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미에 남자가 사라졌다! 스위프트·아일리시가 장악한 음악 시장 [오현우의 듣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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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그래미어워드 4대 부문서 여성 뮤지션이 싹쓸이
2018년 미투 운동 기점으로 주체적인 여성상 대두
남성 음악가들의 곡 소재 고갈됐다는 지적도
2018년 미투 운동 기점으로 주체적인 여성상 대두
남성 음악가들의 곡 소재 고갈됐다는 지적도
“가수든, 엔지니어든 진정한 음악가가 되고 싶은 여성은 ‘한 단계 더 발전(Step Up)’할 필요가 있다.”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어워드를 주최하는 전미 레코딩아카데미의 닐 포트나우 대표는 2018년 1월 시상식이 마무리된 뒤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당시 개최된 제60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여성 수상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 남성중심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17년 시작된 ‘미투 운동’의 열기도 식지 않은 시점이었다.
포트나우 대표의 발언에 대해 여성 음악가들은 반발했다. 당시 여성 팝가수 핑크는 “여성 음악가는 더 발전할 필요가 없다”며 “(여성은) 음악계에 발을 들인 뒤 매 순간 발전해왔다”라고 비판했다. 케이티 페리, 이기 아젤리아 등 여성 가수들이 비판에 동참했다. 비판 여론에 밀린 포트나우 대표는 2019년 사임했다.
포트나우 회장의 말을 비웃듯 여성 음악가들이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 6차례 그래미어워드의 4대 부문에서 수상한 남성 음악가는 차일디시 감비노, 실크소닉, 존 바티스타 등 단 네 팀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포트나우 전 대표는 지난해 11월 불법 약물을 사용해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제소됐다. 올해 치러진 제66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여성 음악가들은 신인상(빅토리아 머넷), 올해의 레코드(마일리 사일러스), 올해의 음반(테일러 스위프트), 올해의 노래(빌리 아이리시) 등 주요 4대 부문 상을 모두 휩쓸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올해까지 총 네 차례 올해의 음반상을 거머쥐며 그래미어워드 역대 최다 수상자로 등극했다. 3회 수상자인 프랭크 시내트라, 스티비 원더, 폴 사이먼 등을 제쳤다. 록밴드 파라모어는 올해 최우수 록 음반상을 탔다. 여성이 중심인 록밴드가 이 상을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가장 많은 부문(9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된 음악가도 여성 리듬 앤드 블루스(R&B) 가수 SZA였다. 그래미어워드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여성 음악가들이 약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스페인에서 열린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선 24년 만에 처음으로 4대 주요 부문 상을 여성 음악가가 모두 꿰찼다. 지난 2일 영국에서 열린 브릿어워드에선 영국의 여성 R&B 가수 라예가 ‘올해의 가수’와 ‘올해의 노래’, ‘올해의 작곡가’ 상을 독차지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음원시장은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의 차지였다. 지난해 유튜브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 10곡 중 6곡이 여성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남성 아이돌은 단 한 곡뿐이었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에서도 1위부터 10위를 모두 여성 아이돌 그룹이 휩쓸었다.
여성 음악가가 대중음악계를 지배한 이유는 뭐였을까.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2018년 확산한 미투 운동 이후 주체성을 노래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노래를 비롯해 뮤직비디오 등에서 주체적인 여성상을 표현하며 여성 팬들의 인기를 끌었다는 설명이다. 남성 음악가들의 ‘뮤즈’에 그쳤던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테파니 팽 영국 엑서터대 교수는 ”2018년 이전까지 대중음악 가사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는 대상으로만 그려져 왔다”며 “이후 여성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주체성을 드러내는 가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노래 속 여성상이 달라지면서 팬덤 문화도 바뀌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여성 팬덤은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이끌어왔다. 주로 남성 음악가들을 지지했던 여성 팬덤이 여성 음악가로 옮겨 갔다는 분석이다. 조일동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지난 100여년 간 대중음악 시장을 좌우한 것은 여성 팬덤이었다”며 “이러한 여성 팬덤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 음악가들을 뒷받침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남성 음악가들이 쓰는 작사 소재가 고갈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대중들이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구애의 노래에 질렸다는 설명이다. 돈과 여성, 폭력 등을 주제로 내세우던 힙합 뮤지션들도 빌보드 차트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성 중심적인 가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여성 음악가들의 선전에도 음악 산업계 내부에선 여성의 입지가 단단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하 아넨버그 포용성 이니셔티프에 따르면 지난해 빌보드 차트 100위 작곡가 중 여성은 19.5%에 그쳤다. 영국 음원 차트에서도 14개 장르의 상위 50개 음원을 제작한 프로듀서 중 남성은 3781명으로 집계됐지만, 여성은 187명에 불과했다.
