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와인을 즐겨 마신다. 예전엔 소주 아니면 맥주였고 위스키는 가끔 마셨다. 최근엔 와인이 당기는데 그 이유는 나도 모른다. 대충 가늠해보면 나이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맥주는 배가 부르다. 따라서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더부룩해 기분이 나쁜 경우가 종종 있다. 배는 부른데 취기가 올라오면 기분 좋으라고 마신 술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나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소주는 마시긴 하지만 이건 좀 사람 심성을 거칠고 공격적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나이가 있고 체면이 있지 소주 마시곤 주변 사람들에게 공격적이 되면 곤란하다. 물론 맥주나 소주 모두 마시지만 혼자 간단히 홀짝일 땐 와인이 좋다는 이야기다.

청음실에 이러면 안 되는걸 알지만 작은 와인 셀러를 하나 구비했다. 여덟 병정도 들어가는 국민 와인 셀러다. 아는 와인샵에 주문해 넣어두고 가끔 지인들 오면 대형 스크린으로 유튜브 음악 영상 틀어놓고 마신다. 물론 자주 마시면 곤란하다. 안 그래도 청음실이자 일하는 곳인데 자주 이러면 오늘 일을 내일로, 내일 일을 모레로 미루게 된다. 나의 경우 와인도 숙취가 꽤 있는 편이다.
청음실 와인셀러/필자 제공
청음실 와인셀러/필자 제공
내가 와인에 관심이 많은 걸 아는 지인이 최근엔 어디를 함께 가자고 한다. 다름 아니라 와인 시음회다. 단순 시음하고 노는 건 아니고 간단한 스터디도 있다고 한다. 무엇이든 공부해서 알고 경험하는 건 음악이나 오디오나 마찬가지로 훨씬 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그런데 가보니 강의를 꽤 오래 하신다. 시음하는 와인은 미국 나파밸리 지역에서 재배하고 그 곳에 와인 와이너리까지 보유한 곳에서 생산한다고 한다. 브랜드 이름은 프로몬토리. ‘잃어버린 붉은 그림자’, 나파 밸리 화재에서 살아 돌아온 바로 그 컬트 와인이다.
프로몬토리/필자 제공
프로몬토리/필자 제공
강의 중에 스탭이 돌아다니면서 2017, 2018, 2019년산 총 세 종류 와인을 한 잔씩 따라주는데 연도만 다르지 동일한 와이너리에서 생산된 와인들이다. 재밌는 건 나중에 알게 된 가격이 꼭 오래된 것이 좋은 것도, 가장 최근 생산된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다. 내가 맛보기엔 2018년산이 가장 좋았던 듯하다. 왜 그럴까? 의문이 들지만 이건 와이너리 대표도 모를 일일 것이다. 자신들이 가공했지만 결국 자연이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결국 여러 조건들이 변화무쌍하게 서로 엮여서 이뤄낸 게 아닐까. 어차피 소진되고 나면 모두 잊힐 것들이지만 소멸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오디오도 마찬가지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지는 것들이 아쉬울 때가 많다. 최신형이 무조건 좋다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물론 디지털 소스 기기는 요즘 제품이 좋지만 과거에 만들어진 아날로그 기기나 패시브 스피커는 여전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좋은 소리를 낸다. 물론 보관 상태가 좋다는 전제가 있다. 최근 JBL이 과연 과거의 마그넷과 혼과 네트워크를 능가할 수 있을까? 과연 최근의 소너스 파베르가 프랑코 세블린이 이끌고 만들었던 당시 일렉타 아마토르나 익스트리마, 아니면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 등 오마주 시리즈를 능가할 수 있을까?
소너스 파베르 Stradivari Homage
소너스 파베르 Stradivari Homage
오디오에서도 빈티지라는 장르가 있는 건 나름 그 존립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현대 문명에 대한 저항도 아니며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감상적인 슬로건도 아니다. 제임스 B. 랜싱도 자금난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앗아갔지만 그런대로 지금보단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던 시절의 열기를 품고 싶은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실제로 K2 9500의 그 날렵한 혼과 그 위, 아래로 떡 벌어진 우퍼의 위용을 보면 바워스&윌킨스의 그 황제 디자인도 울고 갈 아메리칸 사운드의 기개가 느껴졌다. 에베레스트 시리즈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 이전의 파라곤과 하츠필드는 단순히 오디오라는 음향 재생 기기라기보다는 일종의 예술 작품에 가까웠다. 음향 기기를 통해 예술혼을 불태운 엔지니어라는 아이러니가 하이엔드 오디오라는 무브먼트를 추동했다.
JBL Paragon
JBL Paragon
많은 전통의 강호들이 중국 자본에 넘어갔고 지금도 넘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선 사모 펀드 등 자본가들이 오디오 브랜드를 사들이곤 한다. 그리고 왕국을 만든 다음 맛있게 포장해 몇 년 후 다시 되파는 식으로 자본을 불리는 사례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척 자연스럽고 흔한 일들이다. 하지만 하이엔드 오디오만큼은 독립적인 회사로 남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투자자와 주주들의 압박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예술혼은 다 날아가 버리고 마치 산화된 와인이나 김빠진 맥주가 되는 모습을 보긴 싫다.

자 그러면 위에서 말한 와인, 즉 2017, 2018, 2019년산의 가격순은 과연 자본주의적 계산법으로 순위를 매기면 그 결과는 어떨까? 정답은 2018>2017>2019다. 내가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 2018년이 1위고 가장 비쌌다. 그 다음으로는 가장 오래된 2017년산이 그 다음으로 비쌌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이라고 볼 수 있는 2019년산이 상대적으로 가장 저렴하다. 물론 상대적일 뿐이며 모두 평소 내 돈 내고 사 마시긴 모두 한 병에 1천 달러 이상의 고가 와인들임을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오디오와 와인을 정말 공정하게 동일선상에서 놓고 비교하는 건 넌센스다. 뿐만 아니라 약 1년 정도의 숙성 차이를 두고 있는 와인과 수십년 차이를 두고 벌어지는 기술과 디자인, 인터페이스 전쟁터 오디오와는 분명 다른 면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오나 와인이나 꼭 최신형이 좋으란 법은 없다. 무릇 적당히 오래되어 사람과 오디오 사이에 간극이 좁아지고 친근해지며 세월의 먼지와 더께가 얹혀졌을 때 오디오는 음향이 아닌 음악을 들려준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에이징의 차이를 믿지 않고 또 수많은 사람들이 에이징의 차이를 믿고 있지만 나는 후자다. 적당히 익은 우퍼와 적당히 익은 케이블을 좋아한다. 박스를 개봉해 헤드셀에 장착하고 처음 들었던 소리보단 한 달 후에 들어본 카트리지가 경험상 더 좋은 소리를 낸다. 자세히 들어보면 매일 매일이 다른 경우도 있다. 모두 상승 곡선을 타다가 어느 때부턴가 내리막길을 간다는 면에선 와인이나 오디오나 인간이나 비슷하다. 한 잔의 술과 오디오에서도 인생을 배운다.
최근 구입한 와인/필자 제공
최근 구입한 와인/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