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와인 앞에선 누구도 佛가항력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Cover Story
돌고돌아 결국 믿을건 '와인 종주국'
돌고돌아 결국 믿을건 '와인 종주국'
한 잔의 와인엔 해와 땅이 모두 담긴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와 같다. 햇볕의 세기가 나이테의 간격을 결정하듯 와인의 깊이도 결정한다. 나이테의 뚜렷한 정도를 보면 나무가 자란 땅에 대한 힌트가 있듯이 와인 향에는 그 땅의 냄새가 고스란히 밴다. 와이너리에 따라, 빈티지(와인 생산연도)에 따라 향도 깊이도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와인을 고를 때 ‘선택 장애’가 온다고 호소하는 이가 많은 이유다.
선택 장애를 극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와인을 국가별로 나눈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와인은 어디일까. 오랜 역사와 전통의 이탈리아, 짙은 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스페인, 아이스 와인의 고향 독일. 이도 아니면 대량 생산과 단일 품종을 통해 ‘가성비 와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미국과 칠레. 하지만 이 나라를 빼고 와인을 말할 수 있을까. 와인의 종주국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다.
와인 전문가들이 “프랑스 와인을 선택하면 후회할 확률이 가장 낮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프랑스 와이너리는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고수하기로 정평이 났다. 그러면서도 일정하게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포도 재배부터 숙성에 이르는 와인 생산의 모든 단계를 친환경 방법으로 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인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봤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대 와인 박람회 ‘비넥스포’에.
행사장은 흡사 프랑스 지도의 축소판과 같았다. 강을 따라 중세 고성들이 펼쳐진 루아르 밸리, 국보급 와인 산지 부르고뉴, 해풍을 머금은 랑그독, 와인 애호가들의 종착지 샹파뉴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대표 산지 와이너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없이 많은 잔에 와인이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엔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박람회에 참석한 사람들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자신의 와인, 프랑스 와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프랑스 와인의 다양성은 엄청났다. 세계 각 나라의 와인 특성을 프랑스 안에서 모두 맛볼 만큼 다양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저버리지 않은 전통은 무엇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듣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있다.” 자부심 강한 프랑스인들의 와인 철학을 들으러 떠나보자.
프리미엄급 와인 제라르 베르트랑
유럽의 캘리포니아라고 불리는 땅이 있다. 연중 따뜻한 햇살 아래 높은 산맥을 등지고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스페인 국경에 접한 랑그독이 그 주인공이다. 단지 따뜻한 햇살과 바다만이 특징이라면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지고 있는 산맥과 바다에서 연중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랑그독 와이너리들은 해풍(海風)을 무기로 활용했다. 강한 바람이 포도를 병들게 하는 곰팡이와 해충을 날려버린 덕분에 농약이나 제초제 등의 사용을 최소화했다. 내추럴 와인이 유독 랑그독에서 많이 탄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던 랑그독은 최근 프리미엄급 와인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와이너리가 제라르 베르트랑이다. 설립자이자 와인메이커인 제라르 베르트랑을 직접 만났다. 그는 “랑그독의 가장 큰 지역적인 특징은 다양성이 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각기 다른 품종의 포도가 자라는 땅은 서로 다른 감각을 갖고 있는데, 랑그독 와인은 이런 땅의 생명력을 잘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전통을 지키면서도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이용하는 등 혁신을 거듭해왔다”고 강조했다. 바이오다이내믹은 포도의 파종부터 수확까지 모든 재배 과정을 달의 주기에 맞춰 진행하는 농법이다.
그가 와인의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혁신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렌지 와인이다. 오렌지 와인은 샤르도네와 같이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을 사용한다. 대신 양조 방법은 포도 껍질째 침용하는 레드 와인 방식을 따른다. 이 때문에 와인이 밝은 오렌지빛을 띤다. 베르트랑은 “와인의 발상지로 알려진 조지아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가 로제 와인으로 알려진 ‘끌로 뒤 템플’도 제라르 베르트랑의 역작이다. 베르트랑은 “테루아의 신선함과 미네랄이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제품”이라며 “한 잔을 맛본 사람들이 다차원의 경험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춰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1001개의 디테일이 핵심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라왔다”고 말했다. 1000개의 디테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어 “와인 한 잔은 세계 어디에서 마셔도 문화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왕실 와인 공급하던 루아르
숨은 보석 빌부아
랑그독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루아르 밸리’가 나온다. 블루아성, 샹보르성, 앙제성 등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고성(古城)들이 그림같이 펼쳐진 지역이다. 국내에선 고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와인 산지로서의 인지도는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마니아층이 두텁다. 부르고뉴와 보르도 등 유명 와인 산지와 견줘도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면서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해서다.
