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추억] 서울시민 3분의1 몰린 '창경원 벚꽃놀이'가 사라지고 난 후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시위대일까요? 아니면, 재난을 피해 이동 이동하는 피란민일까요? 사람들이 1976년 4월 18일 서울 종로구 와룡동 창경원(창경궁)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차도와 인도는 물론 고가차도까지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시위대도 피란민도 아닙니다. 봄을 맞아 벚꽃놀이를 즐기기 위해 창경원으로 들어가려는 행락객들입니다.
일요일인 이날 하루에만 무려 17만여 명이 창경원에 입장했습니다. 벚꽃놀이 행사로 인해 창경궁 인근의 도로의 차동차 통행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방문객들은 안국동이나 혜화동부터 걸어서 행사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입장에만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습니다. 그래도 상춘객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습니다. 벚꽃이 아무리 좋다고는 해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경원을 향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엔 시민들이 나들이 갈 만한 장소가 별로 없어서였습니다. 춥고 긴 한반도의 겨울을 보낸 한국인들에게 봄꽃은 특별히 반가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만개한 벚꽃을 보며 봄 기운을 만끽할 곳이 서울엔 딱 창경원 뿐이었습니다.
1971년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밤벚꽃놀이 기간 한 달 동안 150여만 명이 창경원을 찾았습니다. 주말엔 하루 20만 명이 벚꽃놀이를 즐겼습니다. 1970년대 4월 중순~5월 중순 한달 동안 약 150만~200만 명이 창경원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600만 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유아와 노약자를 제외하면 웬만한 사람은 한 번쯤 창경원 벚꽃축제장을 찾은 셈입니다. 이 정도면 브라질 삼바축제에 못지않은 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밤이 되면 창경원은 기타와 이동식 전축을 들고나와 춤과 노래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넘쳐났습니다. 벚꽃 아래 술을 마시고 취해 추태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기간 수백 트럭 분의 쓰레기가 배출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천 명이 넘는 미아가 발생해 미아보호소는 우는 아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봄 언론들은 창경원에서 발생한 소란과 추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도했습니다. 역사민속학자 조흥윤 전 한양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문화론'에서 한국인의 본성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인의 성향이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 민중은 놀이를 삶의 율동으로 익히고 가다듬어 왔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의 본성이 긴 겨울이 끝나는 4월, 꽃놀이에서 폭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봄마다 창경궁 주변이 한달 동안 마비되는 이런 풍경은 1984년 이후 점점 사라졌습니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되면서, 벚나무들이 서울 여의서로(윤중로)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대신 여의도가 서울의 벚꽃놀이 명소로 등장했습니다. 여의도에서의 벚꽃축제도 여전히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창경원 벚꽃놀이 때처럼 붐비거나 소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 새로운 놀이와 여가 문화가 나타나서입니다. 바로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테마파크의 등장입니다. 1976년 문을 연 용인자연농원은 초창기에 식물원, 동물원, 사파리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 우주관람차(1982년), 비룡열차(1986년), 환상특급(1988년) 등 각종 롤러코스터를 차례로 도입, 관람객들의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또한 장미축제(1985년), 튤립축제(1992), 국화축제(1993), 백합축제(1994)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벚꽃놀이 일색이었던, 한국의 봄축제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1997년 4월 한 달 동안 에버랜드 튤립축제장에 115만여 명이 방문했습니다. 에버랜드가 한국의 봄나들이 수요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용인자연농원의 '히트' 요인 가운데 하나는, '마이카시대'의 도래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중산층은 물론 서민까지도 현대자동차의 포니와 엑셀, 대우자동차의 르망 등 소형 승용차를 큰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대도시를 탈출해 테마파크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여가 문화 변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테마파크 롯데월드의 탄생입니다. 롯데그룹은 1989년 7월 12일 서울 잠실에 국내 최초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어드벤처를 개장했습니다. 당시 롯데월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였습니다. 연건평 2만 990평, 지상 1~6층 규모에 각종 탑승 및 게임시설, 관람시설, 아이스링크, 공연무대, 캐릭터 상품점, 레스토랑, 패스트푸드 점 등을 갖춘 이 시설은 미국의 디즈니랜드 수준에 필적했습니다. 특히 스페인 해적선, 풍선비행, 지하탐험보트, 후렌치레볼루션 등 다양한 놀이기구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파노라마극장, 동물극장, 특수영화관인 다이너믹디어터 등은 과거에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을 방문객들에게 제공했습니다. 1990년 한 해 동안 롯데월드에 무려 500만 명이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테마파크 가운데 미국의 디즈니랜드에 이어 2위의 기록이었습니다. 이렇게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과 롯데월드에서 한국인들은 '호모 루덴스' 본능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들의 수요 예측과 과감한 투자가 한국인의 삶의 질을 급속히 향상시킨 것입니다. 이후 지속적 경제 성장과 소득 증가로 한국인의 놀이에 대한 욕구는 더 커졌고, 전국엔 다채로운 테마파크, 물놀이시설, 스포츠 시설 등이 생겼습니다. 또한 지방자치제가 정착해 전국의 각 지역엔 다채로운 축제와 꽃놀이 행사들이 마련됐고, 지금은 전국 어디에서나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신경훈 디지털자산센터장 khshin@hankyung.com
일요일인 이날 하루에만 무려 17만여 명이 창경원에 입장했습니다. 벚꽃놀이 행사로 인해 창경궁 인근의 도로의 차동차 통행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방문객들은 안국동이나 혜화동부터 걸어서 행사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워낙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입장에만 1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습니다. 그래도 상춘객들은 끊임없이 몰려들었습니다. 벚꽃이 아무리 좋다고는 해도,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창경원을 향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엔 시민들이 나들이 갈 만한 장소가 별로 없어서였습니다. 춥고 긴 한반도의 겨울을 보낸 한국인들에게 봄꽃은 특별히 반가운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만개한 벚꽃을 보며 봄 기운을 만끽할 곳이 서울엔 딱 창경원 뿐이었습니다.
