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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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파리스)는 여신들이 그의 외양간에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던 것이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24권 중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는 그 유명한 ‘파리스의 심판’ 얘기가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사과’와 ‘가장 아름다운 여신 선택’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신화의 내용은 호메로스 생존 당시 청중들은 모두 다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었기 때문에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작품 막판,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의 시신을 모욕하는 장면에 가서야 “여신들이 파리스를 찾아갔을 때 이들을 모욕하고, 파멸을 초래할 색욕(色慾)을 그에게 준 여신을 칭찬했다”는 짤막한 언급이 나올 뿐이다.

파리스의 사과를 포함에 서구 사회에서 ‘사과’를 둘러싼 유명 에피소드로는 <성서> 속 ‘아담과 이브의 사과’, 독일의 문호 쉴러의 <빌헬름 텔>에 등장하는 ‘빌헬름 텔의 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 4가지 ‘사과 에피소드’가 모두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점이다. 종교적 믿음 혹은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것.

그런데도 각종 에피소드 속에서 ‘사과’가 전하는 의미는 적지 않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라고 쓰인 황금사과를 던지자 헤라와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3여신이 경쟁에 나섰고,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뽑았다는 ‘파리스의 판정’ 에피소드에 대해서도 서구 신화학자들은 적잖은 의미를 부여한다.

‘강대한 권력’(헤라)과 ‘전쟁의 승리’(아테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아프로디테)이라는 세 여신이 내건 선물은 보통 “인생의 목표가 될만한 세 가지 가치를 상징한다”는 식으로 해석된다.

“나른한 건달이 벌거벗은 세 여인을 점수 매기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위기에 세 가지 여성적 원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순간의 선택’은 일회적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으며, 인생의 운명을 한방에 결정짓는다.

두 가지 혹은 세 가지를 동시에 지닐 수도 없으며, 결과를 예측하기도 힘든 탓에 ‘두려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에 따라 ‘두려움에 사로잡힌’ 파리스가 세 여신 앞에서 도망치는 모습이 그려진 도기 그림까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금값'이 된 사과/한경DB
'금값'이 된 사과/한경DB
사과 도매가격이 1년 만에 2배 넘게 뛰면서 사상 처음으로 10㎏당 9만원대를 기록했다. 공급량이 줄면서 사과 한 알에 5000원대에 이르렀다. 자칫 사과가 소비자 물가를 올리는 주범으로 부상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커지고 있다.

황금사과도 아니지만 '금값'이 된 사과를 보자니, 지갑이 얇아진 소비자가 사과만 보면 도망부터 가는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김동욱 오피니언부장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