팽 교수는 “여전히 팝 음악 산업에서 성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음악 산업의 다양성을 제고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여성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미국 최고 권위의 음악상인 그래미어워드를 주최하는 전미 레코딩아카데미의 닐 포트나우 대표는 2018년 1월 시상식이 마무리된 뒤 여성 음악가들에 대해 이렇게 조언했다. 당시 개최된 제60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여성 수상자가 단 한 명뿐이었다. 남성중심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2017년 시작된 ‘미투 운동’의 열기도 식지 않은 시점이었다.
포트나우 대표의 발언에 대해 여성 음악가들은 반발했다. 당시 여성 팝가수 핑크는 “여성 음악가는 더 발전할 필요가 없다”며 “(여성은) 음악계에 발을 들인 뒤 매 순간 발전해왔다”라고 비판했다. 케이티 페리, 이기 아젤리아 등 여성 가수들이 비판에 동참했다. 비판 여론에 밀린 포트나우 대표는 2019년 사임했다.
포트나우 회장의 말을 비웃듯 여성 음악가들이 대중음악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2019년부터 올해까지 6차례 그래미어워드의 4대 부문에서 수상한 남성 음악가는 차일디시 감비노, 실크소닉, 존 바티스타 등 단 네 팀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여성들의 몫이었다. 포트나우 전 대표는 지난해 11월 불법 약물을 사용해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제소됐다. 올해 치러진 제66회 그래미어워드에서 여성 음악가들은 신인상(빅토리아 머넷), 올해의 레코드(마일리 사일러스), 올해의 음반(테일러 스위프트), 올해의 노래(빌리 아이리시) 등 주요 4대 부문 상을 모두 휩쓸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올해까지 총 네 차례 올해의 음반상을 거머쥐며 그래미어워드 역대 최다 수상자로 등극했다. 3회 수상자인 프랭크 시내트라, 스티비 원더, 폴 사이먼 등을 제쳤다. 록밴드 파라모어는 올해 최우수 록 음반상을 탔다. 여성이 중심인 록밴드가 이 상을 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 가장 많은 부문(9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된 음악가도 여성 리듬 앤드 블루스(R&B) 가수 SZA였다. 그래미어워드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여성 음악가들이 약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스페인에서 열린 라틴 그래미 어워드에선 24년 만에 처음으로 4대 주요 부문 상을 여성 음악가가 모두 꿰찼다. 지난 2일 영국에서 열린 브릿어워드에선 영국의 여성 R&B 가수 라예가 ‘올해의 가수’와 ‘올해의 노래’, ‘올해의 작곡가’ 상을 독차지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음원시장은 뉴진스, 아이브, 르세라핌 등 여성 아이돌 그룹의 차지였다. 지난해 유튜브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 10곡 중 6곡이 여성 아이돌 그룹의 노래였다. 남성 아이돌은 단 한 곡뿐이었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멜론에서도 1위부터 10위를 모두 여성 아이돌 그룹이 휩쓸었다.
여성 음악가가 대중음악계를 지배한 이유는 뭐였을까.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2018년 확산한 미투 운동 이후 주체성을 노래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노래를 비롯해 뮤직비디오 등에서 주체적인 여성상을 표현하며 여성 팬들의 인기를 끌었다는 설명이다. 남성 음악가들의 ‘뮤즈’에 그쳤던 여성들이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스테파니 팽 영국 엑서터대 교수는 ”2018년 이전까지 대중음악 가사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구애를 받는 대상으로만 그려져 왔다”며 “이후 여성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주체성을 드러내는 가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노래 속 여성상이 달라지면서 팬덤 문화도 바뀌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여성 팬덤은 대중음악계의 흐름을 이끌어왔다. 주로 남성 음악가들을 지지했던 여성 팬덤이 여성 음악가로 옮겨 갔다는 분석이다. 조일동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지난 100여년 간 대중음악 시장을 좌우한 것은 여성 팬덤이었다”며 “이러한 여성 팬덤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 음악가들을 뒷받침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남성 음악가들이 쓰는 작사 소재가 고갈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대중들이 이상적인 여성상에 대한 구애의 노래에 질렸다는 설명이다. 돈과 여성, 폭력 등을 주제로 내세우던 힙합 뮤지션들도 빌보드 차트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남성 중심적인 가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여성 음악가들의 선전에도 음악 산업계 내부에선 여성의 입지가 단단하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하 아넨버그 포용성 이니셔티프에 따르면 지난해 빌보드 차트 100위 작곡가 중 여성은 19.5%에 그쳤다. 영국 음원 차트에서도 14개 장르의 상위 50개 음원을 제작한 프로듀서 중 남성은 3781명으로 집계됐지만, 여성은 187명에 불과했다.
팽 교수는 “여전히 팝 음악 산업에서 성평등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음악 산업의 다양성을 제고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여성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