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고 있던 봄이 눈길 위에 미끄러졌다. 2월 말, 서울에서는 58년 만에 폭설이 내렸고, 강릉에는 70센티미터의 눈이 쌓였다. 쌓인 눈 속에서 이제 기지개를 켜려던 새싹이 잔뜩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우리는 이 눈이 봄을 기다리는 하얀 소식인 걸 알고 있다.

빙판 위에서 부쩍 줄어든 마찰력. 발레에서도 이런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들은 발레 < 지젤(Giselle, 1841) > 2막에서 윌리들의 수장, 미르타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물 흐르는 듯이 무대 위에서 이동하는 미르타의 모습은 마치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를 가로지는 것처럼 아무런 마찰력을 느낄 수 없다. 그 동작은 부레(bourré). 오른발과 왼발을 끊임없이 바꾸며 발걸음을 잘게 부서서 걷되, 머리와 어깨는 전혀 미동이 없기 때문에 관객의 눈에는 눈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미동 없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부레는 귀신인 윌리들에게 가장 잘 맞는 동작이라 할 수 있다.
발레 <지젤> 2막 중 미르타와 윌리들의 모습, photo by Cheryl Mann @Joffrey Ballet
발레 <지젤> 2막 중 미르타와 윌리들의 모습, photo by Cheryl Mann @Joffrey Ballet
그런데 부레 외에 실제로 미끄러지는 움직임을 표현한 발레 동작이 있다. 글리사드(glissade)이다. 글리사드는 단어 자체가 '미끄러지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두 다리와 발을 포갠 자세에서 한 다리를 뻗어서 옆으로 미끄러지듯이 밀어서 이동하다가 순간적으로 두 다리를 무릎까지 완전히 뻗는 모습을 보이고, 이어서 나머지 다른 한 다리를 미끄러지듯이 밀고 와서 두 다리와 발이 포갠 자세로 마무리한다. 바닥 위에서 미끄러지듯이 동작이 수행되기 때문에 글리사드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동작은 바닥에 거의 붙어서 하기도 하고 바닥에 몇 인치 떨어져서 점프 상태로 수행하기도 한다.
다양한 글리사드 연습 방법 @Ballet para todos
다양한 글리사드 연습 방법 @Ballet para todos
관객들이 작품을 보는 동안 글리사드를 눈치 채기 쉽지 않은 건 이 동작이 메인동작이 아니라 주요 동작들을 잇는 연결동작이기 때문이다. 보통은 하늘을 향해 180도 이상으로 다리를 뻗어 폭발적인 감정 상태를 표현하는 그랑 제떼(grand jeté)는 글리사드 이후에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글리사드가 일종의 도움닫기 동작인 것이다.
발레 <지젤> 중 그랑 제떼 모습, dance by Natalia Osipova, photo by Jack Devant @Bayerisches Staatsballett
발레 <지젤> 중 그랑 제떼 모습, dance by Natalia Osipova, photo by Jack Devant @Bayerisches Staatsballett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에서 그랑 제떼 모습, dance by Polina Semionova, photo by Jack Devant @Mikhailovsky Theatre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에서 그랑 제떼 모습, dance by Polina Semionova, photo by Jack Devant @Mikhailovsky Theatre
메인동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글리사드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각 메인동작들을 점이라고 한다면, 글리사드와 같은 연결동작은 그 점들이 흩어지지 않도록 이어서 춤이 하나의 선으로 표현되게 만든다.

‘미끄러진다’는 단어는 일상에서 많은 경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갖고 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이 미역국을 먹지 않고 찹쌀떡을 먹는 건 마음의 마찰력을 높여 시험에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뒤집어 놓고 생각해 보면 이렇다. 비행기가 활주로 위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면 날 수 없고, 한번도 무언가에서 미끄러지지 않은 사람은 더 높이 성장할 수 없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로 불리는 이유는 미끄러지는 것에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해주는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발레에서 글리사드가 제떼로 이어지게 해주는 힘이 있는 것처럼. 돌아보면 그때 미끄러져서, 실패해서 천만다행인 일도 있었다. 지금 누리고 갖고 있는 것 바탕에 그 실패가 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 봄은 찬 겨울과 얼음장 위에서 미끄러지다가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