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창업자의 하나뿐인 손녀는 왜 재단서 나가야했나 [박동휘의 재계 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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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링(62)씨는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하나 밖에 없는 친손녀다. 미국에서 권총 사격 코치로 지내고 있는 그가 작년 말 방한해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다.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주요 내용이었다. 손녀를 위한 학비 1만 달러만 남긴 채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1964년 유한공고(현 유한대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던 그 시절 일화를 소개했다.
인터뷰 말미에 들어 있어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유일링씨는 의미 심장한 말을 하나 남겼다. ‘2026년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정신을 잘 계승해 가고 있나’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할아버지의 열정과 철학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 정신에 충실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일군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창업자의 직계를 재단에서 내보내려는 ‘쿠데타’는 지난해 초에도 재연됐다. 유씨는 똑같은 수법으로 유한학원 이사직마저 빼앗길 뻔했다. 유한공고 동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유한재단 이사직은 유지했지만 최근 유한양행에선 유씨의 우려가 기우만이 아니라는 듯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각종 루머에 대한 내부 고발이 이어지고, 특정 ‘계파’가 상왕(上王)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유한양행 경영진은 이달 주주총회에 회장직을 신설하는 내용의 정관변경안을 제출한 상태다. 회사 측은 특정인이 회장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의 위상에 맞게 대표이사 사장으로 돼 있는 정관을 대표이사 회장으로 바꾸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유한양행의 전문 경영인들은 최장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이런 이유로 유한양행은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생’으로 통했다. 하지만 유일링씨를 유한재단 이사회에서 배제한 ‘사건’은 유한양행 임직원 대부분이 모를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다.
유한재단 이사회는 유한양행 전현직 직원들로 채워졌다. 전 한국은행 총재인 김중수 이사장을 포함한 10명의 이사 중 6명이 유한양행 관계자다. ‘특수관계인 20%룰’을 적용 받아 이사회에 들어간 이정희 유한양행 이사회 의장,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 외에도 유한양행 합작회사인 쉐링프라우 전 사장를 비롯해 유한양행에 몸담았던 전무, 이사, 부장 등이 대거 이사회에 들어 있다. 2인의 감사 중 한 명도 유한양행 출신이다.
특수관계인 20%룰은 이사회 구성원 중 20%는 특수관계인인 유한양행에서 파견할 수 있도록 한 공익재단 관련 법령이다. 재단과 기업 간 유기적인 관계를 감안하되, 재단을 통해 기업을 실질 지배할 수 없도록 파견 이사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게다가 유한양행은 전직 직원을 대거 유한재단에 입성시킴으로써 사실상 재단을 통한 기업 지배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재계 관계자는 “현행 공익재단 관련 법령은 창업자 등 특수 관계인이 기업 지배를 위해 재단을 편법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며 “상속세 개편 논의에서 재단을 통한 가업 상속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자칫 유한양행과 같은 사례가 합리적인 토론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인터뷰 말미에 들어 있어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유일링씨는 의미 심장한 말을 하나 남겼다. ‘2026년 100주년을 맞는 유한양행은 창업주의 정신을 잘 계승해 가고 있나’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할아버지의 열정과 철학에 동의하고 실천하는 분들이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 정신에 충실했던 전문 경영인들이 일군 시스템과 거버넌스가 계속해서 유지, 발전되고 있는지 지켜보고 있다”
재단에서 쫓겨난 창업자 후손
한국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기 약 2년 전인 2022년 1월 유씨는 뜻하지 않은 ‘사건’을 당한 터였다. 임기만료를 이유로 유한재단 이사직을 상실했다. 유씨를 포함해 4명의 임기가 종료됐는데 유씨만 유일하게 재임명 대상에서 제외됐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때였다. 유씨는 할아버지의 창업정신과 유지를 잇는 유한재단에서 ‘해고’됐음을 미국에서 알았다. 유한재단은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15.92%)다. 2대 주주는 국민연금이다.창업자의 직계를 재단에서 내보내려는 ‘쿠데타’는 지난해 초에도 재연됐다. 유씨는 똑같은 수법으로 유한학원 이사직마저 빼앗길 뻔했다. 유한공고 동문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유한재단 이사직은 유지했지만 최근 유한양행에선 유씨의 우려가 기우만이 아니라는 듯 기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각종 루머에 대한 내부 고발이 이어지고, 특정 ‘계파’가 상왕(上王)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유한양행 경영진은 이달 주주총회에 회장직을 신설하는 내용의 정관변경안을 제출한 상태다. 회사 측은 특정인이 회장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의 위상에 맞게 대표이사 사장으로 돼 있는 정관을 대표이사 회장으로 바꾸는 것일 뿐이라고 해명하고 있지만,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인없는 회사의 역설
유한양행은 한국 기업사(史)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갖고 있다. 유일한 박사는 1936년 회사를 종업원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소유와 경영을 엄격히 분리했다. 한국 주식회사 역사상 첫 사례다. 경영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유일한 박사 일가는 재단 일에만 관여했다. 회사를 사회에 환원한다는 정신에 따라 유한양행에 근무했던 큰아들도 내보냈다. 1969년의 일이다.이 같은 전통을 이어받아 유한양행의 전문 경영인들은 최장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명예롭게 은퇴했다. 이런 이유로 유한양행은 기업 지배구조의 ‘모범생’으로 통했다. 하지만 유일링씨를 유한재단 이사회에서 배제한 ‘사건’은 유한양행 임직원 대부분이 모를 정도로 은밀히 진행됐다.
유한재단 이사회는 유한양행 전현직 직원들로 채워졌다. 전 한국은행 총재인 김중수 이사장을 포함한 10명의 이사 중 6명이 유한양행 관계자다. ‘특수관계인 20%룰’을 적용 받아 이사회에 들어간 이정희 유한양행 이사회 의장,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 외에도 유한양행 합작회사인 쉐링프라우 전 사장를 비롯해 유한양행에 몸담았던 전무, 이사, 부장 등이 대거 이사회에 들어 있다. 2인의 감사 중 한 명도 유한양행 출신이다.
특수관계인 20%룰은 이사회 구성원 중 20%는 특수관계인인 유한양행에서 파견할 수 있도록 한 공익재단 관련 법령이다. 재단과 기업 간 유기적인 관계를 감안하되, 재단을 통해 기업을 실질 지배할 수 없도록 파견 이사의 수를 제한하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재단을 통한 기업 지배 악용 사례”
이와 관련해 현 유한양행 경영진은 20%룰의 취지를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유일한 정신’을 이어 받은 재단의 특수성을 유지하려면 창업자 후손이 20%룰의 적용을 받아야 한다. 유일링씨의 축출이 ‘비상식적’으로 비춰지는 이유다. 이는 빌&멀린다 재단에서 창업자인 빌게이츠의 후손을 내보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정희 의장 혹은 조욱제 대표가 자신의 재단 이사 자리를 유일링씨에게 맡기는 것이 합당한 조치라는 지적이 나온다.게다가 유한양행은 전직 직원을 대거 유한재단에 입성시킴으로써 사실상 재단을 통한 기업 지배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재계 관계자는 “현행 공익재단 관련 법령은 창업자 등 특수 관계인이 기업 지배를 위해 재단을 편법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며 “상속세 개편 논의에서 재단을 통한 가업 상속이 논의되고 있는 만큼 자칫 유한양행과 같은 사례가 합리적인 토론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