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하는 공예가는 버려진 도토리·곤충 허물로 '영원한 쓸모'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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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산책만큼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있을까? ‘걷기의 즐거움’을 이야기한 여행서, 인문서, 소설이 참으로 많다. 많은 예술가, 철학자들이 그만큼 전원을 거닐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걷기의 시간으로 마음을 위로받고 영감을 얻었다. 제인 오스틴, 헨리 데이비드 소로, 장 자크 루소, 빅토르 세갈렌, 피에르 쌍소, 랭보, 스티븐슨, 찰스 디킨스, 에밀리 브론테, 마크 트웨인, 조지 엘리엇, E. M. 포스터, 버지니아 울프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들은 모두 걷기 예찬론자들이다. 이들은 운동 차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는 방편으로서의 걷기, 현대의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걷기, 사색과 명상으로의 걷기에서 자기 삶과 예술을 만들어 간 사람들이다.
꾸준하게 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길을 걷다 보면, 육체가 건강해짐은 물론 흐트러진 마음이 정돈된다. 조용하게 사색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몰입했던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도심에 자리한 공예가들의 작업장은 대부분 좁고 어눅하다. 작은 작업 테이블에 의자를 바짝 끌어 붙여 앉아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다종다양한 손도구를 미끄러지지 않게 꼭 쥐고 재료와 씨름하듯 작업하다 보면 힘준 손, 손목에 쥐가 나는 듯 아려온다. 이 자세대로 몸이 굳을 듯한 느낌도 든다. 방편으로 공예가들은 작업 사이사이 주변을 산책하는 이가 많다. 몸도 풀고 마음도 푸는 시간이다. 길을 걸으며 경직된 몸도 풀고 가슴에 맑은 숨도 채우지만, 공예가의 산책이 갖는 유용은 그뿐만이 아니다. 운이 좋으면 새로운 재료와 소재를 찾기도 한다.
‘스튜디오 포(Studio foh)’의 작업실은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끝자락에 있다. 북한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형성된 우이동 계곡이 근저이며, 1700년대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벚나무가 이웃이다. 작가는 주로 산책과 여행에서 다양한 식생물을 수집한다. 계곡과 주변 숲길을 걸으며 사시사철마다 다른 날씨와 식생을 유심히 그리고 애정 있게 살핀다. 사계절 푸르른 자생 소나무를 비롯해 계절마다 다른 모양과 색으로 변하는 산사나무, 화살나무, 자귀나무 등을 살핀다. 종류 다른 나무의 나뭇잎, 가지, 열매를 살폈다가 알맞은 것을 수집해 작업실로 돌아온다. 돌과 꽃, 도토리, 솔방울, 버섯류도 작가의 수집 목록이다. 수집한 것을 작업실에 돌아와 작업대 한편에 두고 보기도 하다가, 여럿이 모이면 종류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모아둔 것들이 영감이 되고 금속으로 제작할 사물의 원형이 된다. 예로, 같은 도토리라도 크기가 작으면 귀이개나 과일꼬치 끝에 매달 장식물이 된다. 도토리의 크기가 크면 포크나 수저 등의 커트러리 손잡이 장식, 가구 손잡이로도 디자인을 바꾼다. 비례에 따라, 사물의 용도에 따라 선택할 수집품이 달라진다. 작가가 만들 디자인이 우선이 아니라 수집한 자연물, 사물이 사물 제작의 기본 조건이다. 작가가 만드는 방식은 수집물을 원형으로 틀을 제작한 후 은을 녹여 붓는 금형의 방식이거나 은을 얇게 두드려 만드는 방식이다. 원하는 크기를 먼저 정할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선조건이 붙는 작업이다. 이에 작가의 산책은 도처에 널려 있는 것 같지만, 적절한 것을 찾는 탐색과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일이다. 나아가 알맞은 것을 염두에 두고 나선 길이라도 의외인 것, 더 나은 것을 발견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깨닫는 수행과도 같은 시간이다. 