루아르 지방 와인의 역사는 프랑스 역사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2000여 년 전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부터다. 본격적으로 와인 양조가 시작된 것도 5세기 무렵부터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강을 따라 영국과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으로의 수출도 용이했다. 오랜 와인 역사는 루아르 와이너리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배경이 됐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탄생지였던 루아르 지역은 프랑스 왕과 왕비들이 200년간 거주한 곳인 만큼 오랜 기간 왕실에 제공하는 정통 와인을 생산해온 지역입니다.” 루아르 지역 와이너리 빌부아의 오너 주스트 빌부아는 “한 지역에 준(準)해양성, 해양성, 대륙성 기후가 함께 나타나는 드문 지역이기도 하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이어 “다양성 때문에 소비자들이 루아르 와인을 어려워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발견의 기쁨이 큰 곳”이라고 덧붙였다.
루아르 지역은 강을 따라 펼쳐진 넓은 평야부터 비탈진 언덕까지 다양한 지형을 가진 덕분에 재배되는 포도도 다양하다. 지형과 기후 덕분에 새로운 와이너리의 탄생도 많다. 빌부아 역시 2004년 설립된 비교적 신생 와이너리다. 그런데도 설립 초기에 포도 품종을 소비뇽 블랑 하나에 집중하며 유명해졌다. 주스트 빌부아는 “다양한 포도가 각각의 땅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제 빌부아는 소비뇽 블랑 외에도 피노 누아와 슈넹 블랑 등 포도 품종을 다양화했다. 이 중 화이트 와인에 쓰이는 슈넹 블랑의 경우 루아르 지역의 특징적인 품종 중 하나다. 산뜻한 미네랄을 느끼기 좋아 젊은 층 사이에서 유독 인기가 좋다. 그는 “소비뇽 블랑은 식물성 느낌부터 잘 익은 열대 과일까지 느껴지는 넓은 스펙트럼의 향이 나는 반면 슈넹 블랑은 보다 은은한 복숭아류 향이 난다”며 “보다 중립적인 느낌이 강해 마리아주(음식과의 궁합)나 활용법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10헥타르 포도밭 앙리 지로
‘저질 와인은 있어도 저질 샴페인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만을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했을 때만 샴페인이란 이름이 붙기 때문이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만큼 품질 관리도 엄격하다. 풍부한 미네랄, 입 안 가득 채우는 과일향, 신선한 산도는 샴페인의 필수 조건이다.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샴페인이 만들어지지만 그 안에서도 등급은 천차만별이다. 샹파뉴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마을은 300개가 넘지만 ‘그랑크뤼’ 자격을 갖고 있는 곳은 17개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알려진 마을은 샴페인이 태동한 아이(Ay)다. 아이에 10헥타르(ha)가 넘는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 생산자가 있다. 1625년 설립된 앙리 지로다. 앙리 지로는 돔페리뇽, 모에&샹동 같은 대형 샴페인 제조사 사이에서도 맛과 명성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추구하는 목표가 단순한 샴페인이 아닌 ‘샹파뉴의 위대한 와인’이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는 앙리 지로 샴페인을 “가장 훌륭한 샴페인 하우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앙리 지로의 13대손이자 현 오너인 에마뉘엘 지로는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우리 비전은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샴페인 사업을 상업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큰 회사들이 대규모 마케팅으로 샴페인의 이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오로지 샴페인 품질에만 집중해 고급 이미지를 이어나가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샴페인은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이는 와인을 마시는 소비자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자신의 직원들인 생산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에마뉘엘 지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동료들끼리의 우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배웠다”며 “마시는 사람이 즐거우려면 만드는 사람도 즐거워야 한다는 게 우리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어 “힘든 수확기도 서로 즐겁게 놀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에마뉘엘 지로는 “앙리 지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쁜 에너지”라고 말했다. 샴페인을 만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정성을 다해 즐겁게 만든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월부터 일등석에 제공하는 샴페인으로 ‘앙리 지로 아이 그랑크뤼 MV17’을 선택했다. 일등석 승객은 누구보다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있지만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와인 종착지 부르고뉴
전통 강호 도멘 퐁소
샹파뉴와 맞닿은 부르고뉴는 와인 애호가들의 종착지 같은 곳이다. 부르고뉴 와이너리는 단일 포도 품종과 단일 포도밭을 고수한다. 레드와인을 만들 때는 피노누아, 화이트와인을 만들 때는 샤르도네만 사용한다. 그런데도 도멘(와인 양조장)마다 제각각 특색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인 ‘로마네 콩티’도 부르고뉴 와인이다. 이 때문에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함께 오늘날 프랑스 명품 와인 시장을 이끌어가는 양대 생산지 중 하나로 꼽힌다.
