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eople] 건축가 김원 "동·서십자각 복원이 광화문광장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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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비용 들어도 언젠간 원형대로 복구돼야"
"서수상 발견은 행운…월대 복원 대체로 잘돼"
"지금 세검정 원래 모습 아냐…재복원할 대상" "광화문광장이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면, 동십자각과 서십자각까지 구색을 갖춰야 합니다.
"
원로건축가인 김원(81)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교통 문제 등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겠지만 동·서십자각이 원형대로 복구돼야만 비로소 광화문광장 복원이 완성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남쪽 담 모서리에 설치된 망루였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건립되면서 계단이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은 끝에 현재는 도로에 갇힌 섬이 됐다.
동십자각과 한 쌍을 이룬 서십자각은 아예 철거돼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김 대표는 지난 2018년부터 광화문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청사진을 그려온 인물. 지난해 10월 15일 일반 시민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를 보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월대는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 등 주요 건물에 설치한 넓은 대(臺)로,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건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백성이 만나 소통하는 장소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췄다가 100여 년 만에 복원됐다.
김 대표는 월대에 대해 "일제가 철거하기 전 사진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참고해서 했다면 큰 문제는 없다"며 "매일 아침저녁 그 앞을 지나다니며 유심히 지켜봤는데 (복원이) 잘 됐다고 본다"고 총평했다.
다만 광화문을 처음 만들 당시보다 바닥 높이가 1m쯤 높아지는 등 주변 환경이 달라진 점, 완전히 사라졌던 부분을 새로 만들다 보니 '묵은 맛'이 없는 점 등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들었다.
월대를 꾸미는 상서로운 동물 조각상이자 가장 앞부분에서 위용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수상(瑞獸像)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은 그가 꼽은 '화룡점정'의 순간.
월대 복원의 '마지막 퍼즐'로 여겨지던 서수상은 시민 제보를 통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결국 제 자리를 찾았다.
김 대표는 "새로 깎아서 만들려던 차에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였다며 "얼굴도 잘생기고 아주 좋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지난 2016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의 권유로 광화문시민위원회의 전신(前身)인 광화문포럼의 좌장을 맡게 된 그는 이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두고 각계 전문가, 시민들과 2년 가까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김 대표는 "왕복 10차로에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세종대로에 끼어 있던 과거 광화문광장은 '교통광장'으로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이 의도했던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인 데다, 현대 도시의 미학적 관점에서도 배려가 없는 '버려진 땅'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광화문 앞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보행자 전용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광화문포럼 멤버들 역시 '600년 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체됐다.
이후 광화문광장은 세종대로 서쪽 부분이 편입돼 넓어진 상태다.
당시에도 교통 전문가들은 '서울 시내 전체에 교통 대란을 유발할 수 있다'며 걱정이 컸던 반면, 역사학자들은 '기능적, 조형적 측면에서 월대가 꼭 필요하다'며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금도 택시 기사들로부터 "어떤 놈이 도로가 복잡해지게 이런 걸 했다"는 원성을 듣는다는 김 대표는 "그럴 때는 아무 소리 못 하고 가만히 있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경복궁 서쪽 서촌에서 반세기 가까이 살며 '동네 지킴이'를 자처해온 김 대표는 이 지역에 대해 '서울 역사의 상징이자 중심'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로 평가받는 영·정조시대 주역인 역관, 의관 등 중인 계급이 모여 살며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서울시가 오랫동안 개발 논리로 때려부수고 파헤쳐 서촌이 다 망가졌다"며 "옥인동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우리 집 앞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 왕실 재정을 관리하며 진상품을 검수하던 관청인 '내수사'가 있던 내수동은 그가 꼽은 대표적인 훼손 사례.
그나마 일부 구역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 한옥이 헐리지 않게 돼 관광객들이 한국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고 김 대표는 평가했다.
김 대표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세검정' 역시 재복원돼야 할 유적으로 꼽았다.
인조반정 때 반란군들이 광해군 폐위를 논의하고 사천(沙川)에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인 세검정은 1941년 인근 공장 화재로 소실돼 주춧돌만 남아있다가 1977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기반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생들이 소풍을 올 만큼 서울 근교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소였는데, 세검정도와 비교하면 정자의 위치, 모양 등이 상이하고, 마당을 둘러싼 담장과 산책로는 일절 복원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해방 후 한국화 1세대로 불리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종로구 옥인동 가옥에 개관한 '종로 구립 박노수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화백의 원서동 가옥처럼 "그나마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잘 보존하고 가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서수상 발견은 행운…월대 복원 대체로 잘돼"
"지금 세검정 원래 모습 아냐…재복원할 대상" "광화문광장이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면, 동십자각과 서십자각까지 구색을 갖춰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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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건축가인 김원(81)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교통 문제 등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들겠지만 동·서십자각이 원형대로 복구돼야만 비로소 광화문광장 복원이 완성된다"며 이같이 말했다.