그것이 작가가 혼자서도 작업을 진척시키고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재미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고 작가가 자연을 재료나 소재로 쓸 것을 구하는 유용의 대상 혹은 즐김으로만 여기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연물뿐 아니라 여행을 가서도 시장, 빈티지 가게 등을 들려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한다. 누군가 사용하다 어떤 경로로 매대 위에 올랐을지 모를 빗이나 거울, 머리핀 등을 보며 이름 모를 소유자의 취향이나 삶, 사연 등을 가늠해 보는 것은 세월 묵은 유일한 사물들에서만 얻을 재미다. 깨끗하고 형태 반듯한 새것도 좋지만, 흥미롭지 않다. 묵은 것, 닳은 것, 색이 바란 것, 남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관심이 가는 마음은 작가가 산책하며 죽은 나무의 나이테나 생을 다한 곤충이나 허물을 보듬는 마음과 같다. 그의 은(銀)사물은 금속 공예가들이 만드는 쥬얼리와 재료와 같고 작고 세밀하기도 못지않다. 누군가 생각하기에 ‘귀중품’ 내지 ‘사치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튜디오 포의 사물은 만든 이의 소소한 취향과 따뜻한 마음이 화려함을 앞선다. 세심한 표현, 소소한 사물의 감성이 사용자가 일상에서 차를 마시고, 식사하고, 읽던 책의 장을 표시하는 책갈피 등등 다채로운 용도로 사용하는 동안 귀하게 오래 간직하고픈 마음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대학 시절,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작업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했다. ‘모든’이라는 표현 안에는 작은 것이라도 사사로이 여기지 않는 마음, 흠이 있어도 그것을 덮을 더 큰 아름다움을 찾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그것이 작가가 뒷산과 계곡을 산책하고 여행하는 동안 사람, 자연 미물과의 교감 그리고 오랜 사물들이 품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근본적인 태도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작가를 오래 수집가로, 관찰자로, 공예가로 살게 하는 힘일 테고.
썩어 사라질 것, 버려진 것들의 표면을 금속으로 덧입히고 솜씨를 부려 새로운 용도, 아름다운 유용으로 부여하는 일은 계절별로 길에 나서 길가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나뭇잎과 꽃, 돌, 생물에게 말을 걸고 발견하는 모든 것은 ‘걷기’에서 시작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랴. 스스로 좋아해서 하는 일, 나와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는 일, 손재주와 감각을 발휘하여 먹고 사는 소소한 일이다. 그러나 공예가의 일이란 저만 좋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즐거움과 위안, 필요함까지 채워주는 일이니 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일인가. /홍지수 크래프트믹스 대표
꾸준하게 땅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길을 걷다 보면, 육체가 건강해짐은 물론 흐트러진 마음이 정돈된다. 조용하게 사색하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몰입했던 문제로부터 빠져나올 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에서 해법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다. 도심에 자리한 공예가들의 작업장은 대부분 좁고 어눅하다. 작은 작업 테이블에 의자를 바짝 끌어 붙여 앉아 같은 자세로 몇 시간을 보내기 일쑤다. 다종다양한 손도구를 미끄러지지 않게 꼭 쥐고 재료와 씨름하듯 작업하다 보면 힘준 손, 손목에 쥐가 나는 듯 아려온다. 이 자세대로 몸이 굳을 듯한 느낌도 든다. 방편으로 공예가들은 작업 사이사이 주변을 산책하는 이가 많다. 몸도 풀고 마음도 푸는 시간이다. 길을 걸으며 경직된 몸도 풀고 가슴에 맑은 숨도 채우지만, 공예가의 산책이 갖는 유용은 그뿐만이 아니다. 운이 좋으면 새로운 재료와 소재를 찾기도 한다.