1971년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밤벚꽃놀이 기간 한 달 동안 150여만 명이 창경원을 찾았습니다. 주말엔 하루 20만 명이 벚꽃놀이를 즐겼습니다. 1970년대 4월 중순~5월 중순 한달 동안 약 150만~200만 명이 창경원에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600만 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유아와 노약자를 제외하면 웬만한 사람은 한 번쯤 창경원 벚꽃축제장을 찾은 셈입니다. 이 정도면 브라질 삼바축제에 못지않은 열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밤이 되면 창경원은 기타와 이동식 전축을 들고나와 춤과 노래를 즐기는 젊은이들로 넘쳐났습니다. 벚꽃 아래 술을 마시고 취해 추태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기간 수백 트럭 분의 쓰레기가 배출됐다고 합니다. 게다가 천 명이 넘는 미아가 발생해 미아보호소는 우는 아이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매년 봄 언론들은 창경원에서 발생한 소란과 추태를 고발하는 기사를 심심찮게 보도했습니다. 역사민속학자 조흥윤 전 한양대 교수는 그의 저서 '한국 문화론'에서 한국인의 본성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고 설명했습니다. 한국인의 성향이 '놀이하는 인간'의 전형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 민중은 놀이를 삶의 율동으로 익히고 가다듬어 왔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의 본성이 긴 겨울이 끝나는 4월, 꽃놀이에서 폭발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봄마다 창경궁 주변이 한달 동안 마비되는 이런 풍경은 1984년 이후 점점 사라졌습니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되면서, 벚나무들이 서울 여의서로(윤중로)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대신 여의도가 서울의 벚꽃놀이 명소로 등장했습니다. 여의도에서의 벚꽃축제도 여전히 인기였습니다. 그런데, 과거 창경원 벚꽃놀이 때처럼 붐비거나 소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한국에 새로운 놀이와 여가 문화가 나타나서입니다. 바로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 롯데월드 등 테마파크의 등장입니다. 1976년 문을 연 용인자연농원은 초창기에 식물원, 동물원, 사파리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 들어서 우주관람차(1982년), 비룡열차(1986년), 환상특급(1988년) 등 각종 롤러코스터를 차례로 도입, 관람객들의 폭발적 인기를 모았습니다. 또한 장미축제(1985년), 튤립축제(1992), 국화축제(1993), 백합축제(1994) 등 다채로운 행사를 열어, 벚꽃놀이 일색이었던, 한국의 봄축제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1997년 4월 한 달 동안 에버랜드 튤립축제장에 115만여 명이 방문했습니다. 에버랜드가 한국의 봄나들이 수요의 상당 부분을 흡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용인자연농원의 '히트' 요인 가운데 하나는, '마이카시대'의 도래입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중산층은 물론 서민까지도 현대자동차의 포니와 엑셀, 대우자동차의 르망 등 소형 승용차를 큰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대도시를 탈출해 테마파크로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여가 문화 변화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는 테마파크 롯데월드의 탄생입니다. 롯데그룹은 1989년 7월 12일 서울 잠실에 국내 최초 실내 테마파크 롯데월드어드벤처를 개장했습니다. 당시 롯데월드는 세계 최대 규모의 실내 테마파크였습니다. 연건평 2만 990평, 지상 1~6층 규모에 각종 탑승 및 게임시설, 관람시설, 아이스링크, 공연무대, 캐릭터 상품점, 레스토랑, 패스트푸드 점 등을 갖춘 이 시설은 미국의 디즈니랜드 수준에 필적했습니다. 특히 스페인 해적선, 풍선비행, 지하탐험보트, 후렌치레볼루션 등 다양한 놀이기구들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습니다. 또한 파노라마극장, 동물극장, 특수영화관인 다이너믹디어터 등은 과거에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즐거움을 방문객들에게 제공했습니다. 1990년 한 해 동안 롯데월드에 무려 500만 명이 입장했습니다. 전 세계 테마파크 가운데 미국의 디즈니랜드에 이어 2위의 기록이었습니다. 이렇게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과 롯데월드에서 한국인들은 '호모 루덴스' 본능을 마음껏 분출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들의 수요 예측과 과감한 투자가 한국인의 삶의 질을 급속히 향상시킨 것입니다. 이후 지속적 경제 성장과 소득 증가로 한국인의 놀이에 대한 욕구는 더 커졌고, 전국엔 다채로운 테마파크, 물놀이시설, 스포츠 시설 등이 생겼습니다. 또한 지방자치제가 정착해 전국의 각 지역엔 다채로운 축제와 꽃놀이 행사들이 마련됐고, 지금은 전국 어디에서나 봄꽃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신경훈 디지털자산센터장 khshin@hankyung.com