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표 코 파주기'는 명함도 못 내밀어…극한의 '아부' 경쟁사 [김동욱의 역사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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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아버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범한 천재. 노동자의 친구이자 스승. 밝게 빛나는 태양과 같은 인간적 매력에 사회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 인물….”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과거 제정 러시아의 차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신문기사와 시(詩)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한 연설,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까지 ‘스탈린 찬양’은 소련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매일 1면에 ‘강철 같은 친애하는 지도자’에게 보내는 소련 시민들의 감사편지를 싣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흔히 스탈린 독재체제가 확립된 시기를 프라브다에서 스탈린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1929년 12월로 본다.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아부 경쟁이 벌어졌다.
10년 뒤인 1939년 12월 19일. 스탈린의 예순 번째 생일에 프라브다는 “지구상에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필적할만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자유의 횃불처럼 밝게 빛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투쟁의 깃발처럼 나부낀다.…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다! 스탈린은 당의 두뇌요 심장이다! 스탈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수백만 명의 기치다”라고 공표했다.
이후 그의 생일만 되면 낯뜨거운 찬양 문구가 신문 지상을 도배했다. 신문기사뿐 아니라 “모스크바는 잠들어 있다./ 깨어 있는 이는 오직 스탈린뿐/ 이 늦은 시각에~/ 스탈린은 우리를 생각한다./…초원의 작은 소년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크렘린의 답장을 받을 것이다.”같은 시(詩)가 줄줄이 발표됐다.
작가 알렉산드르 아브데옌코는 “모든 세대가 그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강하고 아름다우며 현명하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이름은 모든 공장에, 모든 기계에,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 그리고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는 아부성 표현으로 그를 기렸다.
공공장소에서 연설과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서도 ‘스탈린 찬양’은 빠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라는 선전대의 외침이 소련 곳곳에서 울렸다. 역법을 바꿔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 스탈린의 생일을 기준으로 삼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또다시 10년이 지난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맞이해선 전국에서 쏟아진 축하편지를 미처 감당하지 못한 프라브다가 1년 가까이 날마다 새로운 생일축하 편지를 전 국민에게 소개했다. 이 같은 프라브다의 1면 편지 보도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스탈린에게 찬양편지를 보낸 이로 소개된 사람 중에는 스탈린이 숙청해 시베리아 동토에서 연명 중인 죄수들도 있었다. 모스크바혁명박물관은 러시아 각지 공장과 탄광, 콜호스, 학교 등에서 보내온 생일축하 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선지자’의 ‘적통’계보를 만드는 동시에 자신 앞에 있던 3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소련 곳곳에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명이 잇따랐다.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해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크, 스탈린바트,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니시, 스탈리노오울 등의 도시가 들어섰다. 심지어 수도 모스크바를 ‘스탈린의 선물’이란 뜻의 ‘스탈린다르’로 바꾸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스탈린에 대한 아부는 비정치적 영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과학 법칙마저도 그의 비위에 맞게 조작됐다. ‘스탈린 동지의 위대한 영도력’으로 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군사 분야가 두각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연과학 법칙과 언어학의 법칙도 직접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1950년대 스탈린은 프라브다지를 통해 30여 년간 소련 마르크스주의 언어학 이론을 대표하던 N.Y.마르 학파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마르의 이론은 한순간에 밀려나고 언어철학 및 언어와 방언, 슬랭의 관계 등에 대한 스탈린의 의견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언어학자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또 “전 세계가 공산화될 경우, 사회주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언어가 사용될 것”이라는 스탈린의 생각도 소련 사회에서 반대의견을 찾을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게 됐다.
이와 함께 소위 “부패하고 썩은 자유주의”와 “근본 없는 세계주의”,“퇴폐적인 자본주의”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예술 분야에도 ‘건전한’ 스탈린 교시가 절대평가 기준이 됐다.
스탈린이 새로운 오페라 작품에 대해 비판하면 그 곡을 만든 작곡가는 전전긍긍해야 했고, 오시프 만델스탐을 비롯한 러시아의 유명 시인들은 앞다퉈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작품을 발표했다.
과학 분야에서도 부르주아의 사이비 과학으로 매도된 부분은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과학적 사실보다 이념이 우선시됐다. 기준은 다름아닌 스탈린의 마음, 스탈린의 말이었다.
