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버넷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
제프 버넷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
"우리 집은 돈이 많지 않았습니다. 전 리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은 가지 않았어요. 중퇴였죠. 부모님은 좋아하지 않으셨지만, 음악을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게 제 소명이라는 것을 알았죠. 전 음악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필리핀계 미국 알앤비 싱어송라이터 제프 버넷(Jeff Bernat)이 지난 6일 공연에서 한 말이다. 그는 700여명의 관객이 모인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꺼냈다. 현장에 모인 관객들과의 거리는 몇미터 남짓. 가까이서 눈을 맞추던 그는 무대 아래로 내려와 노래하는 특급 팬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화려하지 않아 더 진하고 깊게 제프 버넷의 목소리에 젖어 들 수 있었다. 그루비한 음악에 올라탄 부드럽고 리드미컬한 그의 보컬은 아늑하게 관객들을 끌어안았다. '콜 유 마인(Call You Mine)'을 비롯해 '그루빈(Groovin)', '이프 유 원더(If You Wonder)', '크루엘(Cruel)', '저스트 바이브(Just Vibe)' 등 알앤비 리듬에 푹 빠진 관객들은 제프 버넷의 움직임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들며 공연을 즐겼다.

2013년 첫 내한 공연 이후 2018년까지 단독 공연과 페스티벌 무대로 매년 한국을 찾았던 제프 버넷은 "한국은 내게 특별하다. 또 다른 고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PM 준케이가 자신의 곡을 공연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후 닉쿤과 가까워졌으며, 엑소가 자신의 곡을 커버하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은 그는 "한국은 올 때마다 내 인생을 바꿨다. 감동적"이라며 감격했다.
제프 버넷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
제프 버넷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제공
이날 공연은 전석 스탠딩으로 진행됐는데, 무대 앞에 옹기종기 모인 관객들을 보며 제프 버넷은 6년 사귄 여자친구와 헤어졌던 때를 떠올리며 곡 소개를 하기도 했다. 무대 위아래의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몰입감 높은 공연이 완성됐다.

대형 음악 공연장 부재 속 중소형 규모의 내한 공연이 관객들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있다. 내한 공연은 장비 운송, 인력, 아티스트 섭외비 등 여러 비용 문제를 고려해 주로 대규모로 진행하고 티켓값도 비싸게 책정돼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마이클 볼튼(고척스카이돔), 해리 스타일스(KSPO DOEM), 브루노 마스(잠실주경기장), 포스트 말론(킨텍스), 샘 스미스(KSPO DOME), 찰리 푸스(KSPO DOME) 등이 내한해 1만5000석~3만석 규모의 장소에서 공연했다.

하지만 현재는 팝스타를 데려올 공연장이 거의 없는 상태다. 4만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잠실주경기장이 리모델링 공사 중이며, 2만5000명 수용 가능한 고척돔 역시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개막전을 위한 공사에 돌입한 상태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은 잔디 문제로 공연 대관이 쉽지 않다. 서울에는 1만5000석 규모의 KSPO DOME, 8000석 내외의 잠실실내체육관 등이 남아있다.

인천 킨텍스나 영종도에 개관한 1만5000석 규모의 인스파이어 아레나가 대안으로 떠올랐지만 업계에서는 접근성에 대한 우려, 이로 인한 공연 지연 등의 리스크를 감수하기 부담스럽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떠오른 게 중소형 내한 공연 유치다.
내한을 앞둔 우미, 프렙, 노워, 맥스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프라이빗커브, 엠피엠지 제공
내한을 앞둔 우미, 프렙, 노워, 맥스 /사진=라이브네이션코리아, 프라이빗커브, 엠피엠지 제공
제프 버넷에 앞서 지난 5일에는 일본의 Z세대 대표로 꼽히는 챤미나가 공연했고, 이후로도 영국 드림팝 밴드 슬로다이브, 태국 밴드 슬롯머신, 미국 싱어송라이터 맥스, 우미, 재즈펑크 밴드 노워, 전설의 록 밴드 런즈 앤 로지스의 기타리스트 슬래쉬, 호주 출신 팝 밴드 파슬스, 시티팝의 선두주자인 영국 팝밴드 프렙, 미국 록밴드 보이즈 라이크 걸즈, 재즈 뮤지션 케니지 등이 예정돼 있다. 모두 1000석 규모의 명화아트홀, 2000석 규모의 예스24라이브홀, 3500석 규모의 올림픽홀, 4500석 규모의 경희대평화의전당 등에서 진행한다.

중소형 내한 공연이 들어오면서 오히려 장르적 다양성이 확보돼 좋다는 평도 나온다. 제프 버넷 공연을 본 한 관람객은 "이미 다른 공연도 예매해둔 상태"라면서 "최근 SNS를 통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접하게 되는데 알앤비, 록 밴드, 재즈까지 내한 공연도 다채롭게 들어와 있어서 좋았다. 록을 좋아하는 친구가 슬래쉬 공연을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그것도 같이 가볼까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관객은 "내한 공연이라고 하면 수만 명이 함께 떼창하고 즐기는 웅장한 분위기가 좋지만, 아티스트와 친밀하게 소통하는 느낌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티스트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로 시야가 안 좋은 경우도 있는데 가까이서 보니 만족도가 높았다"고 말했다.

한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대형 공연을 유치하기 위해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연장을 물색하는 건 위험도가 크다. 라이브 공연의 특성상 접근성, 공연장 주변의 편의시설 등 여러 사안을 고려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 있는 중소형 극장을 적극 활용 중"이라고 했다.

이어 "음향이나 시야 측면에서 만족스러웠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어 당분간 젊은 층을 겨냥한 다양성 위주의 중소형 공연이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고 내다봤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