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백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최상철 작가의 개인전 ‘귀환’.  백아트 제공
서울 백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최상철 작가의 개인전 ‘귀환’. 백아트 제공
원로 작가 최상철(78)에게는 평생의 고민이 있었다. 회화 이전에 존재하는 ‘최초의 회화’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작가의 인위적인 개입을 하나씩 소거해가며 탄생한 그의 작품들은 과학자들이 상상하는 우주 빅뱅의 모습과 닮았다.

서울 화동 백아트의 개인전 ‘귀환’에는 최 작가가 1980년대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작품 50여 점이 모여 있다. 반세기 가까이 무위(無爲)를 향해 떠나간 여정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자기 작품을 두고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려진 그림’이라고 자평했다. “태초의 회화는 모든 인간적인 행위가 사라진 순수한 자연의 상태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우연성이 그림을 그려주는 과정에서 저는 자연의 심부름꾼일 뿐이죠.”

1970년대 초 기하학적 추상화로 미술계에 입문한 최 작가는 단색조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 이강소, 권순철 등과 함께 ‘신체제’ 그룹전에 참여했고, 1981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작품을 전시했다. 둥근 돌, 날카로운 철사, 흩날리는 연필심 등 자신이 직접 고안한 도구들로 어떤 꾸밈도 없는 순수한 상태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처음 없앤 건 그의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물감을 머금은 돌멩이를 임의의 장소에 던지고, 수직으로 세워둔 막대기가 기우는 방향으로 붓질을 입혔다. 굵직한 대나무 막대기에 물감을 발라 찍어낸 흔적은 동양의 자연사상을 함축한 건곤감리를 떠올리게 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색을 지웠다. 빨강, 노랑, 파랑 등 원색의 아크릴 물감을 조합했던 그의 작품은 점차 검정 일색으로 나아갔다. 1995년 회화가 형형색색 빛나는 은하수를 연상하게 했다면, 이후 드로잉은 별들의 탄생 이전 칠흑 같은 암흑세계에 도달한 셈이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그는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300호 이상의 대형 캔버스에 1000여 번씩 ‘낯선 규칙’을 되풀이한다. 최근엔 물감을 화면 중앙에 쏟아놓고, 둥근 돌멩이가 굴러간 궤적을 그대로 담는 방식을 선보였다. 펜 대신 종이를 집어 들고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반나절 동안 종이를 들고 앉은 작가의 미세한 손 떨림 궤적을 화폭에 담았다.

우연에서 비롯한 최상철의 추상화는 ‘자연 상태’에 대한 힌트를 준다. 전시 제목처럼 그가 인간의 손길로부터 벗어난 자연으로 ‘귀환’한 결과다. 그의 근작들이 우주배경복사열 분포도, 또는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과 닮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 모른다. 전시는 3월 30일까지.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