진화론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당시 이미 부인됐던 후천적인 획득형질 유전설이 스탈린의 뒷배 아래 부활해 정설이 돼버린 것이다. 트로핌 리셴코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공산주의적 훈련 때문에 변형된 사회주의적 신인간이 무한히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며 스탈린에게 학문적 아부를 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리셴코에 반대했던 학자들은 무참히 숙청됐다.
이처럼 스탈린이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누리는 동안, 역설적으로 스탈린은 소련 사회의 실상과 실제를 접촉하고 인지할 기회를 빠르게 잃어갔다. 아첨꾼 및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스탈린은 그의 왕국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접하지 못했다.
게다가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크렘린을 나와 지방을 순시하는 일도 거의 없어지면서 이 같은 현상은 심화됐다. 스탈린에게는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윤택한 것처럼 조작된 지방 농부들의 삶이 담긴 영화필름이 소련농촌의 현실로 보고되곤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거세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친명계' 인사들의 과거 도를 넘는 아부성 발언과 행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코를 대신 파주는 아첨꾼만 살아남는 정글이 됐다"며 "아첨꾼, 거짓말쟁이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이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나빠질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과거 박찬대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 대표의 코를 만지는 듯한 사진이 재조명되고, 서울 도봉갑에 무연고인 안귀령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단수공천 된 가운데 안 부대변인이 유튜브에서 이상형으로 배우인 차은우 씨보다 이 대표를 고른 점 등이 소환되고 있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도한 아부성 행동과 발언은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 황당한 아부 릴레이 행태를 보면서 과거 스탈린 독재 치하의 웃지 못할 아부 경쟁 모습이 떠올라 몇 자 정리해 봤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
인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과거 제정 러시아의 차르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신문기사와 시(詩)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서 한 연설,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까지 ‘스탈린 찬양’은 소련 사회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였다. 공산당 기관지 프라브다는 매일 1면에 ‘강철 같은 친애하는 지도자’에게 보내는 소련 시민들의 감사편지를 싣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흔히 스탈린 독재체제가 확립된 시기를 프라브다에서 스탈린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1929년 12월로 본다. 이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아부 경쟁이 벌어졌다.
10년 뒤인 1939년 12월 19일. 스탈린의 예순 번째 생일에 프라브다는 “지구상에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필적할만한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탈린은 자유의 횃불처럼 밝게 빛나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투쟁의 깃발처럼 나부낀다.…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다! 스탈린은 당의 두뇌요 심장이다! 스탈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수백만 명의 기치다”라고 공표했다.
이후 그의 생일만 되면 낯뜨거운 찬양 문구가 신문 지상을 도배했다. 신문기사뿐 아니라 “모스크바는 잠들어 있다./ 깨어 있는 이는 오직 스탈린뿐/ 이 늦은 시각에~/ 스탈린은 우리를 생각한다./…초원의 작은 소년은 스탈린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크렘린의 답장을 받을 것이다.”같은 시(詩)가 줄줄이 발표됐다.
작가 알렉산드르 아브데옌코는 “모든 세대가 그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대의 이름은 강하고 아름다우며 현명하고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이름은 모든 공장에, 모든 기계에, 지구상의 모든 장소에, 그리고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는 아부성 표현으로 그를 기렸다.
공공장소에서 연설과 공산당의 각종 결정문, 문학비평과 과학실험 결과 발표에서도 ‘스탈린 찬양’은 빠지지 않았다. “스탈린은 현재의 레닌”이라는 선전대의 외침이 소련 곳곳에서 울렸다. 역법을 바꿔 예수의 생일이 아니라 스탈린의 생일을 기준으로 삼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또다시 10년이 지난 1949년 12월 스탈린의 70세 생일을 맞이해선 전국에서 쏟아진 축하편지를 미처 감당하지 못한 프라브다가 1년 가까이 날마다 새로운 생일축하 편지를 전 국민에게 소개했다. 이 같은 프라브다의 1면 편지 보도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기 직전까지 계속됐다.