‘스튜디오 포(Studio foh)’의 작업실은 서울 북한산국립공원 끝자락에 있다. 북한산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형성된 우이동 계곡이 근저이며, 1700년대부터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래된 벚나무가 이웃이다. 작가는 주로 산책과 여행에서 다양한 식생물을 수집한다. 계곡과 주변 숲길을 걸으며 사시사철마다 다른 날씨와 식생을 유심히 그리고 애정 있게 살핀다. 사계절 푸르른 자생 소나무를 비롯해 계절마다 다른 모양과 색으로 변하는 산사나무, 화살나무, 자귀나무 등을 살핀다. 종류 다른 나무의 나뭇잎, 가지, 열매를 살폈다가 알맞은 것을 수집해 작업실로 돌아온다. 돌과 꽃, 도토리, 솔방울, 버섯류도 작가의 수집 목록이다. 수집한 것을 작업실에 돌아와 작업대 한편에 두고 보기도 하다가, 여럿이 모이면 종류와 크기와 형태에 따라 분류하기도 한다. 모아둔 것들이 영감이 되고 금속으로 제작할 사물의 원형이 된다. 예로, 같은 도토리라도 크기가 작으면 귀이개나 과일꼬치 끝에 매달 장식물이 된다. 도토리의 크기가 크면 포크나 수저 등의 커트러리 손잡이 장식, 가구 손잡이로도 디자인을 바꾼다. 비례에 따라, 사물의 용도에 따라 선택할 수집품이 달라진다. 작가가 만들 디자인이 우선이 아니라 수집한 자연물, 사물이 사물 제작의 기본 조건이다. 작가가 만드는 방식은 수집물을 원형으로 틀을 제작한 후 은을 녹여 붓는 금형의 방식이거나 은을 얇게 두드려 만드는 방식이다. 원하는 크기를 먼저 정할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을 기준으로 선조건이 붙는 작업이다. 이에 작가의 산책은 도처에 널려 있는 것 같지만, 적절한 것을 찾는 탐색과 발견의 즐거움이 있는 일이다. 나아가 알맞은 것을 염두에 두고 나선 길이라도 의외인 것, 더 나은 것을 발견하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보고 깨닫는 수행과도 같은 시간이다. 그것이 작가가 혼자서도 작업을 진척시키고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원동력이자 재미 같은 것이리라.
그렇다고 작가가 자연을 재료나 소재로 쓸 것을 구하는 유용의 대상 혹은 즐김으로만 여기 것은 아니다. 작가는 자연물뿐 아니라 여행을 가서도 시장, 빈티지 가게 등을 들려 오래된 물건들을 수집한다. 누군가 사용하다 어떤 경로로 매대 위에 올랐을지 모를 빗이나 거울, 머리핀 등을 보며 이름 모를 소유자의 취향이나 삶, 사연 등을 가늠해 보는 것은 세월 묵은 유일한 사물들에서만 얻을 재미다. 깨끗하고 형태 반듯한 새것도 좋지만, 흥미롭지 않다. 묵은 것, 닳은 것, 색이 바란 것, 남이 사용했던 물건들에 관심이 가는 마음은 작가가 산책하며 죽은 나무의 나이테나 생을 다한 곤충이나 허물을 보듬는 마음과 같다. 그의 은(銀)사물은 금속 공예가들이 만드는 쥬얼리와 재료와 같고 작고 세밀하기도 못지않다. 누군가 생각하기에 ‘귀중품’ 내지 ‘사치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스튜디오 포의 사물은 만든 이의 소소한 취향과 따뜻한 마음이 화려함을 앞선다. 세심한 표현, 소소한 사물의 감성이 사용자가 일상에서 차를 마시고, 식사하고, 읽던 책의 장을 표시하는 책갈피 등등 다채로운 용도로 사용하는 동안 귀하게 오래 간직하고픈 마음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대학 시절, 세상의 모든 자연물이 작업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알았다 했다. ‘모든’이라는 표현 안에는 작은 것이라도 사사로이 여기지 않는 마음, 흠이 있어도 그것을 덮을 더 큰 아름다움을 찾는 마음이 있는 것이라. 그것이 작가가 뒷산과 계곡을 산책하고 여행하는 동안 사람, 자연 미물과의 교감 그리고 오랜 사물들이 품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근본적인 태도라는 생각이다. 그것이 작가를 오래 수집가로, 관찰자로, 공예가로 살게 하는 힘일 테고.
썩어 사라질 것, 버려진 것들의 표면을 금속으로 덧입히고 솜씨를 부려 새로운 용도, 아름다운 유용으로 부여하는 일은 계절별로 길에 나서 길가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나뭇잎과 꽃, 돌, 생물에게 말을 걸고 발견하는 모든 것은 ‘걷기’에서 시작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랴. 스스로 좋아해서 하는 일, 나와 세계를 조금씩 이해하는 일, 손재주와 감각을 발휘하여 먹고 사는 소소한 일이다. 그러나 공예가의 일이란 저만 좋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즐거움과 위안, 필요함까지 채워주는 일이니 이 얼마나 즐겁고 보람찬 일인가. /홍지수 크래프트믹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