와 소수의 공존을 기치로 하는 ‘공화주의 혁명’이 필요한 때다. ‘동료 시민’을 표방한 한동훈식 정치가 동료 시민을 넘어 ‘다양한 세력’을 포용하며 공화(共和)적 미래로 나아갈지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