‘명품 와인’을 만들기 위한 부르고뉴 와이너리들의 노력은 역사가 길다. 부르고뉴가 프랑스 국왕령으로 완전히 복속된 14세기 이전 부르고뉴 와인 제조는 수도승의 몫이었다. 수도승은 수도원에 기부된 포도밭을 가꾸면서 와인을 만들어왔는데,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예수님의 성스러운 피로 여겼다. 당연히 와인 품질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포도밭에서 같은 품종으로 와인을 생산하다 보니 와이너리 간 경쟁 또한 치열하다. 부르고뉴 와인은 다른 어느 산지 와인보다 테루아(terroir·산지)를 강조한다. 1872년 설립된 부르고뉴 전통의 강호 도멘 퐁소도 그렇다. 알렉상드르 아벨 도멘 퐁소 부사장은 “와인 메이커라면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양에 대한 이해 없이는 와인 품질을 높일 수 없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는 “보르도의 샤토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는 것과 달리 부르고뉴 와인은 도멘이 아니라 각각의 포도밭 이름이 브랜드가 된다”고 설명했다.
아벨은 “19세기 미국에서 기생충이 넘어와 유럽 포도밭의 90% 이상을 초토화시켰다”며 “유럽 와이너리들은 20~30년간 기생충과의 전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도 와이너리에 닥친 큰 위기다. 그는 “토양을 이해하고 기후 변화에 따른 포도의 변화를 인지해야만 좋은 품질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며 “지구 온난화로 포도가 빨리 익어 신선도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평균기온이 올라가 발효가 더 잘 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자연의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좋은 품질을 유지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도멘 퐁소는 새로운 오크통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오크의 향이 와인에 배어 와인 본연의 향을 망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벨 부사장은 “포도 재배부터 병입에 이르기까지 1년 내내 완벽을 기하고 있다”며 “인공적인 향이 들어가게 놔둘 수 없다”고 말했다."파리올림픽 '특수'…올해 샴페인의 해 될 것"
올여름엔 파리올림픽이라는 글로벌 빅이벤트가 열린다. 와인업계와 전문가들은 ‘샴페인의 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롯데마트의 와인 전문매장 보틀벙커의 장세욱 상품기획자(MD·사진)는 “올여름 올림픽 개막과 함께 샴페인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며 “올림픽 경기가 파리 도심 곳곳에서 열리는 만큼 TV로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샴페인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통상 샴페인은 연말에 많이 찾지만, 여름이야말로 청량감과 산미가 어우러진 샴페인을 마시기 좋은 계절이라는 얘기다. 파리올림픽 스페셜 에디션도 예고돼 있다.
그는 샴페인 입문자를 위한 와인으로 ‘사이러스 머뮤이스 블랑 드 블랑’을 꼽았다. 장 MD는 “일반적인 블렌딩으로 완성되는 샴페인이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의 블렌딩을 완성하는데, 블랑 드 블랑은 화이트 품종만으로 만들어 더 섬세하고 신선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4만원대 가격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도 좋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루아르 와인도 추천 리스트다. “각 와인 산지들은 세계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타격을 많이 받았는데 루아르의 피노누아는 기후가 온화해지며 과실향이 강해졌다”고. 가격이 끝없이 오르고 있는 부르고뉴의 입문용 와인과 비교했을 때 가성비가 뛰어난 와인으로는 ‘빌부아 피노누아’를 꼽았다.
파리=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
선택 장애를 극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와인을 국가별로 나눈다고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와인은 어디일까. 오랜 역사와 전통의 이탈리아, 짙은 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스페인, 아이스 와인의 고향 독일. 이도 아니면 대량 생산과 단일 품종을 통해 ‘가성비 와인의 끝판왕’으로 불리는 미국과 칠레. 하지만 이 나라를 빼고 와인을 말할 수 있을까. 와인의 종주국이자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다.
