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범수 /사진=영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김범수 /사진=영엔터테인먼트 제공
대한민국 남자 보컬 최강자를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김나박이'를 떠올릴 테다. 김범수, 나얼, 박효신, 이수를 뜻하는 이 단어는 "노래 잘한다"는 찬사를 표현한 최고의 수식어다.

'김나박이'에서 '김'을 담당하고 있는 김범수는 올해 데뷔 25주년이 됐다. 깔끔하고 시원시원한 보컬, 폭발적인 성량, 풍부한 감성을 지닌 그가 부른 숱한 곡들이 히트에 성공했다. '보고싶다', '하루', '슬픔활용법', '슬픔보다 더 슬픈 이야기', '사랑의 시작은 고백에서부터', '지나간다', '끝사랑' 등이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으며 명곡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김범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다소 놀라웠다. "노래에 무릎 꿇은 경험이 있다"는 것. 5년 전 데뷔 20주년 기념 콘서트 당일 급성 후두염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때를 떠올린 그는 "스태프들이 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더라.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결국 공연은 취소됐다.

김범수는 "그렇게 좋아하던, 유일하게 잘했던 노래로 좌절한 거다. '내로라할 건 이것밖에 없었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생각으로 2년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힘든 시간은 길어졌다.

그런 그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바로 '정규앨범 발매'라는 목표가 생긴 덕분이었다. 김범수는 22일 정규 9집 '여행'을 발매한다. 무려 10년 만에 내놓는 정규앨범이다.

공연을 취소한 뒤 외상 후 스트레스와 무대 공포증을 겪었다고 털어놓은 김범수는 "무대에 올라가려고 하면 다리와 심장이 떨렸다. 심장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 앨범을 만들기 직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들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다. 앨범을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회복이 많이 됐다"고 밝혔다.
가수 김범수 /사진=영엔터테인먼트 제공
가수 김범수 /사진=영엔터테인먼트 제공
데뷔 25주년을 거창하게 보내고 싶진 않았지만, 가수로서 그냥 흘려보내기도 싫었다고 한다.

김범수는 "작년 초쯤 '이제는 정규앨범을 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25년 활동했다고 얘기하기는 부끄럽더라. 결과를 떠나 작업을 시작했고, 1년 동안 굉장히 심혈을 기울였다. 신인 때 작업했던 것보다 무게도 많이 실렸고, 한 곡 한 곡에 대한 진심도 더 담겼다. 오랜만에 내는 앨범이라 대중, 팬분들에게도 선물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나 자신에게도 큰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며 미소 지었다.

정규가 나오기까지 10년이나 걸린 이유에 대해서는 변화한 시장 분위기를 언급했다. 그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가수들이 항상 정규앨범에 대한 다짐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예전만큼 피지컬 정규앨범에 대한 효율이 크지 않다"면서 "작업 과정서 들이는 노력 대비 얼마나 많은 분이 그걸 알아주실까 하는 걱정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이어 "10곡이 넘는 앨범을 발매해도 타이틀곡 한 곡을 제외한 나머지는 사장될 가능성이 아주 크지 않냐"면서 "시대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걱정과 기대를 안고 큰 용기를 냈다. 목표나 결과도 중요하겠지만 많은 분이 작년 한 해 내가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물을 많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정규 9집에는 타이틀곡 '여행'을 비롯해 '너를 두고', '그대의 세계', '걸어갈게', '각인', '나이', '머그잔', '꿈일까', '너는 궁금하지 않을 것 같지만', '혼잣말', '여행'의 영어 버전인 '져니(Journey)'까지 11곡이 수록됐다. 싱어송라이터 최유리와 선우정아, 김제형, 아티스트 이상순, 임헌일, 작곡가 피노미노츠, 재즈 피아니스트 송영주 등이 참여해 완성도를 높였다.