스탈린에게 찬양편지를 보낸 이로 소개된 사람 중에는 스탈린이 숙청해 시베리아 동토에서 연명 중인 죄수들도 있었다. 모스크바혁명박물관은 러시아 각지 공장과 탄광, 콜호스, 학교 등에서 보내온 생일축하 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선지자’의 ‘적통’계보를 만드는 동시에 자신 앞에 있던 3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작업도 병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소련 곳곳에는 스탈린의 이름을 딴 도시명이 잇따랐다. 스탈린그라드를 비롯해 스탈린스크, 스탈리노고르스크, 스탈린바트, 스탈린스키, 스탈리노그라트, 스탈리니시, 스탈리노오울 등의 도시가 들어섰다. 심지어 수도 모스크바를 ‘스탈린의 선물’이란 뜻의 ‘스탈린다르’로 바꾸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스탈린에 대한 아부는 비정치적 영역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과학 법칙마저도 그의 비위에 맞게 조작됐다. ‘스탈린 동지의 위대한 영도력’으로 첨단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군사 분야가 두각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라 자연과학 법칙과 언어학의 법칙도 직접 바꾸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1950년대 스탈린은 프라브다지를 통해 30여 년간 소련 마르크스주의 언어학 이론을 대표하던 N.Y.마르 학파를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사회의 경제적 구조가 언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는 마르의 이론은 한순간에 밀려나고 언어철학 및 언어와 방언, 슬랭의 관계 등에 대한 스탈린의 의견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언어학자는 침묵을 강요받았다. 또 “전 세계가 공산화될 경우, 사회주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언어가 사용될 것”이라는 스탈린의 생각도 소련 사회에서 반대의견을 찾을 수 없는 대세로 자리 잡게 됐다.
이와 함께 소위 “부패하고 썩은 자유주의”와 “근본 없는 세계주의”,“퇴폐적인 자본주의”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예술 분야에도 ‘건전한’ 스탈린 교시가 절대평가 기준이 됐다.
스탈린이 새로운 오페라 작품에 대해 비판하면 그 곡을 만든 작곡가는 전전긍긍해야 했고, 오시프 만델스탐을 비롯한 러시아의 유명 시인들은 앞다퉈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작품을 발표했다.
과학 분야에서도 부르주아의 사이비 과학으로 매도된 부분은 연구가 진행되지 못했다. 과학적 사실보다 이념이 우선시됐다. 기준은 다름아닌 스탈린의 마음, 스탈린의 말이었다.
진화론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당시 이미 부인됐던 후천적인 획득형질 유전설이 스탈린의 뒷배 아래 부활해 정설이 돼버린 것이다. 트로핌 리셴코가 “획득형질이 유전된다”는 주장을 펼치며 공산주의적 훈련 때문에 변형된 사회주의적 신인간이 무한히 발전해 나갈 수 있다며 스탈린에게 학문적 아부를 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리셴코에 반대했던 학자들은 무참히 숙청됐다.
이처럼 스탈린이 신과 같은 절대권력을 누리는 동안, 역설적으로 스탈린은 소련 사회의 실상과 실제를 접촉하고 인지할 기회를 빠르게 잃어갔다. 아첨꾼 및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스탈린은 그의 왕국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를 접하지 못했다.
게다가 암살에 대한 두려움으로 크렘린을 나와 지방을 순시하는 일도 거의 없어지면서 이 같은 현상은 심화됐다. 스탈린에게는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윤택한 것처럼 조작된 지방 농부들의 삶이 담긴 영화필름이 소련농촌의 현실로 보고되곤 했다. 총선을 앞두고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공천을 둘러싼 불협화음이 거세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소위 '친명계' 인사들의 과거 도를 넘는 아부성 발언과 행적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의 코를 대신 파주는 아첨꾼만 살아남는 정글이 됐다"며 "아첨꾼, 거짓말쟁이들이 국회에 들어가면 이 나라는 지금보다 훨씬 나빠질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과거 박찬대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 대표의 코를 만지는 듯한 사진이 재조명되고, 서울 도봉갑에 무연고인 안귀령 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이 단수공천 된 가운데 안 부대변인이 유튜브에서 이상형으로 배우인 차은우 씨보다 이 대표를 고른 점 등이 소환되고 있는 것인데.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의, 과도한 아부성 행동과 발언은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 황당한 아부 릴레이 행태를 보면서 과거 스탈린 독재 치하의 웃지 못할 아부 경쟁 모습이 떠올라 몇 자 정리해 봤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