와인 전문가들이 “프랑스 와인을 선택하면 후회할 확률이 가장 낮다”고 하는 이유가 있다. 프랑스 와이너리는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고수하기로 정평이 났다. 그러면서도 일정하게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위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포도 재배부터 숙성에 이르는 와인 생산의 모든 단계를 친환경 방법으로 하기 위해 시간과 비용을 들인다. 그래서 확인하러 가봤다.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대 와인 박람회 ‘비넥스포’에.
행사장은 흡사 프랑스 지도의 축소판과 같았다. 강을 따라 중세 고성들이 펼쳐진 루아르 밸리, 국보급 와인 산지 부르고뉴, 해풍을 머금은 랑그독, 와인 애호가들의 종착지 샹파뉴 등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대표 산지 와이너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없이 많은 잔에 와인이 채워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엔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박람회에 참석한 사람들이었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자신의 와인, 프랑스 와인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프랑스 와인의 다양성은 엄청났다. 세계 각 나라의 와인 특성을 프랑스 안에서 모두 맛볼 만큼 다양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저버리지 않은 전통은 무엇인지 그들의 입을 통해 듣기도 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다.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있다.” 자부심 강한 프랑스인들의 와인 철학을 들으러 떠나보자.
지중해 햇살 머금은 오렌지 와인…프랑스 MZ가 사랑한 복숭아 와인
유럽의 캘리포니아 랑그독프리미엄급 와인 제라르 베르트랑
유럽의 캘리포니아라고 불리는 땅이 있다. 연중 따뜻한 햇살 아래 높은 산맥을 등지고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스페인 국경에 접한 랑그독이 그 주인공이다. 단지 따뜻한 햇살과 바다만이 특징이라면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지고 있는 산맥과 바다에서 연중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랑그독 와이너리들은 해풍(海風)을 무기로 활용했다. 강한 바람이 포도를 병들게 하는 곰팡이와 해충을 날려버린 덕분에 농약이나 제초제 등의 사용을 최소화했다. 내추럴 와인이 유독 랑그독에서 많이 탄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와인 산지로 알려져 있던 랑그독은 최근 프리미엄급 와인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인 와이너리가 제라르 베르트랑이다. 설립자이자 와인메이커인 제라르 베르트랑을 직접 만났다. 그는 “랑그독의 가장 큰 지역적인 특징은 다양성이 크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각기 다른 품종의 포도가 자라는 땅은 서로 다른 감각을 갖고 있는데, 랑그독 와인은 이런 땅의 생명력을 잘 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 전통을 지키면서도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이용하는 등 혁신을 거듭해왔다”고 강조했다. 바이오다이내믹은 포도의 파종부터 수확까지 모든 재배 과정을 달의 주기에 맞춰 진행하는 농법이다.
그가 와인의 전통을 지키는 동시에 혁신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렌지 와인이다. 오렌지 와인은 샤르도네와 같이 화이트 와인을 만드는 포도 품종을 사용한다. 대신 양조 방법은 포도 껍질째 침용하는 레드 와인 방식을 따른다. 이 때문에 와인이 밝은 오렌지빛을 띤다. 베르트랑은 “와인의 발상지로 알려진 조지아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계 최고가 로제 와인으로 알려진 ‘끌로 뒤 템플’도 제라르 베르트랑의 역작이다. 베르트랑은 “테루아의 신선함과 미네랄이 독특한 풍미를 자랑하는 제품”이라며 “한 잔을 맛본 사람들이 다차원의 경험을 하는 데 초점을 맞춰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1001개의 디테일이 핵심이라는 말씀을 듣고 자라왔다”고 말했다. 1000개의 디테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항상 더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어 “와인 한 잔은 세계 어디에서 마셔도 문화적인 경험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왕실 와인 공급하던 루아르
숨은 보석 빌부아
랑그독에서 루아르 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루아르 밸리’가 나온다. 블루아성, 샹보르성, 앙제성 등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고성(古城)들이 그림같이 펼쳐진 지역이다. 국내에선 고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직 와인 산지로서의 인지도는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도 마니아층이 두텁다. 부르고뉴와 보르도 등 유명 와인 산지와 견줘도 훌륭한 품질을 자랑하면서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해서다.
