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예술로 치유한 베를린…150년 베를린필의 디지털 혁명

베를린은 지금 문화예술의 메트로폴리탄이다.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000년대까지 베를린은 ‘가난하지만 매력적인 도시’로 통했다, 지난 10여 년간 전 세계 예술가와 혁신가들을 불러모은 건 문화예술이었다. 폐허가 된 공간이 넘쳐났던 베를린 곳곳은 예술공간이 됐다. 기차역은 현대미술관 '함부르거 반호프'로 재탄생했고, 문 닫은 영화제작소도 문화 공간 '우파파브릭'으로 탈바꿈했다. 빈 집들은 예술가들을 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기반이 됐다. 베를린 장벽까지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캔버스가 됐으니, 베를리너의 20%는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한다는 통계가 나올 정도다.

역사를 딛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데 '예술의 힘'을 실감한 베를린의 혁신은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베를린필은 15년 전 업계 최초로 클래식 라이브 스트리밍 플랫폼 '디지털 콘서트홀'을 만들었다. 음악가들이 과거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걸 넘어 현대기술을 적용해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커녕 스마트폰 조차 없었던 당시에는 업계에 큰 파격이었다. 전설적인 지휘자들을 배출해온 '음악가들의 꿈'이자 가만히 있어도 전 세계 공연장이 줄 서서 부르는 클래식 대표 브랜드인 베를린필은 왜 이런 모험을 했는 지 현장을 찾아가 직접 확인했다.

지난 1일 오후 베를린의 녹색 숲이 펼쳐진 티어가르텐 지역. 이곳에는 노란색 오각형 모양의 공연장 '필하모니아'(베를린필 전용 공연장)가 있다. 콘서트를 2시간 앞둔 필하모니아의 백스테이지는 분주했다. 무대 뒤의 또다른 비공식 오케스트라, 공연을 생중계하는 디지털 콘서트홀팀 때문이었다. 녹음 프로듀서로 일하는 크리스토프 프랭크 씨는 음향 장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오늘의 쇼를 위한 준비가 다 됐습니다."

테크와 클래식이 만났을 때

2008년 만들어진 베를린 디지털 콘서트홀(DCH)은 베를린필의 공연을 생중계 하는 플랫폼이다. 2006년 뉴욕 MET가 영화관에 공연 중계를 시도했지만, 개인 기기로 중계하는 사례로는 업계 최초다. 이를 통해 "전세계 어디서든, 누구나 우리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로 만들었다.

DCH에는 라이브 콘서트뿐 아니라 전설적인 거장들의 영상을 포함한 780여 개의 연주 영상이 저장돼 있다. 오케스트라의 기억이자, 거대한 공연 도서관인 셈이다.

콘서트홀 무대 천정에 설치된 40여 개의 녹음용 마이크는 수많은 서버와 연결돼 송출되며 많을 때는 80개 이상 설치하기도 한다고. "1월에 쇤베르그의 '야곱의 사닥다리'를 했을 땐 80개 넘게 설치했어요.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등장하는 곡이거든요."(프랭크 씨)

오디오 스튜디오에서는 톤마이스터와 함께 실시간으로 미세하게 음을 조정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3~5킬로헤르츠 내외의 범위로 인간의 가청 범위(20hz~20Khz)를 고려하면 미묘한 수준이지만, 소리는 한 끗이 중요한 법. 프랭크 씨는 "날씨나 악기 컨디션에 따라 현악기 소리가 달라지거나, 팀파니의 진동이 강해지는 등 다양한 변수가 있어 조절이 필요하다"며 "볼륨, 이퀄라이저, 로우커트 등으로 미세 조정한다"고 설명했다.

비디오 스튜디오에서는 10여 명의 팀원들이 카메라를 원격 조정한다. 이 과정에서 카메라 감독은 어느 부분에서 몇번 카메라를 쓸지, 어떤 순간에 클로즈업 할 지 등을 정한다. 이를 위해 무대 위에는 8개 대의 카메라가 있다. 이 작업 과정은 지휘자와 음악적 흐름에 어울리는지 미리 논의하며 이뤄진다고.