김범수는 "난 싱어송라이터가 주가 된 가수가 아니다 보니까 좋은 노래를 찾아야 했다.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 많은 경우의 수를 계속 떠올리며 고민했다. 예전의 내 감성을 끌어내 줄 수 있는 윤일상 프로듀서나 황찬희 프로듀서 등 아주 신인 때의 모습을 발견해줬던 프로듀서를 찾아갈 것이냐, 아니면 현재 활동을 많이 하고 있고 실력이 좋은 프로듀서를 찾아가서 새로운 색깔을 끄집어낼 것이냐 고민이 많았는데 답을 못 찾겠더라"고 했다.

이어 "그러다 요즘 내가 듣고 있는 음악은 어떤 음악인지 떠올렸는데 상당히 미니멀한 음악을 찾아 듣고 있더라. 악기 구성도 단출하고 가사가 기반이 된, 가사가 잘 들리는 곡들이었다. 이게 나의 정서이고, 전달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듣고 있는 음악의 작업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너무 감사하게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뮤지션들임에도 흔쾌히 작업에 응해줘서 좋은 앨범이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가수 김범수 /사진=영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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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곡 '여행'은 아티스트 김범수로 걸어온 길을 '여행'이라는 키워드에 함축적으로 녹여낸 곡이다. 어제가 후회되고, 내일이 두렵지만 용기를 내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최유리가 작사·작곡·프로듀싱해 서정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고음을 지르는 김범수가 나올 거란 예상을 제대로 깨버렸다. 부드럽고 잔잔한 멜로디 라인과 전개 속에서 가사를 음미하는 매력이 있다.

김범수는 "창법이나 색깔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또한 내 목소리 안에 있는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번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기존에 주로 많이 활용하던 테크닉적인 부분이나 고음역이 방해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필요한 부분들을 뺐다고 말씀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다만 "테크니션이나 고음 보컬은 은퇴한 건 아니다"고 했다.

그는 "난 보컬리스트다. 얼마 전에 본 휘트니 휴스턴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팝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좋은 곡을 받아서 부르는 보컬리스트라 공감대가 많이 느껴졌다. 보컬리스트는 언제든 변화무쌍하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이 앨범에 담고 싶었던 건 힘이 가득 들어간 빡빡한 고음보다는 가사가 잘 들리기 위한 호흡, 감성이었다. 이를 위해 다른 부분을 참았다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고 부연했다.

앞으로의 모습 또한 '노래하는 김범수'일 거라고 했다. "사실 곡을 쓰면 저작권도 들어오고 참 좋지만"이라면서도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은 좋은 곡과 가사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누군가 멋있게 써놓은 곡을 훌륭한 연주자와 함께 협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멋있어지려고 억지로 곡을 쓰려고 하진 말자고 다짐했죠. 정말 전달하고 싶은 게 있으면 곡을 쓰게 될 테지만 앞으로도 그게 상업적인 느낌의 곡은 아닐 것 같아요."

데뷔 25주년을 맞은 소회를 묻자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덤덤하게 생각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25년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 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나' 싶었는데 막상 내가 되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앨범과 전국투어에서도 '25주년'이라는 말을 뺐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온 만큼 남았다고 생각한다. 간이역 중에 그래도 조금 큰 간이역 정도의 느낌인 것 같다. 눈 깜빡 해보니 여기에 와있는데 마치 긴 여행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의 여행이냐는 물음엔 "크루즈는 아니었지만 뗏목도 아니었다. 계속 바다 위에 떠있는 기분이 딱 맞는 것 같다. 난 바다를 좋아한다. 정말 변화무쌍하지 않냐. 시간이 다르게 변하고, 물이 빠졌다 들어오기도 하고, 파도가 치다가 잔잔해지기도 하고, 온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멀리서 보면 그냥 파란색인데 그 안에서는 많은 일렁임이 있지 않냐"고 답변했다.

여전히 '성장'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금 더 편안한 모습으로 변한 저를 받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저 음까지 도달할까', '어떻게 하면 애드리브를 수려하게 꺾어서 마무리할까' 이런 접근이 아닌, 곡에 담긴 가사를 어떻게 노래로써 청자에게 전달할까 고민하는, 성장하는 가수였으면 좋겠습니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