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를 이토록 천박하게 이해하다니” ‘소련 작가’가 서방을 향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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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은아의 탐나는 책
알렉세이 유르착,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김현주 최대연 편집, 홍원기 외주편집)
알렉세이 유르착,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
김수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9(김현주 최대연 편집, 홍원기 외주편집)
내 친구 D는 러시아계 캐나다인이다. 그는 요란스런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좋아하고, 몸살이 나면 샌드위치를 먹는다. 그에겐 머저리 같은 하류 인생이라고 욕하면서도 하루걸러 만나서 보드게임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 모순 없는 의미로 가득한 것보단, 차라리 무의미한 것을 재미있어했던 그는 어느 날 주인에게 성대를 거세당한 개가 부엌에서 작은 불씨를 보고 가족들에게 알리려 죽어라 짖는 시늉을 했지만 아무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해 결국 집이 몽땅 불타버린다는 내용의 곡을 쓰곤, 음흉하고도 서글픈 미소를 띠고 동네 사람들 사이를 거닐며 그 노래를 완창했다. 그의 조부는 소비에트 시절 어느 평범한 공동주택의 계단참에서 총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D가 울음인지 헷갈리는 웃음을 지으며 상기된 목소리로 들려준 이야기다.
언어학자 이즈쓰 도시히코는 <러시아적 인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따라) 러시아인을 ‘지하실의 주인’이라고 일컫는다. “러시아적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지하실의 주인이며, 나아가 러시아 문학 전체(따라서 또 러시아 그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지하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지하실이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암흑 속에서도 한낮의 세계는 꿈에도 모를 맹렬한 환희가, (…) 정열이 끓어오르고 있다.”(22) 한데 이 지하실이란 속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땅의 광활한 대자연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 자연의 끝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연은 한계를 모른다. (…) 러시아의 자연은 모든 것에 선명한 윤곽과 분명한 한계를 보이는 그리스의 자연과 대조적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무한함이란 그야말로 불완전함과 추악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인에게 한계는 자유의 속박, 즉 악을 의미한다. 한계를 곧 추악함이라 여긴 것이다. 만약 눈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자기 머리로 벽을 들이박으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벽을 용인할 수 없다는, 이른바 ‘지하실적 인간’의 역설적인 열정이 여기서 비롯되었다.”(27)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이란 책 제목은 그 역설적 조화, 탈영토화된 존재 방식, 끈질긴 한계의 부정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인류학자 알렉세이 유르착이 후기 소비에트 세대의 삶을 성찰한 이 책은, 소련이란 강력한 사회 시스템이 한순간 붕괴해버린 대사건이 어떻게 그처럼 갑작스런 충격이었던 동시에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일 수 있었는지, 그러는 사이 시스템 내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고 있었는지를 돌아보며 그 시절 소련인의 ‘재미있는 삶’―“다수 인민의 삶 속에 만연했던 ‘징후적인 예외들’”(626)을 밀착 서술한다. 소비에트 시스템은 “영원한 동시에 꾸준히 쇠퇴했고, 생기가 넘치는 동시에 황량했으며, 고귀한 이념들을 좇는 동시에 그것들을 잃어버렸다”.(527)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역설 안에서 “새로운 의미, 시간성, 공동체, 활동, 관심, 미적 형식, 전문 지식, 즉 새로운 의미의 우주 전체”(291)를 탄생시켰다.
스스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저자는 자신이 경험 중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설명할 방법을 찾아 서른 살이 되던 1990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비에트에 관한 서방의 천박한 이해 수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618)고 한다. “소비에트의 주체성을 ‘재인간화rehumanize’하는 것”(619)이 집필 목적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이 책의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는 흥미롭고 생생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끊임없이 같은 사람을 보여주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근래의 뉴스들보다 더 현재적이기까지 하다. 지금 러시아인은 어쩌고 있을까? 유르착이 그리는 몰락과 붕괴의 시기 사회상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해,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 인류에 대해 궁금해해야 할 게 더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영원하게만 보이는 지금,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우리의 관점으로.
언어학자 이즈쓰 도시히코는 <러시아적 인간>에서 (도스토옙스키를 따라) 러시아인을 ‘지하실의 주인’이라고 일컫는다. “러시아적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지하실의 주인이며, 나아가 러시아 문학 전체(따라서 또 러시아 그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지하실’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지하실이 어둡고 우울하기만 한 건 아니다. 암흑 속에서도 한낮의 세계는 꿈에도 모를 맹렬한 환희가, (…) 정열이 끓어오르고 있다.”(22) 한데 이 지하실이란 속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땅의 광활한 대자연에 대한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러시아 자연의 끝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이러한 자연은 한계를 모른다. (…) 러시아의 자연은 모든 것에 선명한 윤곽과 분명한 한계를 보이는 그리스의 자연과 대조적이다. 고대 그리스인에게 무한함이란 그야말로 불완전함과 추악함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인에게 한계는 자유의 속박, 즉 악을 의미한다. 한계를 곧 추악함이라 여긴 것이다. 만약 눈앞에 벽이 가로막고 있다면 자기 머리로 벽을 들이박으며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그 벽을 용인할 수 없다는, 이른바 ‘지하실적 인간’의 역설적인 열정이 여기서 비롯되었다.”(27)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이란 책 제목은 그 역설적 조화, 탈영토화된 존재 방식, 끈질긴 한계의 부정을 절묘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인류학자 알렉세이 유르착이 후기 소비에트 세대의 삶을 성찰한 이 책은, 소련이란 강력한 사회 시스템이 한순간 붕괴해버린 대사건이 어떻게 그처럼 갑작스런 충격이었던 동시에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일 수 있었는지, 그러는 사이 시스템 내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도대체 어쩌고 있었는지를 돌아보며 그 시절 소련인의 ‘재미있는 삶’―“다수 인민의 삶 속에 만연했던 ‘징후적인 예외들’”(626)을 밀착 서술한다. 소비에트 시스템은 “영원한 동시에 꾸준히 쇠퇴했고, 생기가 넘치는 동시에 황량했으며, 고귀한 이념들을 좇는 동시에 그것들을 잃어버렸다”.(527) 그리고 사람들은 그 역설 안에서 “새로운 의미, 시간성, 공동체, 활동, 관심, 미적 형식, 전문 지식, 즉 새로운 의미의 우주 전체”(291)를 탄생시켰다.
스스로 ‘소비에트의 마지막 세대’에 속하는 저자는 자신이 경험 중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설명할 방법을 찾아 서른 살이 되던 1990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비에트에 관한 서방의 천박한 이해 수준에 큰 충격을 받았다”(618)고 한다. “소비에트의 주체성을 ‘재인간화rehumanize’하는 것”(619)이 집필 목적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이 책의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는 흥미롭고 생생하다. 그래서 어떤 면에선 끊임없이 같은 사람을 보여주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근래의 뉴스들보다 더 현재적이기까지 하다. 지금 러시아인은 어쩌고 있을까? 유르착이 그리는 몰락과 붕괴의 시기 사회상은 오늘날의 러시아와 러시아인에 대해,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들을 포함한 우리 인류에 대해 궁금해해야 할 게 더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영원하게만 보이는 지금,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우리의 관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