이런 작업을 위해 베를린필 미디어가 운영하는 DCH는 기술개발부서 인원만 20명에 이른다. 베를린필 미디어는 베를린필 재단의 자회사로 DCH, 레코딩 등 미디어 사업을 총괄한다. 베를린필 관계자는 "기술팀이 이렇게 큰 클래식 악단은 (베를린필이) 거의 유일할 것"이라고 했다.

도시를 닮은 오케스트라

DCH는 현재 7만 여명의 유료 회원이 있다. 학교, 영화관 등에서도 보기 때문에 실제 관객수가 몇 배는 많을거라고 이들은 추산한다. 베를린필 미디어의 막시밀리안 메르클 대표는 “애플, 아마존의 고객이 전세계에 있듯 베를린필의 청중도 전세계에 있다”며 "글로벌 관객을 고려하는 게 당연한 시대"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도전은 시대의 변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온라인 앱과 스트리밍이 보편화되고, 팬데믹을 거치며 이런 흐름이 더욱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팬데믹 이후에는 디지털공연이 스탠다드가 됐다. 뉴욕 카네기홀, 음반 회사 도이치 그라모폰(DG), 독일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이다지오(Idagio) 등 전세계 주요 극장과 악단이 비슷한 서비스를 잇따라 내놨다. 국내에서도 KBS 교향악단이 2022년 초 'K-홀'만들었고, 예술의전당이 지난해 말 '디지털 스테이지'를 열었다. 전세계 클래식계의 트렌드가 된 셈.

문화예술계에서는 보수적인 클래식 집단에서 이런 시도가 가능한 건 베를린필 특유의 개방적인 분위기 덕분이라는 시각이다. 여타 명문 악단들이 '명문' '헤리티지' 등 권위를 강조할 때 이와 대조적으로 베를린필은 이와 세계화, 대중화 등 ‘확장’의 코드에 집중해왔다. DCH를 만든 이후로 어떤 악단보다 SNS 소통을 활발하게 하는 오케스트라이기도 하다.

"돈 안되도 멀리 봐라" 카라얀의 DNA

과거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전력도 있다. 5대 상임지휘자이자 카라얀은 당대 지휘자들 중 독보적으로 미디어 친화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음반만 2000개가 넘을 정도다. 필하모니아 설립 당시 카라얀은 "카메라와 스튜디오를 홀에 설치해달라"고 요구했고, 이는 건립에 반영됐다.
이처럼 베를린필은 개방성과 새로움을 한층 내세우는 추세다. 60주년을 맞은 필하모니아 건물에는 '30개국에서 온 130명의 단원들'이라는 거대한 현수막이 붙어있으며, 최근에는 현대음악을 비롯해, 브루크너 0번 등 다채롭고 새로운 작품을 더욱 자주 선보이고 있다.

한국 아티스트와도 유독 인연이 잇따르고 있다. 올해 상주음악가로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선정한 데 이어 오는 4월에는 아시아 여성 지휘자 최초로 김은선이 베를린필 포디움에 선다. 작년 말에는 작곡가 진은숙과 그의 주요 작품을 녹음한 '베를린필 진은숙 에디션'을 발매했다. 베를린필이 살아있는 작곡가의 작품을 녹음한 건 이번이 두번째다. 메르클 대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는 젊은 청중이 많다는 게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시도는 새롭지만, 언뜻 봐도 돈이 되어보이진 않는다. 값비싼 장비와 막대한 노동력, 거기에 최고만 추구하는 이들의 완벽주의까지 더해져 사업보다는 또다른 예술이나 마찬가지다. 실제로 이 모든 작업은 수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이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클래식 음악을 전세계로 확산시키고, 클래식 역사를 이어가는 것이다.

메르클 대표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돈을 버는 구조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최고의 음악을 최고의 퀄리티로 전세계에 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단 하나의 목표입니다. "

베를린=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