동십자각은 경복궁 동남쪽 담 모서리에 설치된 망루였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건립되면서 계단이 철거되는 등 수난을 겪은 끝에 현재는 도로에 갇힌 섬이 됐다.
동십자각과 한 쌍을 이룬 서십자각은 아예 철거돼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김 대표는 지난 2018년부터 광화문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새로운 광화문광장의 청사진을 그려온 인물. 지난해 10월 15일 일반 시민에 공개된 광화문 월대를 보는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월대는 궁궐의 중심인 정전(正殿) 등 주요 건물에 설치한 넓은 대(臺)로, 궁궐 정문에 난간석을 두르고 기단을 쌓은 건 광화문 월대가 유일하다.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백성이 만나 소통하는 장소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췄다가 100여 년 만에 복원됐다.
김 대표는 월대에 대해 "일제가 철거하기 전 사진이 굉장히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대로 참고해서 했다면 큰 문제는 없다"며 "매일 아침저녁 그 앞을 지나다니며 유심히 지켜봤는데 (복원이) 잘 됐다고 본다"고 총평했다.
다만 광화문을 처음 만들 당시보다 바닥 높이가 1m쯤 높아지는 등 주변 환경이 달라진 점, 완전히 사라졌던 부분을 새로 만들다 보니 '묵은 맛'이 없는 점 등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들었다.
월대를 꾸미는 상서로운 동물 조각상이자 가장 앞부분에서 위용을 드러낸 것으로 추정되는 서수상(瑞獸像)을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 유족 측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은 그가 꼽은 '화룡점정'의 순간.
월대 복원의 '마지막 퍼즐'로 여겨지던 서수상은 시민 제보를 통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결국 제 자리를 찾았다.
김 대표는 "새로 깎아서 만들려던 차에 깜짝 놀랄만한 이벤트였다며 "얼굴도 잘생기고 아주 좋다"며 만족감을 표시했다.
지난 2016년 당시 박원순 서울시장의 권유로 광화문시민위원회의 전신(前身)인 광화문포럼의 좌장을 맡게 된 그는 이후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두고 각계 전문가, 시민들과 2년 가까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김 대표는 "왕복 10차로에 중앙분리대까지 있는 세종대로에 끼어 있던 과거 광화문광장은 '교통광장'으로 태조 이성계와 삼봉 정도전이 의도했던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인 데다, 현대 도시의 미학적 관점에서도 배려가 없는 '버려진 땅'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광화문 앞이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보행자 전용 공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광화문포럼 멤버들 역시 '600년 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해체됐다.
이후 광화문광장은 세종대로 서쪽 부분이 편입돼 넓어진 상태다.
당시에도 교통 전문가들은 '서울 시내 전체에 교통 대란을 유발할 수 있다'며 걱정이 컸던 반면, 역사학자들은 '기능적, 조형적 측면에서 월대가 꼭 필요하다'며 힘을 실어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금도 택시 기사들로부터 "어떤 놈이 도로가 복잡해지게 이런 걸 했다"는 원성을 듣는다는 김 대표는 "그럴 때는 아무 소리 못 하고 가만히 있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경복궁 서쪽 서촌에서 반세기 가까이 살며 '동네 지킴이'를 자처해온 김 대표는 이 지역에 대해 '서울 역사의 상징이자 중심'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로 평가받는 영·정조시대 주역인 역관, 의관 등 중인 계급이 모여 살며 자신들의 문화를 형성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서울시가 오랫동안 개발 논리로 때려부수고 파헤쳐 서촌이 다 망가졌다"며 "옥인동 재개발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웃 주민들이 우리 집 앞에서 집회를 하기도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조선시대 왕실 재정을 관리하며 진상품을 검수하던 관청인 '내수사'가 있던 내수동은 그가 꼽은 대표적인 훼손 사례.
그나마 일부 구역을 역사문화지구로 지정, 한옥이 헐리지 않게 돼 관광객들이 한국의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고 김 대표는 평가했다.
김 대표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세검정' 역시 재복원돼야 할 유적으로 꼽았다.
인조반정 때 반란군들이 광해군 폐위를 논의하고 사천(沙川)에 칼을 씻었다는 데서 유래한 지명인 세검정은 1941년 인근 공장 화재로 소실돼 주춧돌만 남아있다가 1977년 겸재 정선의 '세검정도'를 기반으로 다시 지어졌다.
그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생들이 소풍을 올 만큼 서울 근교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소였는데, 세검정도와 비교하면 정자의 위치, 모양 등이 상이하고, 마당을 둘러싼 담장과 산책로는 일절 복원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그는 해방 후 한국화 1세대로 불리는 남정 박노수 화백의 종로구 옥인동 가옥에 개관한 '종로 구립 박노수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춘곡 고희동 화백의 원서동 가옥처럼 "그나마 남아있는 것만이라도 잘 보존하고 가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