루아르 지방 와인의 역사는 프랑스 역사 그 자체나 다름없다. 이 지역에서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2000여 년 전 로마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부터다. 본격적으로 와인 양조가 시작된 것도 5세기 무렵부터다. 프랑스에서 가장 긴 강인 루아르강을 따라 영국과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으로의 수출도 용이했다. 오랜 와인 역사는 루아르 와이너리들이 전통을 고수하는 배경이 됐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탄생지였던 루아르 지역은 프랑스 왕과 왕비들이 200년간 거주한 곳인 만큼 오랜 기간 왕실에 제공하는 정통 와인을 생산해온 지역입니다.” 루아르 지역 와이너리 빌부아의 오너 주스트 빌부아는 “한 지역에 준(準)해양성, 해양성, 대륙성 기후가 함께 나타나는 드문 지역이기도 하다”며 이같이 설명했다. 이어 “다양성 때문에 소비자들이 루아르 와인을 어려워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발견의 기쁨이 큰 곳”이라고 덧붙였다.
루아르 지역은 강을 따라 펼쳐진 넓은 평야부터 비탈진 언덕까지 다양한 지형을 가진 덕분에 재배되는 포도도 다양하다. 지형과 기후 덕분에 새로운 와이너리의 탄생도 많다. 빌부아 역시 2004년 설립된 비교적 신생 와이너리다. 그런데도 설립 초기에 포도 품종을 소비뇽 블랑 하나에 집중하며 유명해졌다. 주스트 빌부아는 “다양한 포도가 각각의 땅을 잘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이제 빌부아는 소비뇽 블랑 외에도 피노 누아와 슈넹 블랑 등 포도 품종을 다양화했다. 이 중 화이트 와인에 쓰이는 슈넹 블랑의 경우 루아르 지역의 특징적인 품종 중 하나다. 산뜻한 미네랄을 느끼기 좋아 젊은 층 사이에서 유독 인기가 좋다. 그는 “소비뇽 블랑은 식물성 느낌부터 잘 익은 열대 과일까지 느껴지는 넓은 스펙트럼의 향이 나는 반면 슈넹 블랑은 보다 은은한 복숭아류 향이 난다”며 “보다 중립적인 느낌이 강해 마리아주(음식과의 궁합)나 활용법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일등석만 맛보는 명품 샴페인…낡은 오크통만 고집, 집념의 와인
샴페인 태동지 샹파뉴10헥타르 포도밭 앙리 지로
‘저질 와인은 있어도 저질 샴페인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만을 사용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양조했을 때만 샴페인이란 이름이 붙기 때문이다. 아무나 쓸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만큼 품질 관리도 엄격하다. 풍부한 미네랄, 입 안 가득 채우는 과일향, 신선한 산도는 샴페인의 필수 조건이다.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 샴페인이 만들어지지만 그 안에서도 등급은 천차만별이다. 샹파뉴 지역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마을은 300개가 넘지만 ‘그랑크뤼’ 자격을 갖고 있는 곳은 17개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알려진 마을은 샴페인이 태동한 아이(Ay)다. 아이에 10헥타르(ha)가 넘는 포도밭을 소유하고 있는 생산자가 있다. 1625년 설립된 앙리 지로다. 앙리 지로는 돔페리뇽, 모에&샹동 같은 대형 샴페인 제조사 사이에서도 맛과 명성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추구하는 목표가 단순한 샴페인이 아닌 ‘샹파뉴의 위대한 와인’이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인 로버트 파커는 앙리 지로 샴페인을 “가장 훌륭한 샴페인 하우스”라고 극찬한 바 있다. 앙리 지로의 13대손이자 현 오너인 에마뉘엘 지로는 한국경제신문과 만나 “우리 비전은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샴페인 사업을 상업적인 관점에서만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큰 회사들이 대규모 마케팅으로 샴페인의 이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면 우리는 오로지 샴페인 품질에만 집중해 고급 이미지를 이어나가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샴페인은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이는 와인을 마시는 소비자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자신의 직원들인 생산자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에마뉘엘 지로는 “아버지와 할아버지로부터 동료들끼리의 우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배웠다”며 “마시는 사람이 즐거우려면 만드는 사람도 즐거워야 한다는 게 우리의 철학”이라고 말했다. 이어 “힘든 수확기도 서로 즐겁게 놀며 축제 같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에마뉘엘 지로는 “앙리 지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쁜 에너지”라고 말했다. 샴페인을 만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정성을 다해 즐겁게 만든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지난해 3월부터 일등석에 제공하는 샴페인으로 ‘앙리 지로 아이 그랑크뤼 MV17’을 선택했다. 일등석 승객은 누구보다 까다로운 입맛을 갖고 있지만 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와인 종착지 부르고뉴
전통 강호 도멘 퐁소
샹파뉴와 맞닿은 부르고뉴는 와인 애호가들의 종착지 같은 곳이다. 부르고뉴 와이너리는 단일 포도 품종과 단일 포도밭을 고수한다. 레드와인을 만들 때는 피노누아, 화이트와인을 만들 때는 샤르도네만 사용한다. 그런데도 도멘(와인 양조장)마다 제각각 특색을 갖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중 하나인 ‘로마네 콩티’도 부르고뉴 와인이다. 이 때문에 부르고뉴는 보르도와 함께 오늘날 프랑스 명품 와인 시장을 이끌어가는 양대 생산지 중 하나로 꼽힌다.
