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고두현의 아침 시편]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눈풀꽃
루이즈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의 작품입니다. 혹한의 동토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이른 봄 눈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눈풀꽃의 생명력이 눈물겹습니다. 그 꽃은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도 싱싱하게 다짐합니다.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고 말이죠.
글릭은 노벨상을 받은 지 3년 만인 지난해 8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암이었다고 합니다. 1968년 시집 <맏이>로 활동을 시작해 14권가량의 시집과 시론, 수필집을 남기고 갔지요. 미국에서는 명성이 높았지만,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입니다. 그나마 류시화 시인의 번역 덕분에 몇몇 작품이 소개돼 있었습니다.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앓았던 섭식장애, 신경성 식욕부진증으로 학업까지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는 이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으며 미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시집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전미비평가상(1985)을 받았고,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1993), <신실하고 고결한 밤>으로 전미도서상(2014)을 받았죠.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미국 시인으로는 T.S 엘리엇(1948년) 이후 첫 노벨문학상이었습니다. 여성 시인 수상자로는 폴란드의 비스와봐 쉼보르스카(1996년) 이후 두 번째였죠.
스웨덴 한림원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고 평가했습니다. 글릭은 노벨상 연설에서 “어떤 시인들은 많은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순차적으로, 반복해 미래에 도달하는 것을 보지만, 독자는 (결국) 어떤 심오한 방식으로 언제나 한 명, 한 명씩 다가온다”고 말했지요.
당시 한림원이 인용하기도 했던 시 ‘눈풀꽃’(Snowdrops)은 시집 <야생 붓꽃>에 실려 있는 것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환희를 그리고 있습니다.
눈풀꽃은 수선화과의 알뿌리 식물입니다. 추위에 잘 견디고, 가을에 심는 알뿌리 식물 중 가장 빨리 꽃을 피웁니다. 알뿌리에 2~3개의 줄 모양 잎이 붙는데, 이른 봄에 20~30㎝의 은백색 꽃이 아래를 향해 달립니다.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생겨 ‘설강화(雪降花)’라고도 부르지요.
글릭은 퓰리처상 수상작인 시집 <야생 붓꽃>의 여러 시편에서 식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춥니다. 야생 붓꽃도 눈풀꽃과 같은 구근 식물이지요. 정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표제작 ‘야생 붓꽃’은 “고통의 끝에는/ 문이 있었다”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두운 땅속에 묻힌/ 의식으로서/ 생존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말로 가사(假死) 상태의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후 “영혼으로 존재함에도/ 말을 할 수 없는” 죽음 아닌 죽음의 상태가 어느 순간 끝나고, 부활한 야생 붓꽃이 마침내 “무엇이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목소리를 찾아서 돌아온다”는 선언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찾은 목소리를 통해 시인은 삶과 희망, 존재의 순환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줍니다.
하데스에 붙잡힌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다룬 시집 <아베르노>도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시집 역시 한림원이 노벨문학상을 발표할 때 특별히 언급했지요.
한때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신실하고 고결한 밤>을 포함해 글릭의 주요 시집들을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의 번역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
루이즈 글릭
내가 어떠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가.
절망이 무엇인지 안다면 당신은
분명 겨울의 의미를 이해하리라.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에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
---------------------------------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여성 시인 루이즈 글릭의 작품입니다. 혹한의 동토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이른 봄 눈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눈풀꽃의 생명력이 눈물겹습니다. 그 꽃은 ‘새로운 세상의 살을 에는 바람 속에서’도 싱싱하게 다짐합니다. ‘나는 지금 두려운가, 그렇다. 하지만/ 당신과 함께 다시/ 외친다./ 좋아, 기쁨에 모험을 걸자’고 말이죠.
글릭은 노벨상을 받은 지 3년 만인 지난해 8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암이었다고 합니다. 1968년 시집 <맏이>로 활동을 시작해 14권가량의 시집과 시론, 수필집을 남기고 갔지요. 미국에서는 명성이 높았지만,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입니다. 그나마 류시화 시인의 번역 덕분에 몇몇 작품이 소개돼 있었습니다.
1943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앓았던 섭식장애, 신경성 식욕부진증으로 학업까지 중단해야 했습니다. 이는 이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퓰리처상과 전미도서상을 받으며 미국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아왔습니다.
시집 <아킬레우스의 승리>로 전미비평가상(1985)을 받았고, <야생 붓꽃>으로 퓰리처상(1993), <신실하고 고결한 밤>으로 전미도서상(2014)을 받았죠. 예일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2020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 미국 시인으로는 T.S 엘리엇(1948년) 이후 첫 노벨문학상이었습니다. 여성 시인 수상자로는 폴란드의 비스와봐 쉼보르스카(1996년) 이후 두 번째였죠.
스웨덴 한림원은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갖춘 확고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의 실존을 보편적으로 나타냈다”고 평가했습니다. 글릭은 노벨상 연설에서 “어떤 시인들은 많은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순차적으로, 반복해 미래에 도달하는 것을 보지만, 독자는 (결국) 어떤 심오한 방식으로 언제나 한 명, 한 명씩 다가온다”고 말했지요.
당시 한림원이 인용하기도 했던 시 ‘눈풀꽃’(Snowdrops)은 시집 <야생 붓꽃>에 실려 있는 것으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다시 살아나는 생명의 환희를 그리고 있습니다.
눈풀꽃은 수선화과의 알뿌리 식물입니다. 추위에 잘 견디고, 가을에 심는 알뿌리 식물 중 가장 빨리 꽃을 피웁니다. 알뿌리에 2~3개의 줄 모양 잎이 붙는데, 이른 봄에 20~30㎝의 은백색 꽃이 아래를 향해 달립니다.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처럼 생겨 ‘설강화(雪降花)’라고도 부르지요.
글릭은 퓰리처상 수상작인 시집 <야생 붓꽃>의 여러 시편에서 식물을 통해 인간의 내면을 비춥니다. 야생 붓꽃도 눈풀꽃과 같은 구근 식물이지요. 정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표제작 ‘야생 붓꽃’은 “고통의 끝에는/ 문이 있었다”는 인상적인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두운 땅속에 묻힌/ 의식으로서/ 생존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는 말로 가사(假死) 상태의 고통을 묘사합니다. 이후 “영혼으로 존재함에도/ 말을 할 수 없는” 죽음 아닌 죽음의 상태가 어느 순간 끝나고, 부활한 야생 붓꽃이 마침내 “무엇이든/ 망각에서 돌아오는 것은/ 목소리를 찾아서 돌아온다”는 선언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되찾은 목소리를 통해 시인은 삶과 희망, 존재의 순환에 대한 감각을 일깨워줍니다.
하데스에 붙잡힌 페르세포네의 신화를 다룬 시집 <아베르노>도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걸작입니다. 이 시집 역시 한림원이 노벨문학상을 발표할 때 특별히 언급했지요.
한때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었지만, 이제는 <신실하고 고결한 밤>을 포함해 글릭의 주요 시집들을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의 번역으로 쉽게 만날 수 있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