‘명품 와인’을 만들기 위한 부르고뉴 와이너리들의 노력은 역사가 길다. 부르고뉴가 프랑스 국왕령으로 완전히 복속된 14세기 이전 부르고뉴 와인 제조는 수도승의 몫이었다. 수도승은 수도원에 기부된 포도밭을 가꾸면서 와인을 만들어왔는데, 자신들이 만든 와인을 예수님의 성스러운 피로 여겼다. 당연히 와인 품질에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의 포도밭에서 같은 품종으로 와인을 생산하다 보니 와이너리 간 경쟁 또한 치열하다. 부르고뉴 와인은 다른 어느 산지 와인보다 테루아(terroir·산지)를 강조한다. 1872년 설립된 부르고뉴 전통의 강호 도멘 퐁소도 그렇다. 알렉상드르 아벨 도멘 퐁소 부사장은 “와인 메이커라면 포도가 자라는 토양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토양에 대한 이해 없이는 와인 품질을 높일 수 없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그는 “보르도의 샤토가 그 자체로 브랜드가 되는 것과 달리 부르고뉴 와인은 도멘이 아니라 각각의 포도밭 이름이 브랜드가 된다”고 설명했다.
아벨은 “19세기 미국에서 기생충이 넘어와 유럽 포도밭의 90% 이상을 초토화시켰다”며 “유럽 와이너리들은 20~30년간 기생충과의 전쟁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기후 변화도 와이너리에 닥친 큰 위기다. 그는 “토양을 이해하고 기후 변화에 따른 포도의 변화를 인지해야만 좋은 품질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며 “지구 온난화로 포도가 빨리 익어 신선도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평균기온이 올라가 발효가 더 잘 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자연의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좋은 품질을 유지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다.
도멘 퐁소는 새로운 오크통을 쓰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오크의 향이 와인에 배어 와인 본연의 향을 망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아벨 부사장은 “포도 재배부터 병입에 이르기까지 1년 내내 완벽을 기하고 있다”며 “인공적인 향이 들어가게 놔둘 수 없다”고 말했다.
"파리올림픽 '특수'…올해 샴페인의 해 될 것"
와인 전문매장 보틀벙커 MD
올여름엔 파리올림픽이라는 글로벌 빅이벤트가 열린다. 와인업계와 전문가들은 ‘샴페인의 해’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롯데마트의 와인 전문매장 보틀벙커의 장세욱 상품기획자(MD·사진)는 “올여름 올림픽 개막과 함께 샴페인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며 “올림픽 경기가 파리 도심 곳곳에서 열리는 만큼 TV로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들이 샴페인을 찾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통상 샴페인은 연말에 많이 찾지만, 여름이야말로 청량감과 산미가 어우러진 샴페인을 마시기 좋은 계절이라는 얘기다. 파리올림픽 스페셜 에디션도 예고돼 있다.
그는 샴페인 입문자를 위한 와인으로 ‘사이러스 머뮤이스 블랑 드 블랑’을 꼽았다. 장 MD는 “일반적인 블렌딩으로 완성되는 샴페인이 ‘피노 누아’ ‘피노 뫼니에’ ‘샤르도네’의 블렌딩을 완성하는데, 블랑 드 블랑은 화이트 품종만으로 만들어 더 섬세하고 신선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4만원대 가격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도 좋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루아르 와인도 추천 리스트다. “각 와인 산지들은 세계적인 기후 변화로 인해 타격을 많이 받았는데 루아르의 피노누아는 기후가 온화해지며 과실향이 강해졌다”고. 가격이 끝없이 오르고 있는 부르고뉴의 입문용 와인과 비교했을 때 가성비가 뛰어난 와인으로는 ‘빌부아 피노누아’를 꼽았다.
파리=송영찬 기자 0fu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